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1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포이에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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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렛 예수와의 만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밀라노 레스토랑 3월 24일 화요일 저녁 8시

 

   사무실에서 각종 광고지와 청구서와 함께 이런 익명의 초대장을 발견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주인공 닉은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근처 교회에서 전도행사를 하려는 모양이군'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상합니다. 직장 주소를 알아낸 것도 좀 이상한데다가, 초대장을 익명으로 보낼 리도 없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교회에서 전도행사를 이런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할 리도 없지요. 그 교회 전도행사에도 가봤지만 영 별로였거든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고정하고 있다가 골프를 치면서는 욕을 하는 사람들. 

   '아하, 사무실 동료 레스와 빌이군.' 이 친구들은 짓궃은 장난을 하고는 낄낄대는 친구들이니까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은근한 기대감을 품고 닉은 그날 저녁, 약속장소로 들어갑니다. 긴 옷에 장발을 한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그런데, 이름을 대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간 테이블에는 푸른 양복을 입은, 짙은 밤색의 곱슬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30대의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악수를 하며 인사하지요. "닉 코민스키 씨, 안녕하세요. 예수입니다."

   "열두 제자는 어디에 있나요?" 또는 "예수님께서 양복차림으로 묻히신 줄은 몰랐는데요."라는 식으로 맞받아쳤어야 하는데 당황한 닉은 "아, 그렇군요."라는 말밖에 못하고 자리에 앉지요.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회사 동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의심을 품고 계속 꼬투리를 잡으면서 정체를 밝히려는 닉에게 '자칭 예수'는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불신을 중단하고 자신이 진짜 예수인 것처럼 대화를 해 보자는 것이지요. 닉은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대학 때 종종 나눴던 철학적인 토론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게다가 밥값은 이 사람이 낸다고 하거든요!^^

 

   이렇게 닉은 예수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왜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 - 힌두교나 불교, 이슬람교는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우주가 저절로 생성된 것은 아닌지..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그들은 어느새 기독교가 '진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지요.

   '자칭 예수'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단절된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의 반란때문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균열은 너무도 커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메꿀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열심히 지키고, 자선사업을 하더라도 메꿀 수 없지요. 그 틈을 메울 수 있을 만큼 큰 존재는 신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와 히틀러는 분명히 도덕적으로 크게 다르지만, 하나님과의 거리로 따지게 되면 큰 차이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절대적인 거룩이시니까요. 하나님은 또한 정의로우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에 대해 대가를 치뤄야만 하지요. 

   '자칭 예수'는 하나님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과를 치르게 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직접 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두 번째 길을 선택하셨지요. 인간을,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셨으니까요. 그렇게 완전한 정의를 충족시킨 후 그 대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죄 평결을 대가 없이 선물로 제공했습니다.

  

   이제 닉은 당연한 질문을 합니다.

   "그 선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냥 받기만 하세요. 그뿐입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받는 거죠?"

   "하나님을 믿기만 하세요.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이 바로 믿음이잖아요. 하나님이 선생의 죄값을 갚기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맺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생의 죄를 용서해 주실 거라고, 영원한 삶을 주실 거라고 믿으세요. 하나님이 선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선생을 되찾고 싶은 거니까요. 선생은 그저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내 눈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신이 왜 날 그토록 사랑하는지 납득되지도 않았고, 내가 그를 원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 닉은 디저트를 먹으며 '자칭 예수'에게 몇가지 더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부활했는지, 지옥은 있는지, 천국은 어떤 곳인지, 고통은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아버지를 그렇게 일찍 데려갔는지... 그의 여러 질문에 이 '자칭 예수'는 때로는 날카로운 논리로, 때로는 따사로운 공감으로 대답합니다. (어려운 질문은 슬쩍 넘기기도 하지요.^^)

   이제 이 사람을 정말 예수라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닉이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예수는 닉의 명함 뒤에 연락처를 남겨 줍니다. 그리고, 작별하지요.

 

   이 책은 기독교를 저녁식사의 대화 방식으로 친근하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식사라는 설정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저도 예수님이랑 밥을 먹게 된다면 여쭤보고 싶은게 무지 많거든요. (어째 살면 살수록 그 리스트가 더욱 길어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방식이 원래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먹는 것을 좋아하셨고, 딱딱하게 교리적인 강의를 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익숙했던 상황과 주변의 사물을 비유로 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은 그 분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필요했던 거지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사람들이 밥먹는 것도 잊었거든요.)

   물론 이런 방식의 책에만 익숙해져서 좀더 깊은 이야기나 교리를 멀리하면 너무 얕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얇은 책의 '내용'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거든요.

