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가 놓인 방 소설, 향
이승우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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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당신의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면도기와 액자를 가져가세요. (p.18)

2인칭 시점의 소설을 좋아한다. 몇 문장만으로도 나를 소설 속 무대에 올리고 내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니 나는 페이지를 계속 넘겨 막이 내릴 때까지 책과 한 호흡이 된다. <욕조가 놓인 방>에서 나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 모를 관계를 막 끝낸 '당신'이 되었다.

아내와 권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당신'은 H시로 근무 발령을 받는다. 당신은 옛날 남미 출장에서 만난 가이드가 생각나 연락을 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에 방을 얻어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녀는 원래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만 비행기 사고로 가족을 잃고 죽음에 언제나 닿아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의 방에는 커다란 욕조가 놓여 있어 당신은 그녀가 욕조에 몸을 담그는 물 소리를 늘 듣는다.

욕조 속에서 간혹 사랑을 나눌 때마다 '당신'은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만을 받고, 나중에는 물 소리가 듣기 싫어져 스트레스로 살이 빠지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가 계속 들어가려는,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물은 죽음을 상징하는 듯 당신을 계속 괴롭힌다.

뒤척이다가 견디지 못한 당신이 가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의 방문을 밀어보면 그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욕조 안에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물 또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다시 물소리가 들렸다. (p.112-113)

그녀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당신'은 본사로 귀환 연락을 받고 그녀가 가져가라는 면도기와 액자를 찾아 집으로 오지만 집엔 그녀도, 면도기와 액자도 없다. 물이 가득 찬 욕조를 본 당신은 너무나 아늑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욕조에 몸을 담근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의 합일에 이르기 힘든 것일까? 그녀와의 관계가 사실상 끝나고 나서야 당신은 그녀의 물에 스스로 몸을 담그며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죽음에 늘 몸을 담그는 여자와 죽음을 생각만 해도 불쾌한 남자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을 이렇게 끝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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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나의서재
<책 읽어주는 나의서재> 제작팀 지음 / 넥서스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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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니 책을 다루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챙겨보게 된다. tvN의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한 권씩 소개한다. 이 프로그램을 엮어서 책이 나왔다. 이 책에서 사회학자, 인문학자, 과학자들이 소개하는 책은 총 15권이다.

1. 『개소리에 대하여』 김경일 교수
2.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김태경 교수
3.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배정원 교수
4. 『메트로폴리스』 박정호 특임교수
5. 『레 미제라블』 양정무 교수
6. 『오이디푸스 왕』 김헌 교수
7. 『갈리아 원정기』 임용한 박사
8. 『실크로드의 악마들』 강인욱 교수
9. 『클라라와 태양』 김대식 교수
10.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조천호 교수
11.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성호 교수
12. 『레디 플레이어 원』 김상균 교수
13. 『수학자의 아침』 김상욱 교수
14. 『쓰고 달콤한 직업』 이명현 박사
15. 『팬덤 경제학』 최재붕 교수

위의 열 다섯 권은 소설, 시, 희곡, 에세이, 철학, 역사, 마케팅 등의 다양한 장르를 어우른다. 책 편식이 심한 나는 이 중에서 겨우 세 권만을 읽었는데, 서점에서 표지만 봤던 책들을 쉬우면서도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강의를 따라서 책을 읽다 보면 열 다섯 권의 책을 모두 완독한 것 같은 뿌듯함도 생겨난다.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 분야의 책을 소개할 때보다 오히려 전공과 무관한 책을 독특한 관점에서 소개해 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시집을 소개하는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에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견해가 어우러져 내가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을 전해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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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부엌
김지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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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자연 속에 있는 북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상상, 통유리창을 통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시골 북스테이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 상상, 바쁜 삶에서 잠시 벗어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상상을 소설 속에서 이루어주는 <책들의 부엌>을 읽었다.

소양리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는 소양리 북스 키친은 2층으로 된 네 개의 동이 가운데 있는 유리 식물원을 향해 연결되는, 십자 모양의 북카페+북스테이의 복합 공간이다. 운영하던 스타트업이 다른 회사에 인수되고 공허함을 느끼던 유진은 우연한 기회에 소양리로 내려와 북스테이를 열게 된다.

소설은 매화가 피고 소양리 북스 키친이 막 오픈한 봄에 시작해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마무리가 되면서 소양리 북스 키친의 첫 한 해를 담고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아이돌 다인, 앞만 보고 최단 경로를 달려온 변호사 소희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 머물며 다친 마음을 쉬게 하고 새 출발을 위한 힘을 얻어간다.

