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거짓말 -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불편한 동맹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3
천젠 외 지음,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외 옮김 / 채륜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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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거짓말은 한국전쟁 발발에 깊숙히 관여한 북한, 중국, 소련이라는 세 나라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 등을 다룬 책입니다. 우리는 매체 등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해 자주 접한 편이나, 한국전쟁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도 단순히 북한의 김일성이 남한을 적화통일하기 위해 침략을 해왔다고 알고 있을 뿐, 그 뒤에 숨겨진 중국, 소련, 북한 삼국간의 야합과 사전계획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김일성과 북한정권에서 찾고 있지만, 실제로 전쟁의 발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건 마오쩌둥과 스탈린이라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건국된지 몇년 되지 않은 신생정권 북한이 강력한 군사력을 육성하여 남침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이라는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살펴보려면 1945년의 상황부터 봐야합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김구와 여운형 등의 지도자들은 좌우합작을 통해 분단을 막으려 시도했으나,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좌우합작은 끝내 결렬되었습니다. 38선 이북에는 이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친소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8월 15일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이 들어섰습니다. 이때까지 양국 모두 분단이 일시적인 상태라 생각했으며, 서로가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습니다. 38선에서는 양국간에 긴장이 끊이지 않았으나, 대대적인 전쟁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대륙을 통일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대륙의 패권을 잡은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고, 그 해 마오쩌둥은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다짐과 동시에 막대한 양의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또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아시아지역 공산혁명의 주도세력(전세계 공산혁명의 주도세력은 당연히 소련이었다)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1949년 시점에서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둘은 김일성의 계획을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은밀하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중국은 본토에 머물고 있던 조선족 부대 수만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냈으며, 소련은 막대한 양의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했습니다. 이는 중국, 소련이 미국의 참전의지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남한을 구하기 위해 굳이 군사력을 투입하지는 않을거라 판단했습니다. 스탈린은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빠르게 끝나 미군이 개입할 틈이 없을거라 생각했으며, 국공내전때 군사력을 보내지 않았던 미국이 한국에 군사력을 보내지는 않을거라 판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과의 대화에서 "미국 내의 지배적인 분위기가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49년 12월 말에 채택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극동지역 전략정책이 그 근거가 되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치밀한 정치가인 스탈린은 설사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소련과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도록 치밀한 계산을 해두었습니다. 그는 사전에 김일성에게 소련은 군대를 지원해주지 않을것을 못박아 두었으며, 지원군이 필요하면 중국에 요청하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물론 나중에 미국도 소련의 개입을 알게 되었지만 세계대전을 원치 않는건 미국도 마찬가지였기에 반쯤 눈감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은 빠른 속도로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미국과 UN의 신속한 개입 덕분에 북한군을 역으로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사실 중국, 소련의 예상을 벗어난 재빠른 조치였습니다(트루먼 대통령 각하께서 한국을 살리셨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측은 대만공격을 연기하고 병력을 만주지역으로 집결시켰으며, 전쟁의 진행상황을 주시했습니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중국이 한국전쟁에 병력을 투입하려 계획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천상륙작전 으로 북한군이 궤멸되자 마오쩌둥은 즉각 참전을 준비할것을 명령했습니다. 10월 초 중공군은 압록강변에 집결을 완료했고 소련 공군의 지원을 받고자 했으나, 스탈린은 돌연 공군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는것을 극도로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중국측은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참전을 망설였으나, 결국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마오쩌둥의 참전결정은 대한민국 주도의 북진통일을 막았고, 때문에 대한민국은 북한이라는 암덩어리를 제거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 책은 사실 한국전쟁의 배경과 전쟁 과정에 대한 여러 짤막한 글, 사료와 증언들을 모아놓은 사료집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중국 학자가 중국측의 입장에서 한국전쟁 원인을 설명한 글과 소련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 글, 한국전쟁 도중 발생한 중국과 북한의 갈등을 설명한 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는 한국전쟁의 숨겨진 이면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와 자료들이 많이 첨부되어 있으나, 여전히 사료들 중 상당수는 미공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 정확히 밝혀내는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확실한건 한국전쟁은 북한, 소련, 중공 삼국의 합작품이었으며, 미군과 UN군의 지원 덕에 우리나라가 생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고 북한, 중국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아야 할것이며, 동시에 우리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한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트루먼 각하와 미군 장병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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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품격 - 작은 섬나라 영국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박지향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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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서양사학계에서 유명한 서울대학교 박지향 교수입니다. 이 분의 학문적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나, 동시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박지향 교수는 그동안 대영제국과 서양 제국주의에 대해 알려진 잘못된 사실과 편견들을 여러 차례 깨뜨렸고, 이 책도 그러한 행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국의 품격>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영제국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총 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파트들은 대영제국의 위대한 업적들과 성공 비결에 대해 다룹니다. 책 맨 처음의 프롤로그에서는 대영제국의 특성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대영제국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제국들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존재합니다. 영토와 권력을 중시한 이전까지의 제국들과 달리 영국은 상업과 해상 무역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흔한 생각과는 달리, 영국의 거대한 영토는 체계적인 계획에 의해 획득되지 않았으며, 우연과 즉흥적 결정으로 인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는 매우 느슨한 편이었고, 상당수 식민지들이 간접 통치 방식으로 지배받았습니다.


