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조정은 청의 대군을 피해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다다른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에 임금이 있다는 말에 서둘러 행장을 챙겨 떠난다. 죽음을 각오 할 만큼 춥고 머나먼 길임에도 그는 ‘삶 안에 죽음이 있듯, 죽음 안에도 삶은 있다’는 말로 자신의 길을 걷는다. 김상헌은 강을 건너기 위해 사공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청병을 도와 곡식을 얻어 살아가려하는 사공의 목을 베어버린다. 김상헌은 그렇게 사공을 ‘죽어서 살게’ 한다. 하지만 사공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나는 사공에 대한 연민을 품고 다음 책장을 넘기며 그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이 책이 던지는 가장 큰 줄기의 물음이다. 주화파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주전파는 치욕적인 삶은 곧 죽음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임금은 그 물음에 고뇌한다. 시간이 흐르고 군병들은 추위 속에서 지쳐가고 백성들은 불안함 속에 뜬소문에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안에서 무너지느냐, 밖에서 무너뜨리느냐. 결국 시간의 끝에 결과는 같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임금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임금에게 자신의 삶 뿐 아닌 조국의 삶, 그리고 백성들의 삶이 달린 거대한 ‘삶의 선택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백성들에게 임금의 선택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라는 말장난 같은 말로 표상된 것이 아닌 그저 ‘농사를 준비할 것인가, 농사를 준비하지 말 것인가’라는 그야말로 삶, 그 자체의 선택일 뿐이다. 백성들은 명분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나길 원하지만 그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군병들 역시 임금의 고뇌를 ‘계집이 뻗대는 것’에 비유하며 조롱하지만 상관의 명령에 따르며 하루를 보낼 뿐이다.

 

겨울의 추위는 담에 흘러내린 물을 저절로 얼어붙게 만들어 적을 막지만 군병의 손, 발 또한 얼게 만든다. 봄이 오고 얼어붙던 추위는 녹아내려 성벽마저 허물게 만든다. 그리고 그 구멍사이를 통해 당하관 두 명은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성 밖에는 칸이 도착하고 더 이상 버텨낼 식량과 힘은 사라져간다. 결국 ‘실천 가능한 치욕’과 ‘실천 불가능한 정의’에서 임금은 말 그대로 ‘실천이 가능한’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임금은 ‘살아서 죽을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임금에게 칸에게 보낼 국서를 명령받은 당하관 셋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선택한다. 교리와 수찬은 죽음으로 삶을 택했고, 정랑은 살아서 죽는 것도, 죽어서 사는 것도 아닌 나라도 품계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날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김상용은 당면한 것을 당면하며 삶을 결정한다.

 

그렇게 남한산성의 47일은 임금의 절로 마무리 된다. 임금과 조국은 치욕 속에서 죽었고, 그렇게 살아났다. 임금의 선택에 청에 잡혀가는 기녀들은 울며 임금을 부르짖고, 남은 백성들은 농사를 준비한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올린 절로써 임금은 삶의 씨앗을 품어낼 흙냄새를 쫓았고 그렇게 성안에 봄빛이 찬다.

 

그 시대 백성들은 임금의 명령에 따를 뿐, 임금의 선택을 이해하려하지도 화(和)니 전(戰)이니, 이해할 수도 없다.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하기엔 애초부터 놓인 패가 너무나도 악하고 약했다. 결국 임금의 선택에 백성 중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백성들은 그렇게 ‘그나마’ 선택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사공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백성이었던 사공은 죽은 것이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에 결정되어진 사공의 삶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사공의 딸 나루는 살았다. 죽어서 산 것도, 살아서 죽은 것도 아닌 그저 살아남았다. 그리고 새로운 싹이 트는 봄, 나루는 초경을 흘려 새로운 삶을 품어낼 수 있게 된다. 책을 덮자 나는 사공의 죽음을 마냥 억울히 여길 수 없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이 소설을 읽고 그 시대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자와, 선택되어져야 하는 자들이 겪은 저마다의 고통과 고뇌를 읽어내었을 뿐, 그 시대 어떠한 삶이 옳은 것인가 또는 임금과 백성의 고통 중 누구의 고통이 더 힘든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왕은 남한산성에 있었고 그 시대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시대에 있고 한 사람으로서 ‘삶’을 고민해야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겨울은 언제나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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