소양리 북스 키친의 분위기 맛보기:
유진이 제일 먼저 눈을 떴다. 북 카페에서 드립 커피를 내렸고, 어제 매니저가 사온 시나몬 롤빵을 몇 조각으로 자른 뒤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접시를 꺼내자, 특유의 시나몬 향이 재즈 음악처럼 여유롭게 퍼져나갔다. 따스해진 롤빵은 슈거 파우더와 어우러져 촉촉하고 달콤했다. (p.53)

이 소설은 꿈꾸는 것같이 아름다운 사계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문에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소양리 북스 키친 그리고 이곳에 다녀가는 리플리 증후군을 겪는 동창과 가업을 이어야 하는 재벌 3세 청년, 가족같은 분위기의 북스테이 스태프들..

하지만 이 완벽한 아름다움이 주는 비현실성에서 나는 오히려 현실을 잊고 해피엔딩이 주는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때로는 그런 소설이 필요한 법이다. 두 편의 에필로그까지 달콤했던, 잠시나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꿈에 그릴 법한 행복을 맛보게 해주는 <소양리 북스 키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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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의 언어 - 우리 삶에 스며든 51가지 냄새 이야기
주드 스튜어트 지음, 김은영 옮김 / 윌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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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의언어> #주드스튜어트
우리 삶에 스며든 51가지 냄새 이야기

아침에 눈을 뜨면서 맡을 수 있는 따뜻한 침구의 냄새, 아침 식사 샐러드에 뿌리는 발사믹 식초의 톡 쏘는 냄새, 빵집의 열린 문으로 풍기는 갓 구운 빵과 커피 냄새, 학원으로 뛰어오는 아이들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 냄새, 퇴근 길에 지나가는 치킨 집의 고소하고 짭쪼름한 기름 냄새, 자기 전에 바르는 바디로션의 꽃 향기... 우리 코는 하루 종일 우리에게 다양한 냄새들과 그 냄새가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느낌과 추억들을 전해준다.

<코끝의 언어>는 후각을 예민하게 하는 책이다. 우선 코와 후각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한 뒤에 과학, 역사, 지리, 예술, 문화를 곁들여 우리가 친숙하게 맡거나 혹은 맡아본 적도 없는 냄새들(녹고 있는 영구동토층이나 성경에 나오는 유향과 몰약의 냄새를 궁금해 해본 적이 있는가?)을 열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묘사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냄새를 잘 맡기 위한 연습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책의 도입부에서는 코와 후각에 대해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한 서술을 읽으며 책이 다소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다음 장을 펼치니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마른 땅의 비 냄새'. 빗방울, 흙의 광물, 비에 젖은 풀의 냄새를 묘사하는 단락에 밑줄을 그으며 후각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저자의 묘사를 읽으며 잠시 눈을 감고 그때의 시공간으로 되돌아간다. 연필을 깎으며,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눈길을 걸으면서, 아기를 안으며 느낀 행복과 설렘을 다시 느낀다. 냄새에 대한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정보도 가득 전해주는 책이지만, 나에게 이 책은 400 페이지의 행복과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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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미래 - 프란치스코 교황과 통합 생태론에 대해 이야기 하다
카를로 페트리니.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김희정 옮김 / 앤페이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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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사회학자, 시민 운동가이자 국제 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그날 이후로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 받은 두 사람은 세 차례의 만남을 통해 인간과 환경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그 세 번의 대화와 다섯 가지 주요한 주제 그리고 교황이 발표한 의미 있는 담화들을 책으로 엮었다.

2015년에 발표된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을 함께 살리는 통합 생태론을 초석으로 한다. 교황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위기에서 우리를 구할 방법으로 통합 생태론을 제시한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환경과 경제, 인간 사회와 공동체를 모두 살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양성'을 중요시한다. 자연이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인간은 이민을 통해, 교회는 토착화와 세속성(세속주의와는 구별) 추구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어우러지는 사회에 대해 강조한다. 가톨릭 교회 최고 성직자인 교황이 자신이 불가지론자임을 밝힌 카를로 페트리니와 지구의 미래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세 차례의 만남을 갖는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 여러 사회 활동에 제한이 생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이 더 커진 것이다. 공동체는 경쟁에서 협력으로 변화하며, 대화를 이끈다. 2부에서 이야기하는 다섯 가지 주제 중 생물 다양성, 경제, 교육, 이민이 결국 다 같이 잘 사는 공동체를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한 두 사람의 지성과 영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에 <지구의 미래>는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 아니다. 하지만 위기의 시대에 시민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우리 개인은 어떤 선택과 실천을 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는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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