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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용서해야 하는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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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12일, 미국 뉴욕 시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는 순찰을 돌기 위해 센트럴파크에 들어섰다가 수상해 보이는 십 대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경찰을 보고 달아나는 아이들을 쫓아가 잡았을 때, 한 아이가 (나중에 알고 보니 15세였다고 하더군요) 그의 뒤로 돌아가 그의 머리에 총을 쐈지요. 그가 쓰러지자 그 아이는 그의 목에 두 번째 총을 발사했고, 한 번 더 총을 쏘고 달아났습니다.

   48시간 동안의 수술과 치료를 통해 의료진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전과 같은 삶까지 돌려줄 수는 없었지요. 목을 관통한 총알이 척추를 건드려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산소 호흡기가 없이는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정말 비참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지요.

   그리고 몇 달 뒤, 스티븐은 아내와 함께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와 그의 아내는 그 소년을 용서했다고 발표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서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하다고 믿으니까요. 만약 복수심을 안고 살았다면, 영혼의 상처는 더 깊어졌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분노는 감정 낭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거의 매일 그날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용서한 걸 후회하지 않아'" 아...

   기독교의 많은 덕목 중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선포할 정도이니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사랑의 최고봉은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요.

   이 책은 용서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조금 산만하기도 합니다.) 대신 용서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을 들려주지요. '용서의 사례'라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용서가 필요한 '악한 상황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 책에는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폭력부터 살인이나 폭행과 같은 범죄, 점점 일상화되고 있는 테러, 그리고 아우슈비츠나 르완다의 학살이나 미국의 인종차별 등과 같은 거대한 상황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지요.

   그런데, 그 안에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아니, 별이라기 보다는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네요. 원망하고 증오하고 복수하기를 꿈꾸는 대신에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지요. 그들의 노력은 때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가해자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허탈하게 끝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가해자를 변화시켜서 새사람이 되게 하고, 주변을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또다른 용서를 낳지요.

   이 책은 결코 용서가 쉽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실천한 사람들도 용서가 단번에 되지는 않았다고, 용서했더라도 다시 복수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지금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그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용서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싸움입니다! 아, 용서는 정말 어렵습니다.

   또한 이 책은 용서에 대해 낭만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슬픔과 분노를 무시하거나 그 죄를 가볍게 보지 않지요.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 진실을 밝히는 것, 잘못을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용서의 힘을 더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장애물을 극복하게 하며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모두를 치유하고 결국 세상을 바꾸는 힘 말입니다. 사실 우리를 본질적으로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도 예수님의 용서 아닙니까!  

   아내가 이 책을 읽더니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어휴, 이 이야기들을 읽으니까 우리가 용서 어쩌구 말하기는 너무 부끄럽다." 정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고민하고 상처받은 일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밴댕이 소갈머리같은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ㅜㅜ

   이 책은 독자들을 용서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낙심과 복수, 증오와 상처의 자리에서 희망과 관용, 사랑과 회복의 자리로 오라고 부릅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고 권유합니다. 힘들지만 시작해보자고 말합니다.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못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이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에 퍼지고 퍼져 온 세상에 닿을 것입니다."

   우리 손에 용서의 돌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그 돌을 던져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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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리처드 포스터 지음, 권달천.황을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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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 책 이름이 너무 딱딱하지 않나요? '훈련'이라는 말이 들어가니까 더 그러네요. 더구나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지 더더욱 마음에 안 듭니다. 평안을 얻으려고 교회를 갔는데 무슨 훈련을 또 하란 말입니까!!!
   그런데 이 책의 원제목이 뭔지 아시나요? 'Celebration of Disciplin'입니다. 뭐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까요? 영 어렵더라구요. celebration은 '축하'이고 disciplin은 '훈련'인데 이것들을 연결하려니 영 감이 안오는거에요. '훈련의 축제'? '훈련의 기쁨?' 뭐 이정도쯤 되겠군요.
   저자는 왜 훈련과 축하를 연결시키려고 할까요? 1장의 소제목이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영적훈련-자유로 들어가는 문'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까요? 바로 죄의 습관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심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그것들의 노예이거든요. ㅜㅜ
 

   이제 많이 아시는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죄'는 어떤 겉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죄들'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는 우리 삶의 내적구조이지요. 신기하게도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죄를 짓게 됩니다. 굳이 열심히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치게 되지요.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럴 때 어떻게 하시나요? 우리들은 보통 의지를 사용해서 죄의 습관들을 누르려고 합니다.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면서 투쟁하지요.  
   그런데 성공하셨습니까? 아니지요. 다들 경험해보신 일 아닙니까? (안그런척 하지 마세요!)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더욱 좌절합니다.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내적 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속에 필요한 변화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었듯이 내적 변화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우리는 즉시 반대방향으로 튀어 나갑니다. "그럼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네?"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아닙니다! 비록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두가지가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가장 좋은 비유는 농사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의 영적과정을 농사에 많이 비유했지요. 시를 하나 소개할게요.