  

   이 책에도 추천사가 여러개 붙어 있는데요, 그 중에 '감자탕 교회'로 유명한 조현삼 목사님의 추천사가 제일 인상적입니다.

   "전해 주기만 해도, 읽기만 해도 전도가 되는 책!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백 권을 예약하는 일이었다."

   

   참, 아까 예수님이 닉과 헤어지면서 명함 뒤에 연락처를 남겼다고 말씀드렸지요? 집에 와서 명함을 꺼내어 뒤집어 본 닉은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성경책을 꺼내어 그 연락처를 찾아봅니다. 명함 뒤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거든요.

 

   "요한계시록 3:20"

 

   무슨 말씀인지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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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게리 토마스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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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있을 때, 아파서 의무실에 가면 어차피 약은 두 가지 밖에 없다는 말이 있었지요. 먹는 약 하나, 바르는 약 하나. 배가 아프다고 하면 먹는 약을 주고, 피부가 가렵다고 하면 바르는 약을 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그럴리는 없겠지만요.^^) 모두들 아시다시피,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야 하지요. 그리고나서 그에 따른 적절한 처방을 해야 합니다. 다양한 증세에 대해서 늘 같은 약을 처방하는 의사는 (그것이 영험하기 짝이 없는 만병통치약이 아닌 이상) 돌팔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자는 교회에서 비슷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만드셨는데, 영의 양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아침에 QT 30분 하고 주일 예배에 나오면 됩니다."라고 획일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하고 일괄적이며 교인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주기 쉽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추측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것만으로는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성경과 전통, 교회사를 다시 돌아보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유형별로 나누어서 정리했지요.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영적 기질'이라고 부르더군요. 저자는 영적 기질을 9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1부에서 아예 그 9가지의 영적 기질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1. 자연주의 영성 :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2. 감각주의 영성 : 오감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3. 전통주의 영성 : 의식과 상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4. 금욕주의 영성 :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5. 행동주의 영성 : 참여와 대결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6. 박애주의 영성 :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7. 열정주의 영성 :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8. 묵상주의 영성 :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9. 지성주의 영성 :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참, 당연히 한 사람에게 한 가지의 기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두 세가지의 기질이 같이 나타나지요. 심지어 9가지를 다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예수님은 그러셨을테고, 저자는 성경에서 또 한 사람의 예를 듭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해답은 글 마지막에 알려 드릴게요^^)

   또한 한 사람의 기질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기질이 개발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2부에서는 각각의 기질에 대해서 깊이 탐구합니다. 각 기질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성경 속에서 그런 영적 기질을 보여준 인물은 누가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 방법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런 기질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각 장의 말미에는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나는 그런 기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게 해주지요.

   자연주의 영성이 제일 먼저 나오니까, 자연주의 영성 체크리스트를 한번 엿볼까요? 항목을 읽고 자신과 딱 맞다고 생각하면 5점,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면 1점을 주면 됩니다. 총합이 15점 이상이면 자연주의 기질이 있다는 의미라네요. 한번 점수를 매겨보시죠.^^

  a. 나는 숲이나 바다 등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속에 있을 때 그분이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b. 나는 음악을 듣든 노래를 부르든 실내에 있어야 할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갑갑하다. 내게 하나님이 가장 가깝게 느껴질 때는 밖으로 나갈 때다.

  c. 나는 그룹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작은 시냇가에서 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좋다.

  d. 나는 쌀쌀한 날 정원에 나가 기도하거나 따뜻한 날 초원을 거닐거나 다른 날 혼자 산에 오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e. <자연의 성소 : 그림책>이라는 책을 나는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f. 나는 새로운 개념을 배우거나 격식을 갖춘 예배에 참석하거나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더 감동된다.

   자, 체크해 보셨나요? ^^

   이 책을 읽으면 먼저 관용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참 다양하게 지으셨고, 그들과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도 쉽게 기준을 획일화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요. MBTI나 애니어그램과 같은 지표들을 통해 사람들의 다양한 성향을 인정하는 것이 널리 퍼진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지요.

 

   동시에, 이렇게 각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교회의 어떤 예배나 프로그램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모임과 프로그램이 필요해지나 봐요. 

   그런데, 다양성을 강조하다가 보면 꼭 반대의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원래 이러니까 내버려 둬.'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폭력이라면, '다름'만 내세우는 것은 무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신 것은 서로 권면하고 피차 세워서 온전함에 이르라는 뜻이거든요. 

