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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수 없습니다!
전정숙 지음, 고정순 그림 / 어린이아현(Kizdom) / 2020년 9월
평점 :
그림책은 여전히 제게 즐거운 지적 놀이랍니다. 그래서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그림책 신간을 살펴보게 돼요. 나들이가 쉽지 않는 요즘이니 대신 온라인 서점 등에서 신간을 둘러보기도 하죠. 그러다 눈에 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단호한 제목과 달리 그림풍은 아이들 작품처럼 느껴지는 표지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요.
이 책은 글짓기를 업으로 하는 전정숙 저자의 어릴 적 놀이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이 좋지 않았던 짝과 학교에서 한 번쯤은 그었을 책상 위 선명한 선! 어떤 선은 칼로 선명하게 파헤쳐져서 괜시리 생명 없는 나무에게 미안할 정도로 그와 나의 어울리지 못하는 극명함을 강하게 드러내 주죠. 어릴 적 그런 기억의 선으로 시작한 저자의 생각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선들로 이어져요. 아이들이 공감할 내용부터 조금 배경 지식이 필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선까지 다양한 금지의 선들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어요. 그림책의 미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최소한의 글을 갖고 독자들에게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해요. 혹은 그림책을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듯 어른들에게도 같이 생각하자고 말을 건네고 있기도 해요.
보통 그림책을 읽을 때 아이와 읽기 전에 혼자 먼저 읽기도 하는데 이 책은 같이 읽었어요. 제가 미리 생각한 선들이 어느 정도 저자가 담고 있는지 궁금함이 들기도 했고, 아이와 함께 바로 저자의 생각에 바로 동참하고 싶기도 해서죠. 아이가 생각하는 첫 금지의 선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관계자외 출입금지’를 꼽더군요. 새 건물에 가면 호기심에 이리저리 둘러보는 아이 성향상 저 안내 문구는 묘하게 금단의 욕구를 자극하죠. 선을 넘고 싶어하는 장난기 많은 아이 성향이 드러난 대답이기도 하구요.
14곳의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지나서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어디일지 뜸을 들이게 하는 이 부분이 독자를 가장 긴장케 하죠. ‘그러나,,,,,,’와 오른쪽 아래 구석에 자리잡은 한 사람. 벌써 눈치 챈 독자가 많은가요?
글 작가의 짧은 본문에 생명력을 얹은 그림 작가 고정순님의 그림풍이 투박하게 펼쳐지는 것도 이색적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표정이 잡히지 않는 인물이 많아서 아이와 감정 이야기를 해봐도 좋았어요. 특히 봉준호 감독의 영화제 장면은 기분 좋은 선 넘기를 보여주고 있군요.
여러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이 책으로 조금 생각머리가 튼 아이와 혹은 스스로와 대화해 보면 좋겠어요. 책에서 다뤄진 선들을 보고 나는 어떤 기분이 들었고, 그 선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지 자문해보며 나와 사회에 대한 여러 경계들에 숙고해 보게 되죠. 그림책 한 권으로 사회, 윤리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