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당신의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면도기와 액자를 가져가세요. (p.18)⠀2인칭 시점의 소설을 좋아한다. 몇 문장만으로도 나를 소설 속 무대에 올리고 내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니 나는 페이지를 계속 넘겨 막이 내릴 때까지 책과 한 호흡이 된다. <욕조가 놓인 방>에서 나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 모를 관계를 막 끝낸 '당신'이 되었다.⠀아내와 권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당신'은 H시로 근무 발령을 받는다. 당신은 옛날 남미 출장에서 만난 가이드가 생각나 연락을 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에 방을 얻어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녀는 원래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만 비행기 사고로 가족을 잃고 죽음에 언제나 닿아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의 방에는 커다란 욕조가 놓여 있어 당신은 그녀가 욕조에 몸을 담그는 물 소리를 늘 듣는다.⠀욕조 속에서 간혹 사랑을 나눌 때마다 '당신'은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만을 받고, 나중에는 물 소리가 듣기 싫어져 스트레스로 살이 빠지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가 계속 들어가려는,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물은 죽음을 상징하는 듯 당신을 계속 괴롭힌다.⠀뒤척이다가 견디지 못한 당신이 가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의 방문을 밀어보면 그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욕조 안에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물 또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다시 물소리가 들렸다. (p.112-113)⠀그녀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당신'은 본사로 귀환 연락을 받고 그녀가 가져가라는 면도기와 액자를 찾아 집으로 오지만 집엔 그녀도, 면도기와 액자도 없다. 물이 가득 찬 욕조를 본 당신은 너무나 아늑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욕조에 몸을 담근다.⠀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의 합일에 이르기 힘든 것일까? 그녀와의 관계가 사실상 끝나고 나서야 당신은 그녀의 물에 스스로 몸을 담그며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죽음에 늘 몸을 담그는 여자와 죽음을 생각만 해도 불쾌한 남자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을 이렇게 끝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