 

내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물을 주지만,

농부인 나의 힘으로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셔서 이 포도들이 영글게 해 주옵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줍니다.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요. 그 두가지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적훈련이 바로 씨를 뿌리는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자체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것입니다.

   이 통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지요. 그래서 훈련은 자유로 들어가는 문이며 노래와 춤이 함께 하는 축제의 과정인 것입니다. (솔직히 어려울 때도 많겠지만요^^)

   옛날에는 영적 훈련이라는 것에 대해 굳이 여러가지 지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웠거든요. 자연을 보고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배웠고, 진지하게 묵상하며 금식하는 습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그런 것들이 훨씬 어려워졌지요.
   우리 문화는 너무나 가볍고, 우리의 삶은 너무나 급하며,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얄팍합니다. 그래서 훈련을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막상 시작하려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고 당황하게 되지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 지혜로운 믿음의 선배들의 글을 직접 보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너무 방대하고 버겁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볍고 급하고 얄팍한 우리들에게는 저자와 같은 친절한 가이드가 필요한 것이지요.

 

   저자는 일단 영적 훈련을 크게 3가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각각의 훈련을 또한 4가지로 나누지요. 그러므로 총 12가지의 영적 훈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제목만 훑어볼까요?


내적훈련 - 묵상의 훈련, 기도의 훈련, 금식의 훈련, 학습의 훈련
외적훈련 - 단순성의 훈련, 홀로 있기의 훈련, 복종의 훈련, 섬김의 훈련
단체훈련 - 고백의 훈련, 예배의 훈련,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 축전의 훈련

 

   이 책은 각각의 훈련에 대해서 그 의미, 위험성, 유익, 실제적인 지침 등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격려하지요.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헬스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영적 훈련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매우 익숙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낯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12가지의 분류가 엄밀한 것도 아니지요. 겹치는 부분도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세워줍니다. (그러니까 1단계로 묵상을 마스터하고 나서 기도로 들어가고.. 이런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모두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조금씩 훈련해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12주 단기완성'과 같은 코스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한발 한발 나아갈 때 우리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며 그 열매들이 우리 바깥으로 흘러넘치게 됩니다.

 

   저자가 맺는 말에서 각 훈련에 대해서 요약한 글이 있네요.
   '''묵상'은 우리의 영적 민감성을 높이고 '기도'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기도는 '금식'과도 연관이 있다. 이 세가지 훈련을 알고 난 후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해 분별력을 주는 '학습'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단순성'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정직하게 살게 된다. '홀로 있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진실한 교제를 하게 한다. '복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조작과 조종이 없는 삶을 살게 한다. 그리고 '섬김'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된다. '고백'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예배'에 들어가게 한다. 예배는 '인도하심'을 받는 문을 열어준다. 모든 훈련의 자유로운 실행은 '찬양'을 낳는다."

   우와! 저도 이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적 훈련과 성장'이라는 책 제목은 너무 딱딱한 것 같네요. 요즘에는 제목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뭐라고 바꾸면 좋을까요? '훈련은 즐겁다!'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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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수업 -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김소향 옮김 / 인빅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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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니 영원히 끝날 수 없는 4월 16일 세월호의 아픔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아파했던 한 해였습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고 유족들이 조금은 위로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아요 ㅜㅜ)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대로인 것도 많습니다만..) 주변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먼지가 뽀얗게 앉은 안전 매뉴얼을 꺼내어 살펴보고, 가상 위기 상황 훈련을 실시했지요. 너나 할 것 없이 '안전한 나라'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에 더해서 사람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아이들의 사교육을 끊고 마음껏 놀게 하는 '나쁜엄마 신드롬'이 일기도 했지요. (사실 이게 정말 좋은 엄마 아닙니까?)너무도 안타깝고 허망한 죽음들 앞에서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 것이지요. 