   저자는 또한 우리의 영혼을 정원으로 묘사합니다. 정원에 씨를 심었더라도 잘 가꾸어야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정원도 잘 가꾸어야 한다고 권하지요. 우리가 우리의 정원을 잘 가꾸면 우리는 남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설렁설렁 가꿨다면 나 하나 먹을만큼만 거두게 되겠지요. 그리고 만약 아예 가꾸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주는 열매만 먹고 사는 소비자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늘 배고픈 상태로 있을지도 모르구요.

  

   마지막으로, 노파심에서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 이 책을 보시고 나서 "나는 말씀 묵상은 안 맞는 기질이야. 앞으로 아침묵상은 안 해도 되겠다."라는 어마무시한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까봐요. 이 글 첫머리에 제가 병원을 예로 들면서 각각의 병에 맞는 다양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지만 모든 병에 공통적인 치료 (또는 예방법)도 있다는 것 아시죠? 적당히 먹고, 운동하고, 스트레스 안 받는 것. 말씀 묵상과 기도, 예배와 교제는 거기에 해당한답니다.^^ 

  참, 정답도 알려드려야죠? 저자가 9가지 영적 기질을 모두 갖춘 예로 든 사람은 바로 다윗입니다. 흠.. 듣고 보니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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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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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싯구를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영국의 T.S Eliot 이 1922년에 발표한 <황무지>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당시 그는 동쪽 끝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몰랐겠지만, 슬프게도 그의 시는 이곳에서 자주 현실화되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에서 반란과 진압, 광기와 학살이 시작되었고, 1960년 4월 19일에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젊은이들의 피가 도로를 적셨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매년 4월이면 다시 노란 리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그렇게 덧없이 수장되어 버린 304명의 이름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게 되었습니다. ㅜㅜ

 

   슬프게도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세월호 특별 조사위원회의 설치 자체도 너무 늦어진데다가, 이런 저런 한계와 이유로 지금까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철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유가족들은 보상을 거부하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의견도 양분되어서 유가족이 너무한다며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진상을 밝히는 것이 우선 아니냐며 유가족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양 끝에는 박근혜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단식 농성을 하는 유가족 옆에서 피자를 먹으며 폭식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세월호 말고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참사는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세월호 참사는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걸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이 250명이나 사망했다는 것, 그리고 순식간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물에 가라앉았다는 것, 선장이 처음에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바람에 (그리고 자기만 먼저 탈출했기 때문에) 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 구조 작업을 지휘하는 정부가 너무 우왕좌왕했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일 것입니다. 온 국민이 304명의 임종을 지켜본 목격자가 되고 만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단순사고라고 말하지 않고 어른들이 죽인 것이라는 자책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 발생과 수습과정이었고, 그래서 유가족들은 더욱 더 진실을 밝히라며 요구합니다. 그에 따라 찬반양론이 격해지고, 그 과정에 각종 유언비어와 음모론, 진영논리가 더해져 완전히 편을 가르게 되었구요. 양쪽의 의견을 들어보면 정말 너무나 달라서 과연 진실이 밝혀질지, 아니 진실이라는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1년이 된 지금, 그 사건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책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사회학적, 신학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기도 했고, 문학으로 표현하기도 했지요. 그 중 이 책은 13명의 유가족들과 나눈 인터뷰를 모은 기록물입니다.

   참사가 일어난 후 많은 사람들이 유가족을 도우려고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몰라서 머쓱해하며 괜히 분주하게 왔다갔다만 하며 지내다가 서서히 자신들의 해야 할 일과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지요.

   그 중 작가들은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8개월간 분향소에서, 단원고에서, 장례식장에서, 진도체육관에서, 광화문에서, 집에서 유가족들과 동행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모들은 핸드폰에 있는 아이들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고는 자식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울음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작가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이 책은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식들이 가족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합니다. 어떤 부모님은 너무 잘해 준것이 없어서 미안해서 울고, 어떤 부모님은 너무 착하고 예쁜 아이였기에 울고, 어떤 부모님은 사이가 안좋은 아이였기에 웁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건 당시를 기억해 들려줍니다. 배가 기울면서 아이와 전화통화를 한 사람도 있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침부터 안절부절하지 못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충격의 시간들.. 아이를 제발 구해달라는 외침이,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시신으로라도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고, 시신을 찾은 부모에게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부모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크게 망가져 있는 시신을 보고 나서 괜히 봤다며 후회하는 부모님이 있는가 하면, 마지막 시신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하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자식의 시신을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고개를 떨구는 부모님도 있습니다.. ㅜㅜ

     

   그리고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잡는 정부,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변화가 없는 정치인, 현장과 전혀 다른 모습을 기사로 내보내는 언론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제 그만하자며 싸늘해진 여론에 대해 서운해하며 그래도 싸우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자식들만은 이렇게 허망하게 잃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거리로 나서서 서명을 받고, 간담회에 찾아가서 호소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힘을 얻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아니, 살아냅니다.  