1장 <해적에서 해군으로>는 16세기 영국 해군의 탄생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된 요소는 바로 해군입니다. 강력한 해군을 통해 영국은 무역로를 장악하고 방대한 영토를 정복,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초창기 영국 해군은 해군이라기보단 해적에 가까웠고, 에스파냐의 보물선들을 약탈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후 16세기 말 ~17세기를 걸치며 영국 해군은 상당한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루었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라는 적들을 무찌르고 바다의 최강자로 등극했습니다. 18세기 유럽 전역에서 영국 해군에 맞설 상대는 프랑스 정도밖에 없었는데, 양자는 18세기 내내 식민지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지만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해군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유럽 최강이었습니다.


2장은 대영제국의 특성인 자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은 현대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이 시작된 나라입니다. 황제, 칸, 샤한샤, 임페라토르 등 전제군주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전 제국들과는 달리, 영국은 의회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의회는 초기에는 왕이 소집한 귀족 자문회의 형태였지만, 이후 시민계급이 참가했으며 그 권한도 점차 강해졌습니다. 17세기 영국 내전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의회의 권력은 확고해졌고, 17세기 말부터 영국의 실권은 사실상 의회에게 넘어갔습니다. 왕은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거나 군대를 둘 수 없었고, 자유민의 재산과 생명을 함부로 뺏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튼튼한 의회 시스템을 갖춘 덕에 영국은 모든 권력이 통치자 일인에 쏠려있는 다른 제국들보다 안정적이고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함부로 개인의 생명, 재산을 빼앗을 수 없게되자 상인, 자본가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이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3장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류의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력과 짐승에 힘이 주요 에너지원이었다면, 산업혁명 이후로 기계가 그 역할을 대체했습니다. 이는 생산력의 기하급수적인 증대로 이어졌습니다. 왜 하필 다른 곳도 아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느냐는 지금도 학계의 치열한 논쟁거리입니다. 혹자는 단순한 운빨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식민지로부터 착취한 부로 인해 산업혁명이 가능했다는 마르크시즘적인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영국 특유의 제도,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영국은 동시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사회적 유동성이 높았고, 비천한 태생인 사람도 수완이 좋다면 얼마든지 부와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의회 시스템의 확립과 재산권의 보장, 정치적 안정성, 지적 풍토 등 영국의 내부적 요인들은 산업혁명의 발판을 제공했습니다.


4장은 영국의 해군에 대해 다루고 있어 1장과 유사하나,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은 18세기 내내 흑인 노예들을 대량으로 매매했으나, 1807년 돌연 노예무역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어 1833년에는 노예 제도 자체를 불법화 시켰습니다. 영국은 자국 내의 노예무역을 금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해 노예무역을 단속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은 노예무역 단속에 실로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력을 투자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단속으로 인해 브라질은 노예무역을 중단했고, 1860년대에 이르면 대서양 흑인노예 매매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혹자는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시킨건 단순히 경제적 요인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에는 경제적 요인보다도 이데올로기적, 지적인 요인이 훨씬 크게 작용했습니다. 노예 노동력으로 돌아가는 플랜테이션들은 19세기 초반까지도 막대한 이윤을 내고 있었음에도 영국은 이를 끝내 금지시켰습니다. 따라서 노예제 폐지와 노예무역 단속을 통해 영국은 인권의 향상에 상당히 기여한 셈입니다.