   어떤 글을 보니, 안산에서는 지금도 밤중에 통곡하는 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고 하더군요. 아.. 마음이 짠했습니다. ㅜㅜ 가족을 잃어버린 아픔을 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겪게 될까요? 어떻게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옆에서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이 책은 그런 여러 가지 물음에 대해 자상하게 대답해 줍니다. 물론 정답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런 질문 앞에 정형화된 답이 존재하겠습니까?) 대신 정말 다양한 사례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스스로 답을 준비하도록, 그래서 상처를 치유하고 그 상실의 아픔과 함께 살아가도록 도와 줍니다. 


   저자는 죽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그들의 마음속 말을 들어주며 그들의 마지막을 돕는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30년간 호스피스 운동을 하면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대화하며 연구를 하다 보니 '죽음의 여의사'라는 좀 무시무시한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그녀는 또한 생의 마지막 9년을 중풍으로 마비되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책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구요. 책의 원고를 완성한 후 제자에게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5가지의 상태를 겪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5가지를 다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순서대로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보이게 되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치유된다고 하더군요.

 
   첫번째 단계는 부정입니다. 그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고의 소식을 들어도 시신을 볼 때까지는 부정하고, 시신을 확인한 다음에도 그가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부정의 마음은 상실의 충격을 더디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 충격이 가감없이 전해지면 우리의 마음이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두번째 단계는 분노입니다. 먼저 간 그 사람에게 분노하고,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에게 분노하고, 주변 상황에 분노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분노하지요. 아니, 사실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세번째 단계는 타협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타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살 수 있다면 평생 이런이런 것을 하겠다고 타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를 잃고 난 후에는 천국에서 다시 보게 해 달라고 타협합니다. 남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타협합니다. (이 타협은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경험할 것 같습니다.)
   네번째 단계는 절망입니다. 하루하루가 공허해집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영원히 계속될까봐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수용입니다.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꼭 마음의 평화를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한 이가 실제로 떠나버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30분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고 표현했더군요. 그 죽음에 대해 자책하지도 말고, 빨리 절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압박도 거부하며 충분히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슬픔은 평생 함께 있겠지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슬픔의 감정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라도 나타나서 우리를 더욱 어렵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방법은 그 사람이 충분히 슬픔을 표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섣불리 잊어버리라고 말하거나 (선의로라도) 슬픔을 참으라고 하지 않고 지혜롭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 책에서 상실과 관련해서 정말 다양한 경우의 예를 보여줍니다. 자녀의 죽음을 맞이한 경우, 여러명의 죽음을 경험한 경우, 가족이 자살한 경우, 병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간 경우, 심지어는 치매로 인해 정신이 먼저 죽어간 경우 등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상실 이후에 경험하는 죄책감, 의외의 후련함, 고립감 등의 감정적인 문제를 다루기도 하며, 천사와 도플갱어, 사후 세계 등에 대해 영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상실 이후 명절 보내기, 죽은 사람의 유품 정리와 같은 사소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비밀이 드러난 경우, 상실 이후에 경험하는 섹스에 대한 욕구까지 미처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아... 죽음이란 정말 이렇게 엄청난 상황을 동반하는군요. (이렇게 다양한 사례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책이 전혀 딱딱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생각보다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평균수명 운운하면서 7-80까지는 살 것이라고, 손자 손녀까지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이라도 부르시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겠지요. 그리고 사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하루의 삶을 더욱 의미있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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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교회
오규훈 지음 / 포이에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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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요 21: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원래 어부 출신이었던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날이 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강가에 서 계시다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물고기가 엄청 많이 잡힙니다. 아, 이거 어디선가 본 듯한 상황이지요? 아마 제자들은 쭈삣했을 것 같네요. 그리고는 예수님과 감격의 해후를 하지요.
   그런데 요한은 특이하게도 그 때 잡힌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굳이 153마리라는 숫자까지 기록한 것일까요?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요?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고 각자의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참, 모나미 153 볼펜이 있는 것도 아시지요?)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이라는 교부는 100은 이방인의 최대치를, 50은 그리스도께 돌아올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을,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거스틴은 10은 십계명(율법)이고 7은 은혜의 수인데 십계명에 은혜를 더하면 17이되고, 1부터 17까지를 다 더하면 153이 되기 때문에 153은 율법과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는 모든 사람의 수라고 했습니다. (어휴, 1부터 17까지 다 더하면 153이 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해냈을까요!)