 

      이 책은 슬프지만 담담합니다. 화려한 수사나 감동적인 스토리는 없습니다. 성향도 다르고 상황도 다른 13명의 유가족들이 들려주는 평범한 아이들과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시계는 2014년 4월 16일에 멈추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정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도 정의와 안전과 평화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어야 합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가슴으로 읽는 책입니다.     

 

캡처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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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음 / IVP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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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우종학 박사. 천문학을 연구해서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모태신앙이구요,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앙 고백은 초등학교 시절에,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고백은 대학 초년 때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IVF라는 학생 선교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했지요.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과학과 신앙의 통합에 대해 더욱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 그 고민의 결과를 알리는 것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인 셈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6일만에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지구의 나이는 6천년일까요? 많은 창조과학자들이 인터넷과 저서, 강연에서 주장하는대로,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 같은 것은 모두 엉터리이고, 화석에는 중간 고리가 하나도 없으며, 지구의 나이를 46억년이라고 생각하고 진화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태도일까요?

   저자는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다수 크리스천은 아예 논쟁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은 과학을 잘 모르는 것 같고, 조금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은 지구의 역사는 6천년이라며 과학을 통째로 부정하는 창조과학을 이야기하는데 좀 찜찜하고, 그렇다고 리처드 도킨스같은 사람들처럼 신은 없으며 모든 것은 스스로 우연히 진화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에이, 구원에 관련된 것도 아닌데 대충 넘어가자.'며 슬쩍 넘긴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렇게 되면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일관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질문해 올 때 적절하게 대답을 하지 못해 지성인들을 전도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구요. 이에 저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그리고 과학적 결과들에 대해 탐구하는 성실한 과학자로서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고,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을 조금 정리해볼까 합니다.

   먼저, 저자는 '진화론'이라는 단어에 대해 세밀하게 접근하자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보통 진화론이라고 부른 것 안에는 '진화', '진화 이론', '진화주의'가 모두 들어 있는데, 각각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자는 것이지요. 저자에 따르면 '진화'는 생물이나 우주가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현상 그 자체, '진화 이론'은 진화라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 이론, 그리고 '진화주의'는 진화이론을 무신론적으로 해석한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어를 복잡하게 정의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여기가 아주 결정적인 부분인데요, 진화와 진화 이론은 받아들이더라도 진화주의는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화를 과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데이터를 확인한 후 '우주가 진화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니까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똑같은 결과물을 가지고도 '우주가 진화되었다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진화라는 방식으로 우주를 지으셨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이론 자체는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증명할 수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세계관의 문제이니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들어보셨나요?

  

   그렇다면 교회에서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는 창조과학자들은 어떤 입장일까요? 아예 1단계 '진화'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화를 입증하는 많은 과학적 데이터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기독교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창조과학은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여러 입장 중 하나일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이게 저자의 핵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 창조과학이 무조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는 창조과학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럼 대부분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왜 조용히 있으며 교회에서는 창조과학자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일까요?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이유를 찾습니다.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해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을 수도 있다.'는 저자의 책이 발간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저자를 공격했거든요. '크리스천 맞느냐','구원은 받았느냐','성경을 믿지 않는 사이비 회색분자다'... 이런 식의 공격을 받은 것이지요. (저도 그 책을 빌려 줬다가 졸지에 쓰레기 유통업자가 되었다니까요!) 이런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풍토이기 때문에 모두들 그냥 쉬쉬하고 넘어간다는 것이지요. 그 사이에 기독교는 과학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비지성적인 집단으로 비치고 말았구요.     

  

