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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나의 얼굴을 - 제2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임수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평점 :
잠든 나의 얼굴을 - 임수지
-일어나서는 여기저기에 산재한 마음을 노트 위에 싹싹 쓸어모았다. 별것도 아닌 문장들이었다. 그게 나의 전부였다. (p.134)
-고모의 눈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었을까? 고모가 내게서 무언가를 읽어버린 것은 아닐까? (p.191)
-다음에는 정말 노트와 펜을 챙겨올 것이다. 나의 오래된 샤프펜슬도 챙겨야지.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눈으로 밑줄이라도 긋듯이 노려보며 다짐했다. (p.218)
-문득 고모는 내게 말했다.
어디든 많이 가봐. 멀리도 가보고. 오래도 가보고.
너는 그럴 수 있으니까. (p.258)
-삶은 상도 벌도 아니야. 삶은 그저 삶.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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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나진은 고모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 광주로 내려간다. 오랜만에 간 그곳에서 나진은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가 사는 집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을 때의 기억이다. 살면서 나진은 무뚝뚝한 고모와 몇 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진을 버티게 해주었던 건 친구 경은이다. 현재의 나진과 과거의 나진이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교차하며 소설은 담담하게 서술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그게 우리의 일상 같다. 나진의 추억 속 풍경들은 내가 겪어온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는 다를지언정 일인칭 서술자인 나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나에게도 데면데면한 고모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진의 눈으로 보는 고모 희라는 무척 고단해 보였다. 현재의 고모는 며칠만 스노보드를 타러 다녀오겠다고 한 뒤 몇 주간 연락이 끊긴다. 아주 잠깐이지만 희라의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았을 때 깨닫게 되었다. 희라에게는 오직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고.
나진은 고모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고모는 나의 잠든 얼굴을, 나는 고모의 잠든 얼굴을 보며 안도한다. 그게 지금껏 서로를 지탱해 왔던 방식 같았다. 내가 잠든 얼굴을 나는 볼 수 없더라도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나진이 혼자 힘으로 커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족들이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나진은 광주에서 지내는 3주 동안 또다시 성장해 나간다. 여기저기 산재한 마음을 쓸어 담으면서, 노트와 펜을 준비하고, 아주 크고 멋진 펜을 준비해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리라고 다짐한다. 다시 떠난 나진과 돌아온 희라는 짧은 시간 자신들이 변화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잠든 나의 얼굴을 바라봐주는 따스함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부드럽고 미지근한 온도의 따뜻한 소설이었다. 그만큼 너무 좋았다.
-이 게시물은 은행나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잠든나의얼굴을 #임수지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