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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교회
오규훈 지음 / 포이에마 / 2013년 12월
평점 :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요 21: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원래 어부 출신이었던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날이 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강가에 서 계시다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물고기가 엄청 많이 잡힙니다. 아, 이거 어디선가 본 듯한 상황이지요? 아마 제자들은 쭈삣했을 것 같네요. 그리고는 예수님과 감격의 해후를 하지요.
그런데 요한은 특이하게도 그 때 잡힌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153마리라는 숫자까지 기록한 것일까요?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요?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고 각자의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참, 모나미 153 볼펜이 있는 것도 아시지요?)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이라는 교부는 100은 이방인의 최대치를, 50은 그리스도께 돌아올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을,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거스틴은 10은 십계명(율법)이고 7은 은혜의 수인데 십계명에 은혜를 더하면 17이되고, 1부터 17까지를 다 더하면 153이 되기 때문에 153은 율법과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는 모든 사람의 수라고 했습니다. (어휴, 1부터 17까지 다 더하면 153이 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해냈을까요!)
제롬은 153은 물고기의 종류라고 생각해서 153마리가 잡혔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고기를 다 담았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모든 인류가 주께로 돌아온다고 봤습니다.
자, 어느 것이 마음에 드시나요? 사실 성경은 그 뒤로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왜 153이라는 숫자가 나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위에 적은 교부들의 해석도 나름대로의 해석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해석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시겠어요? 어쨌든 그물은 교회를, 물고기는 영혼을 상징한다고 본 것이지요.
저자는 여기에서 착안해서 153교회라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한 교회가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성도수가 153명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물론, 기계적으로 153명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유도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150명 정도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적정 수라는 것은 교회가 아닌 여러 분야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옥스포드대학 인류학 교수인 로빈던바는 사람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가 150명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원시 부족사회의 씨족집단도 대략 150명 내외였으며, 군대의 중대단위도 170명 전후입니다. 또한 첨단기술회사인 미국의 고어텍스사는 직위나 직급이 없이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비결은 한 공장의 직원수를 150명 선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직급이나 직위가 아닌,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통해 협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신기하지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교회를 여러가지에 비유하지만 특히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각 개인을 몸의 지체로 비유하지요. 조직이 아닌 유기체가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교회의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고,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이 극대화 되었을 때 메가처치가 이루어지는 것이구요. 그런데 이렇게 몸집이 커진 교회를 과연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글쎄요.. 저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물론 제 생각도 마찬가지구요. (뭐, '절대로 교회가 아니야'라고 주장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저자가 볼 때 지난 세월 한국교회가 추구했던 핵심 가치는 성장과 자아실현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나라에서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어낸 우리 민족의 상황과 맞물려있지요. 성장과 자아실현은 물론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주객전도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그것이 타락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배울 때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성장과 자아실현을 지지하는 요소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뒤이어 성장제일주의가 등장하면서 대형교회가 미화되고, CEO형 목회자가 등장했으며, 각종 마케팅기법과 경영학 이론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서서히 성경의 가치와는 멀어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지금 모두가 보시는대로 한국교회는 사회의 비난을 많이 받고 있으며 이제는 규모마저 쇠락하고 있습니다. 한때 1200만명이라는 교세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8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10년내로 500만명정도까지 숫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저자는 150명정도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작고 건강한 교회들이 이런 상황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도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153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도들 모두가 서로 알고 지내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영적, 실제적으로 서로 돕고 나누는 교제를 하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친밀함과 신앙적인 관계는 교회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함게 나눌 수 있게 하고
이렇게 하나되는 분위기에서 영적 훈련과 교육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요. 그야말로 '함께 걷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153교회의 목회 실천과제'라는 Chapter에서 다음과 같이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 설교 : 대화하듯
- 광고 :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 심방 : 친구를 방문하듯
- 교육 및 훈련 : 소그룹으로
- 봉사 : 하는 사람이 즐겁게
- 친교 : 모두의 축제가 되게
- 교제 : 교회 역사를 돌아보라
왠지 이런 교회에 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다가 교회가 성장하면 어떻게 할까요? 153교회의 원칙은 분리와 연합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분리하고, 그렇게 작은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지역을 섬기는 사역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뭐, 좋은 말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내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그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런데,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이런 작은 공동체를 원할까요? 요즘은 다른 사람에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흠.. 저는 그런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대형교회에 가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지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거든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지지고 볶으면서, 울고 웃으면서, 상처받기도 하고 상처주기도 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이 깎여나가고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함께 주님을 닮아가는 곳,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고 '우리'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서 배려하고 양보하고 헌신하는 곳입니다. 그 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셨고, 성령의 강림으로 세워졌으며, 사도들의 순교의 피로 이어져 내려온 교회이지요. 이제 우리는 다시 그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