   제롬은 153은 물고기의 종류라고 생각해서 153마리가 잡혔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고기를 다 담았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모든 인류가 주께로 돌아온다고 봤습니다.
   자, 어느 것이 마음에 드시나요? 사실 성경은 그 뒤로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왜 153이라는 숫자가 나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위에 적은 교부들의 해석도 나름대로의 해석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해석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시겠어요? 어쨌든 그물은 교회를, 물고기는 영혼을 상징한다고 본 것이지요.

 

  저자는 여기에서 착안해서 153교회라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한 교회가 신앙 공동체의 본질을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성도수가 153명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물론, 기계적으로 153명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유도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150명 정도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적정 수라는 것은 교회가 아닌 여러 분야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옥스포드대학 인류학 교수인 로빈던바는 사람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가 150명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원시 부족사회의 씨족집단도 대략 150명 내외였으며, 군대의 중대단위도 170명 전후입니다. 또한 첨단기술회사인 미국의 고어텍스사는 직위나 직급이 없이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비결은 한 공장의 직원수를 150명 선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직급이나 직위가 아닌,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통해 협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신기하지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교회를 여러가지에 비유하지만 특히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각 개인을 몸의 지체로 비유하지요. 조직이 아닌 유기체가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교회의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고,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이 극대화 되었을 때 메가처치가 이루어지는 것이구요. 그런데 이렇게 몸집이 커진 교회를 과연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글쎄요.. 저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물론 제 생각도 마찬가지구요.  (뭐, '절대로 교회가 아니야'라고 주장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저자가 볼 때 지난 세월 한국교회가 추구했던 핵심 가치는 성장과 자아실현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나라에서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어낸 우리 민족의 상황과 맞물려있지요. 성장과 자아실현은 물론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주객전도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그것이 타락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배울 때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성장과 자아실현을 지지하는 요소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뒤이어 성장제일주의가 등장하면서 대형교회가 미화되고, CEO형 목회자가 등장했으며, 각종 마케팅기법과 경영학 이론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서서히 성경의 가치와는 멀어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지금 모두가 보시는대로 한국교회는 사회의 비난을 많이 받고 있으며 이제는 규모마저 쇠락하고 있습니다. 한때 1200만명이라는 교세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8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10년내로 500만명정도까지 숫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저자는 150명정도의 공동체로 이루어진 작고 건강한 교회들이 이런 상황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도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153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도들 모두가 서로 알고 지내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영적, 실제적으로 서로 돕고 나누는 교제를 하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친밀함과 신앙적인 관계는 교회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함게 나눌 수 있게 하고
이렇게 하나되는 분위기에서 영적 훈련과 교육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요. 그야말로 '함께 걷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153교회의 목회 실천과제'라는 Chapter에서 다음과 같이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 설교 : 대화하듯

- 광고 :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 심방 : 친구를 방문하듯

- 교육 및 훈련 : 소그룹으로

- 봉사 : 하는 사람이 즐겁게

- 친교 : 모두의 축제가 되게

- 교제 : 교회 역사를 돌아보라

 

왠지 이런 교회에 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다가 교회가 성장하면 어떻게 할까요? 153교회의 원칙은 분리와 연합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분리하고, 그렇게 작은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지역을 섬기는 사역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뭐, 좋은 말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내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그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런데,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이런 작은 공동체를 원할까요? 요즘은 다른 사람에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흠.. 저는 그런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대형교회에 가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지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거든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지지고 볶으면서, 울고 웃으면서, 상처받기도 하고 상처주기도 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이 깎여나가고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함께 주님을 닮아가는 곳,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고 '우리'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서 배려하고 양보하고 헌신하는 곳입니다. 그 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셨고, 성령의 강림으로 세워졌으며, 사도들의 순교의 피로 이어져 내려온 교회이지요. 이제 우리는 다시 그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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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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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은 말을 어떻게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할까?'
   2004년, 김영춘 의원이 유시민을 가리켜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정말 폭탄급의 위력을 가지고 유시민을 날려 버렸지요. 유시민 스스로도 "이 '싸가지'라는 말이 두고두고 나를 옭아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예언은 적중되었구요.
   그 뒤, 유시민은 말도 좀 자제하고 심지어는 좀 부드럽게 보이려고 안경까지 쓰고 다녔지만 별 효과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싸가지라는 단어가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잊혀지지가 않더라구요. 나중에 김영춘의원이 사과하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요.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뭐, 꼭 그 말 때문에 떠나게 된 것은 아니지만요.