5, 6, 7, 8장에서는 대영제국의 기술력, 인도 정복과 통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다문화와 다인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식민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다루고 있는데, 상당히 민감한 주제를 터치했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식민지배의 경험이 있고 제국주의에 대해 격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만큼, 이 부분을 읽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분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국주의가 인종주의, 피지배 국가에 대한 착취 등 수많은 부정적인 요소를 지녔지만 어쨌든 근대 사회로의 편입을 유도했기에 "절대악"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영국의 인도 지배는 결코 관대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인도에 민주주의를정착시킨게 영국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제국주의에 대해 극단적인 찬양, 비판은 지양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말하자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써졌습니다(애초에 독자층을 역덕이 아닌 일반인들로 잡은것 같다). 총 쪽수가 30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라 내용이 굉장히 압축되었습니다. 명예혁명,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 영국사의 기본적인 상식만 갖추고 있다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봅니다. 이 책의 끄트머리에는 대영제국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은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짓과 만행도 무수히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피지배 민족에 대한 착취, 인종차별이 만연했던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최소한 다른 제국들에 비하면 상식적이고 "점잖은"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자본주의, 산업혁명, 의회민주주의 제도 등 인류 역사에 수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 항상 이런 양면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대영제국에 대한 탐구도 예외는 아닐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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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4 : 1400~1500 - 탐험, 무역, 유토피아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4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효정.주효숙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 / 시공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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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귀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부흥카페와 시공사 출판사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 4권은 중세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1400년부터 1500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중세 유럽의 말기로써, 유럽이 중세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서기 15세기는 꽤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갑옷으로 떡칠한 중세식 기사들과 대포 등 화약무기가 공존했으며, 정치적인 면에서도 봉건시대에 비해 중앙집권적인 국가들이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 1,2,3권과 마찬가지로, 4권도 단순히 역사를 다루는데서 그치지 않고 이 시기의 예술, 문화, 종교, 학문, 사회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중세 4권은 크게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 파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실 분량 면에서 보면 역사를 다루는 부분은 꽤 적은 편입니다. 15세기 유럽에서는 여러 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국가들이 이전의 지방분권적인 봉건국가에서 벗어나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에서는 이 변화를 크게 네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a) 군주 개인에게 점차 더욱 집중되는 권력의 칭호 b) 왕조 초기의 합법적인 세력  c) 권력의 실행과 경영을 왕가의 자손들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직접 왕에게 응답하는 인물들에게 위임 d) 외교 및 전문 군대의 탄생.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잉글랜드가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스페인 역시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연합하면서 오늘날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원형이 탄생했습니다.

15세기 프랑스 왕국은 백년전쟁 종결 후 용담공 샤를을 패배시키고 부르고뉴 지방을 합병했으며, 1481년에는 프로방스를 합병하여 오늘날 프랑스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장미전쟁 이후 귀족 가문들이 재정비되었고, 군주제가 강화되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은 15세기 내내 지중해 방면과 남이탈리아 지역으로 팽창했고, 1469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두 왕국인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결혼하면서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기틀이 닦였습니다. 1492년에는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이 축출되었습니다. 반면 독일 지방은 여전히 분열된 상태로 남았습니다. 프랑스, 영국과는 달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배력은 대부분의 지방에 미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한 자신들의 탄탄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16세기 초에는 보헤미아 왕령과 헝가리 북부까지 손에 쥐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합니다. 지중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분열된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패권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초 스페인 왕가와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카를로스 1세라는 괴물이 탄생했고, 프랑스VS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결구도는 100년 이상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동쪽의 발칸에서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고, 아나톨리아와 발칸에 걸쳐 매우 강력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16세기 초 약할대로 약해져있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킨 후 동지중해 전역을 장악했으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대결을 펼쳤습니다.


한편 15세기 유럽은 학문이 큰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는 중세시대 철학은 종교만 중시했고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이 세속적 가치를 중시했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옳지 않습니다. 일단 중세와 르네상스의 전환이 갑자기 이루어진것도 아니고, 이 둘이 딱딱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가령 르네상스 시기에도 여전히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플라톤 학파 등 종교학이 매우 발전했습니다 .15세기 유럽의 과학, 수학, 의학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문헌들을 받아들이며 적극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연금술이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인체해부가 교육적 목적을 위해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이를 금했으나, 어느정도 눈감아주긴 했던 모양입니다. 교육적 목적의 인체해부를 처음으로 시작한 곳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입니다. 인체해부는 교육적 목적 말고 예술적인 목적으로도 도입되었습니다.