   저자는 더 나아가서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창조과학의 태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이 결국은 무신론 과학자들과 같은 게임 규칙에 빠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즉, 무신론 과학자들은 '과학이 밝혀낸 진화 과정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해 내기 때문에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창조과학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분명한데 지금 과학적 진화 이론들은 그것을 부정하므로 과학 자체가 틀린 것이다.'고 주장하지요. 두 극단적인 입장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뭔가 기적적인 방식으로 창조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제한하지 말자고 주장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자연적인 방식, 과학으로 설명되는 방식, 심지어는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사건들 - 예를 들어 진화 - 을 사용해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와 같이 과학은 완벽하게 중립적이어서 유신론이나 무신론 중 어느것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과학과 신앙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을 잘 읽고,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밝혀서 과학을 하나님의 것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과학이라는 분야가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것이어서 책이 '조금'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해서, 저자는 한 없이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무신론 기자와 크리스천 과학자의 인터뷰'라는 방식을 도입했지요. 교회에서 고등부 회장까지 지냈다가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면서 신앙에 회의를 가지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난 과학 담당 기자가,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었던 천문학교수를 (본인이 모델이겠지요?^^)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책에서 기자는 옛 스승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며 종교는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고, 교수는 위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과학과 신앙을 대립시키지 말자고 이야기하지요. 인터뷰가 다 끝난 뒤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거야 주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적어도 다시 한번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과학은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점점 더 많은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솜씨에 더욱 감탄하게 되겠지요. 성경을 기록한 믿음의 조상들이 그들의 과학 지식과 세계관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했듯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도 그 시대의 지식과 세계관으로 동일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수천 년 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지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은 주님의 솜씨를 알립니다."(시편 19:1,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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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슬픔과 함께 온 하나님의 선물
하재성 지음 / 이레서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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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아브라함 링컨, 윈스턴 처칠, 찰스 디킨스, 키에르 케고르, 마르틴 루터, 아이작 뉴턴, 짐 케리...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사실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요^^) 예,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링컨 대통령은 친구들이 링컨의 자살을 염려하며 경계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하더군요. 오죽하면 '링컨의 우울증'이라는 책까지 출간되었겠습니까!

 

   예전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우울증을 앓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데 어떻게 우울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우울증을 귀신들림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로와 격려가 가장 충만해야 할 교회에서조차 우울증에 대한 것은 밝히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오히려 죄책감이 더 얹어졌습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 맞나?" 하는 물음까지 가지게 되면서 더 좌절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구요.

   저자는 수많은 상담과 사례 연구를 통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자기조절의 실패나 잘못된 죄 때문도 아니라고 이야기하지요. 사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울증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공동체는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 그리고 우울증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증이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숙고한 것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울증, 슬픔과 함께 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제목에 저는 반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고통은 포장된 축복이다.' 는 식의 말을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그런 말은 우울증을 앓으면서 깊은 고통을 겪으며 결국 이겨낸 사람들이나 간신히 할 수 있는 말이지, 옆에서 위로한답시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절대로 아니니까요.

   우울과 고통을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 그런 건 누구나 다 겪는 거야','믿는 사람이 우울증은 무슨...하나님께 기도해봐.','아니, 네가 뭐가 모자라서 우울해?'라는 식으로 언어폭력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고, 위로한답시고 '우울증은 사고방식의 문제야. 밝은 면을 생각해.','집에서만 있지 말고 나가서 운동도 하고 그래!' 라는 식으로 쉽게 말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깊이 잠겨들게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말은 '네 마음을 조금 알것 같아.','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공감의 언어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품위를 존중하고, 섬세하게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인내하면서 그들을 밝은 모임과 습관으로 이끌어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는데요, 아무튼 우울증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반감을 가졌다가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오해가 풀렸습니다. 저자는 우울증을 하나님께서 그 당사자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뜻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더라구요. 저자는 우울증을, 변화를 요청하는 신호라고 해석합니다. 우울증은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울한 이들을 둘러싼 가족과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한 사람을 돌보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 더욱 인격적으로 존중하게 하고, 지금까지의 행동과 생활 방식을 바꾸도록 돕는다는 의미에서 우울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더라구요.

 

   전체적으로 책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마음이 흐르고 있지만, 특히 8,11,12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8장은 사탄과 우울증의 관계를, 11장은 하나님의 부재라는 영혼의 깊은 밤을, 12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울증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목사이자 상담가로서의 저자의 역량이 제일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11장 마지막에 '한국 교회여, 이제 제발 우울해져라!'는 챕터는 참 신선했습니다. 우울증이 자기 신뢰를 멈추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는 선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어느 순간 부와 명예에 취해서 약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치유를 외치며 실패하고 병든 사람이 위로받을 공간을 막아버렸으며,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며 오히려 공격하고 있는, 부끄러운 자긍심과 무감각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질타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자신의 실수와 죄를 두고 애통하지 않는 우리, 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우울해지지 않는 우리, 가련하고 상처입은 한 영혼들을 돌보는 대신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고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려고 안달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뜨거워집니다.ㅜㅜ  

 

저자가 우울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근거를 몇개 더 이야기해볼까요?

우울증은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이해와 섬김의 기회를 주신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닫게 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산만한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진실한 마음만을 가지게 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이 땅의 나그네로 여기고 천국을 사모하게 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흠..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증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다만 솔직히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지요. 그런 힘든 선물을 받지 않고도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며 연약한 지체를 돌아보고 섬기며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휴.. 쉽지 않겠는데요..)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게 되거나, 주변에 고통받는 지체들을 알게 된다면 이 책을 읽고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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