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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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길을 걷다 눈앞으로 오토바이가 스쳐간다. 그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다. 불쾌한 굉음이 흩어지며 떠난다. 너는 죽을 뻔 했네 말하며 다시 가쁘게 걷는다. 3분 후면 지하철이 도착한다. 놓치면 그대로 지각이었다. 너는 눈앞에서 차를 놓친다. 지하철에서는 ‘그’가 옆 병실에서 첫 번째 죽음을 목격했다. 12층을 오를 엘레베이터를 놓친다. 난간을 붙잡고 기어가며 읊조린다. 죽을 것 같아. 수업을 마치고 순환 버스 안에서 납작 찌그러진 채 또 한 번 토해낸다. 딱 죽겠다. 너는 오늘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 뉴욕 맨해튼 폭발 사망자가 7명으로 늘어난 것을 본다. 밥알을 씹어 삼킨다.

 

너는 경주 리조트 사건이 터졌던 밤, 잠들 수 없었다. 너는 일어나 물 두 모금을 마셨고, 그동안 두 발자국 더 죽어가고 있을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언젠가 버스에 앉아 바라봤던 반대 차선의 소방차를 떠올리며 너는,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너는 사망자 명단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그 자리에 새기는 악몽을 꿨다. 그날부터 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걸음마를 일찍 뗀 너는 바퀴벌레를 보고 도망치다 넘어져 머리가 찢겼다. 수건 하나를 새빨갛게 적셨지만 죽지 않았다. 모닥불에 엎어져 손을 태우기도 했다. 한 달 동안 너는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교정 받지 않는 왼손잡이였다. 아토피가 심해 죽고 싶었다. 30도가 넘는 날씨, 넌 진득한 붕대를 감고 누워 아프지 않게 혀를 깨물어봤다. 새로운 하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했던 아침에 너는 옆 반에 놓인 국화꽃 하나를 보게 된다. 짝지가 말했다. 아파트에서 떨어졌대.

 

죽음의 기억은 추억이 되지 못한다. 너는 한동안 죽음의 단상들이 뻗어낸 가지들에 찔렸다. 두려움은 어느새 굳은살이 되어, 어느 순간 너는‘죽을 뻔 했어’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뉴스에도 무심한 척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너는 머리카락을 헤집어야 찾을 수 있는 흉터를 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너는 죽음의 테두리를 만지듯 민둥한 자국을 짚어냈다. 위장된 버릇은 오래된 습관을 이길 수 없었다. 너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어려서부터 병은 늘 그를 따라왔다. '그냥 오는 대로,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젊은 날의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늙어서는 통하지가 않았다. 늙어버린 그는 삶에 대한 갈망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는 어떻게든 견디어야 했다. 혼자 하는 일에 익숙했던 그는 이제부터 정말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다. 그는 지난 날 자신을 오고 간 많은 사람을 훑는다. 그리고 순간, 억울해 지쳐버렸다.

 

피비에게 마비가 왔다.젊은 날을 함께 한 동료 중 한 명은 정신이 상했고, 한명은 죽었다. 그는 죽음이 가지는 현실과 더욱 가까이 마주쳤다. 그리고 오히려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죽음이 부당해서가 아닌, 그저 열여덟로 돌아갈 수 없기에 우는 부인을 만난다. 남편의 질책에 그는 부인 대신 혼이 났다. 부모님의 무덤, 여전히 존재하는 그들의 뼈를 보며 사라지는 것의 두려움을 위로받는다. 무덤 파는 남자를 긴 시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사라졌다.

 

죽음의 두려움은 죽어서야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죽음의 전에 만난 늦지 않은 마주침. 그것은 죽음은 모든 평범한 이에게 찾아온다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였다. 예상치 못한 죽음은 어제도 오늘도 쏟아진다. 죽음의 폭격 아래 안전지대란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 결국 '그냥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너는 아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서둘러 죽음의 진리를 새기며 초연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아직 젊다. 너에게 그런 마주침은 조금 더 늦어도 괜찮다. 다만, 너는 조금 달라진다. 너는 죽음에 애써 태연한 척하지 않고 그대로 슬퍼할 것이며, 죽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살아 있다는 말에 익숙해질 것이다. 느려도 괜찮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조급해 할 일이 있다. 언젠가 그의 모습이 될 너의 아버지를 위해, 한 걸음 더 마주쳐야 함은 벌써 조금은 늦어버렸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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