건축 면에서도 큰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흔히 우리가 "중세 건축"하면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의 건축 외에도 새로운 건축 양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입니다. 물론 르네상스 건축양식은 15세기까지는 이탈리아에서만 머물렀고, 대부분의 유럽에서는 후기 고딕양식이 여전히 주류였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건축양식은 16세기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끝으로, 마지막 80페이지에 걸쳐 매우 방대한 양의 건축물, 예술품 사진과 지도들이 컬러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15세기에는 많은 발전들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면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대다수 백성들의 삶은 어려웠고, 기근과 전쟁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15세기 인노켄티우스 8세 교황의 치세부터 마녀사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마녀사냥의 양상은 지역별로 매우 다르게 나타났으며, 그 지역의 전통적인 마녀관과 결합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령 프랑스의 경우, 마녀사냥 초기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체포되었으며 사회 고위층들이 고발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대부분의 희생양은 여성이 되었습니다. 의외로 에스파냐의 마녀사냥은 중부, 북부 유럽에 비하면 온건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는 마녀 의심자에 대한 고문과 처벌이 비교적 약했습니다. 이러한 마녀사냥은 17세기 중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18세기까지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분량문제로 이 서평에 다 담아내진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중세 유럽에 대해 굉장히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더불어 중세 후기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많이 깨졌습니다.




PS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악성댓글 사태로 인해 서평제출이 지연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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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혼후 - 지워진 황제의 부활
리롱우 지음, 진화 옮김 / 나무발전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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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혼후, 지워진 황제의 부활은 한나라의 잊혀진 황제 폐제의 능묘 발굴과 이를 통한 그의 삶의 재조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칭호에 걸맞게 빠르게 폐위된 덕에 존재감이 거의 없던 그의 삶이 재조명된건 2011년 우연히 그의 무덤이 발견되면서였습니다. 근처에 도굴꾼들이 있는것 같다는 주민의 신고로 공안은 조사에 들어갔고, 한 무덤을 파헤치고 있는 도굴꾼들을 즉시 검거했습니다. 이들이 파헤치고 있던 무덤은 즉시 발굴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 연이어 발견되었습니다. 부장품들은 일반적인 제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으며, 심지어 황제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5년에 걸친 발굴조사 끝에 그곳은 폐제 해혼후 유하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가 묻힐 당시 유하는 황제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몇일이나마 황제였던만큼 그에 걸맞는 예우를 갖췄던 것입니다.