   제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입니다. 당시 선배들이 꼭 읽으라면서 건네준 책 중 하나가 바로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지요.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꺼내어 다른 시각(운동권 시각이지요)으로 보도록 한 책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은근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배운 것들 모두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다른 책에서 유시민이 운동권이 된 계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가, 자신이 미팅에 나가서 쓰는 돈을 벌기 위해 한달간 일을 해야 하는 같은 나이의 여공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존경했었습니다. 진보는 따뜻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무튼 그 유시민이 정계를 떠나고 스스로 지식소매상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낸 책이 '국가란 무엇인가'입니다. 제목이나 구성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아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본질, 진보의 방향에 대해서 성찰하고 많은 이론을 정리해서 버무린 솜씨는 마이클 샌델에 뒤지지 않습니다. 유시민의 내공에 감탄하게 되지요.
   사실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 책이 작년에 주목받은 이유는 세월호사건 때문이었지요. 아이들이 깊은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마음 속에 '도대체 국가가 뭐지?'라는 질문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이 책이 다시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가론을 정리하고, 국가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되었지요. 그러고보니 슬픔 가운데서 읽게 된 책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이렇게 치열하게 다시 해야한다는 상황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저자는 7개의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힙니다. 중간중간 실제 한국정치의 예를 들어서 좀더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 그가 제기하는 질문과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에서 국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 국가론과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자유주의 국가론,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는 마르크스의 국가론, 그리고 선을 실현해야 한다는 목적론적 국가론을 비교 검토합니다. 유시민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국가주의, 새정치민주당은 자유주의, 소수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라고 봅니다. (지금 활동하는 진보정당은 모두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주의로 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동의합니다.) 이 네가지 국가론(앗 그러구보니 이것도 4가지이네요 ㅋㅋ)은 이후 책의 내용의 틀을 구성하게 됩니다. 
 
2.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국가주의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을, 자유주의자는 잘 소통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박정희와 노무현이 딱 대비되는 느낌이네요.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당연히 그렇다고 하면 피히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고 국가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톨스토이를 따르면 애국심은 사악한 감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애국심이 결국 국가간의 전쟁을 일으키거든요. (안중근 의사가 우리에게는 애국적 영웅이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 아닙니까?) 이 두 가지 극단적 의견 사이에 르낭의 정의가 위치합니다.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려는 의지.' 이런 애국심이면 괜찮지요?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의를 좋아합니다.

 

4.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어느것이 옳은 길인가?

   이제는 낡은 질문이지요. 인류가 경험한 사회혁명 - 프랑스 시민혁명,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등 - 은 국가를 근본적으로 고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은 엄청난 폭력과 학살을 동반했고, 결과는 또 다른 억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이에크 같은 사람은 아예 사회운동 자체에 대해 거부했지요. 하지만 칼 포퍼가 주장한 '점진적 개혁'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 개혁마저도 억압한다면 오히려 사회혁명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우리는 점진적 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5.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는 것인가?

   진보와 보수는 사실 명확한 구분이 어려운 개념입니다. 꼭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 이렇게 볼 수도 없구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변화를 원하는 쪽이 진보, 그렇지 않은 쪽을 보수로 보면 되지요. (이렇게 보면 일당독재 공산당은 진보가 아니라 꼴통보수가 되는 것입니다.) 유시민은 진보에 대한 여러 정의 중 이남곡의 정의를 제안합니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 오.. 멋진 정의인데요? 그 연장에서 진보정치의 목적은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진보정치의 개념이 넓어지고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달라집니다. 복지국가가 가장 진보적이 되는 셈입니다!

 

6. 진보주의자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무엇인가?

   정의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하는 것이지요.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유시민은 자기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밝힙니다. 한가지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으며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가치를 똑같이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역시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이지요?

 

7. 정치인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책임윤리입니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칸트의 도덕법칙이 아니라 결과를 책임지는 윤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구분했습니다. 신념윤리는 동기를 중요시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고 결과는 신에게 맡깁니다.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심할 경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같은 자도 일종의 신념윤리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책임윤리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하되 그 결과에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시민은 여기에서 신념윤리가는 지식인으로 남아 있는게 좋으며,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책임윤리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자신을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좌파에 대한 항의인것 같습니다. 

 

   휴.. 많은 것을 묻고 대답하면서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내용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지요. 중간중간에 좀 어려운 개념들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뭐, 그래도 그런 부분은 살짝 건너뛰면서 읽어도 됩니다.^^

 

   그래서 유시민이 꿈꾸는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책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이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저도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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