그의 고분에서는 마왕퇴 발굴 이후 가장 많은 양의 한나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애초에 신분상으로도 유하가 마왕퇴의 묘주보다 훨씬 높았으니 출토품의 양과 질도 훨씬 많을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무덤에서는 묘주에게 시중을 드는 용도의 목용들이 수십개 발굴되었습니다. 또한 수만을 헤아리는 죽간, 목간들과 마제금, 인지금, 금병을 포함한 금붙이 300개와 200만개에 달하는 오수전, 그리고 각종 철기, 청동기, 옥기, 칠목기, 도자기, 보석 공예품들도 출토되었습니다. 해혼후 릉의 발굴은 한대의 의식주, 일상생활, 문화, 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파고들 수 있게 해준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발굴된 한나라 시대 기록과 문헌들은 한나라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들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저자의 기대대로 선진시대 문헌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많은 부장품을 보유한 무덤의 주인 유하는 누구였을까요? 그는 한 무제의 손자로서 일생동안 서민, 제후, 왕, 황제의 지위를 모두 누려본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였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한무제는 기원전 87년 숨을 거두었고, 소제가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소제는 기원전 74년에 이른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한나라의 제위는 공백이 되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뒤를 이어 광릉왕 유서가 황제가 되어야 했으나, 당시 실권자였던 곽광은 그가 황제가 될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무제의 손자인 창읍왕 유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역시 곽광의 눈 밖에 나면서 겨우 27일만에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곽광이 구체적으로 왜 유하를 폐위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소제의 장례식 기간에도 주색을 탐한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유하가 고향 창읍국에서 데려온 대신들만 임용하고 곽광과 다른 노신들을 푸대접한것이 곽광의 분노를 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문물들과 여러 정황상 증거들은 유하가 주색에만 빠져 지내는 폭군이 결코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하는 폐위된 후 창읍왕으로 돌아갈수는 없었으나, 곽광은 그에게 상당량의 토지를 하사하여 먹고 살 걱정은 없게 하였습니다. 폐위된 유하 다음으로 황제가 된 선제는 그의 실패를 교훈삼아 조심스럽게 처신했고, 그는 전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후 곽광이 사망하자 선제는 유하를 해혼후로 봉했고, 유하는 제후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의 서평을 신청한것은 무덤 발굴 자체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한나라 고분들 중 가장 풍부한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는게 흥미로웠고, 책에 관련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책에서 무덤 자체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관련 내용은 앞부분에 조금 있었고, 책의 내용 대부분은 유하의 일생과 곽광 등에 대한 내용으로 차 있습니다. 사실 책 자체는 그리 재미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유하라는 비교적 생소한 인물의 일생에 대해 다루고 있고, 한나라 황실의 가족사와 정치 등을 다루고 있기에 이 시기의 역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한나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편입니다. 한무제 이전까지 전한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있으나, 한무제 사후부터 전한의 멸망때까지는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이 책은 한무제 사후 곽광과 폐제, 선제 등에 대해 다루고 있기에 이 시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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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황제 - 로마보다 강렬한 인도 이야기
이옥순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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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황제>는 무굴제국 황제들의 일대기와 사생활, 무굴제국의 역사에 대해 다룬 책입니다. 굉장히 하드(??)할 줄 알았던 저의 기대와는 달리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분량도 300페이지 이하로 짧은 편이라 저는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난이도의 경우, 무굴 제국에 대한 사전 지식이 딱히 없어도 어렵잖게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입니다. 물론 책을 읽기 전에 인도의 주요 도시와 지방들의 이름을 조금씩 알아두신다면 읽는게 더 편해질것 같습니다. 책 자체는 팩트에 충실하면서도 중간중간에 재미있는 일화들과 황제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무굴제국사에 관심이 있지만 국내에 자료가 워낙 없어 입문조차 힘든 경우가 많은데, 그런 분들은 이 책으로 기본을 배우시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무굴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황제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바부르, 후마윤, 악바르, 자한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 이 ​여섯 황제의 이야기가 책의 전체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대 초강대국 무굴제국의 황제들은 나름대로의 다양한 개성과 특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창건자인 바부르는 원래 사마르칸트를 정복하여 조상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하는게 소원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델리 술탄 왕조를 정복하고 무굴제국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죽을때까지도 그는 무더운 인도를 좋아하지 않았고 중앙아시아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후마윤은 지나치게 관대한 성격을 가진 나머지 정적들과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치세 내내 반란과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세르 샤에게 제국을 빼앗기고 사파비 왕조에 망명을 가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사파비 왕조의 도움으로 제국을 되찾았지만, 예배를 알리는 기도 소리를 듣고 도서관 계단을 급히 내려가던 중 굴러떨어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마 역사상 존재했던 지도자들의 죽음 중 가장 허무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인도는 물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황제 중 하나였습니다. 종교적 관용 정책을 베풀어 수많은 신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정복 활동을 통해 무굴제국을 초강대국의 반열로 올려놓았습니다. 사실 이전 후마윤 황제 때만 해도 무굴제국의 통치력은 매우 불안했는데, 악바르 시대부터 비로소 무굴제국은 진정한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악바르가 다져놓은 초강대국을 물려받은 자한기르, 샤 자한은 각종 건설활동과 예술 후원을 통해 제국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무굴제국은 17세기에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아내가 숨진 뒤 건축활동에만 매진하던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됩니다. 아우랑제브는 무굴제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엄격한 이슬람교도였던 그는 사치와 주색을 즐기던 다른 무굴 황제들과는 달리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슬람의 가르침을  평생동안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는 흔히 알려진것처럼 비관용적이고 잔인하기만 한 황제는 아니었으며, 치세 초기에는 이교도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고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의 데칸 지방 정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돈을 잡아먹었고, 이는 당연히 높은 세금으로 이어졌습니다. 국가의 모든 재물이 전쟁비용으로 쓰이면서 무굴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건축 역시 쇠퇴하게 됩니다. 아우랑제브가 사망할 때 무굴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할 정도로 취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의 사후 황제들이 연이어 단명하고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지면서 무굴제국은 50년도 지나지 않아 껍데기 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머리속에 오래 남은 사람이 바로 아우랑제브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제국의 몰락에 일조했다는게 씁쓸하면서도, 아우랑제브에 대한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굴제국의 쇠망 과정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번외 식으로 아우랑제브 사후부터 세포이 반란 진압과 무굴제국의 멸망까지를 간략하게 다루고는 있으나 말 그대로 "요약"에 불과합니다. 사실 저는 무굴제국의 전성기 역사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쇠퇴기의 역사를 배우는것 역시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700년대 초 아우랑제브가 사망할 당시까지도 초강대국이었던 나라가 불과 50년만에 수도 일대만 간신히 지배하는 껍데기 국가로 전락한것은 예삿일이라고 볼 수 없죠. 이렇게 강대한 나라가 빠르게 쇠망을 한 데에는 분명 굉장히 많은 요인들이 있었을텐데, 무굴제국의 쇠망 과정과 원인에 대한 자세한 고찰이 없었다는 점이 좀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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