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을 다읽고 오버룩과 댄 토런스에 대해 뱅글뱅글 돌고있는 김에 닥터 슬립(그러니까 샤이닝 후속작, 30년 후에 쓰여진)까지 읽고 감상.
킹의 영향을 받아 몹시 힙스터스러운 말투로 쓰여졌습니다.
1. 가끔 기묘하게 연계되서 덩어리로 기억되는 시기가 있다. <500일의 썸머>와 <50/50>과 <미스테리어스 스킨>을 보고 나서 <인셉션>과 <다크나이트 라이징>을 봤었는데 당연하게도 공통점은 모두다 조셉 고든 레빗이었고 이 일이 재밌었던 건 내가 조셉 고든 레빗을 보기 위해 저 영화들을 틀지 않았었다는 거다. 비슷한 일이 책에서도 있다. <거미 여인의 키스>와 <채링크로스 48번지>와 <키다리 아저씨>와 <속 키다리 아저씨>를 읽어치웠는데 당연하게도 이 것들은 편지글이거나 대화체 소설이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괴기물 시리즈˝도 있다. 백기도 연대와 혼조 후카가와 시리즈와 샤바케와 오츠 이치를 읽은 날같은 거.
그런 식으로 분류하자면 이번 주는 스티븐 킹 주간인가보다.
2. 힙스터 스타일로 쓰기 위해 첫문장을 열심히 멋부렸는데 슬슬 질렸다. 귀찮다. 그냥 쓸란다.
3. 예전에도 이 책을 읽고서 감상을 썼었더랬다. ˝오버룩의 토니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그 아이의 일평생을 따라다니는 악몽이 오버룩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게 썩 기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읽고 덧붙인다. ˝지금의 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댄의 이야기도 좋을 거에요.˝
4. 코카인인지 알코올인지 모르겠지만 스티븐 킹은 중독자였고-˝작가˝를 좋아하는 단계에 들어서고보면 싫든 좋은 작가에 대해 많이 캐내게 되는게 썩 기쁜 일은 아니기는 하다. 남의 민감한 사생활이 적힌 페이지에 고개를 박고 있는 느낌에다 다른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서 이거 네 거지? 하고 흔들어대는 기분이 든다- 그 중독에 관한 경험을 작가가 작품에 어떻에 녹여내었는지 더듬어가면 논문 하나쯤은 나올 것같다. <폴 셸던>이 중독에서 발버둥치던 때의 그라면, <잭 토런스>는 중독을 벗어나기 위한 때의 그였고, <댄 토런스>는 중독을 벗어난 이후 그 경험을 곱씹어보면서 극복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의 그다. 와 나 이 표현 마음에 들어.
5. 킹의 시각은 따뜻해졌다고 썼었는데 다시 읽어봐도 그랬다. 어린 소녀에 대한 다정한 시선, 아브라, 호스피스, 왕좌의 게임 대너리스에 대한 묘사같은 건 여전히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어두움? 두려움?을 마주하고서 다루는 방식이 어찌나 유해졌는지. 거의 치유물같다. 날것으로 쏟아져내리면서 여기저기를 아프게 긁어내리던 시기와 비교하면 참 편안하다.
6. 중독, 호스피스, 소통, 아프라와 댄, 가족관계, 그리고 트루 낫, 로즈와 앤디가 가지는 `광포한 여성`의 이미지, 아브라가 보여주는 놀랍도록 차가운 일면, 죄책감으로 남은 아기와 어린 어머니의 기억들, 그리고 여전히, 어린 대니에게는 최고의 아빠였던 잭 토런스. 찰나의 순간 아들을 놓아줄 수 있었을만큼은 꼬마를 사랑했었고 그리고 나중에도 한번의 도움은 줄 수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런 것치고 이 아버지 아내에게는 전혀 다정한 남편이 아니었는데 어째 킹의 책에서는 부부의 관계는 별로 묘사가 안된다는 느낌이다. 너무 완벽하게 평온하고 완전한 걸 갖고 있어서 글로 표현할만큼 흥미롭지 않았나)
7. 음 뭔가 더 쓰고 싶은데 이래저래 귀찮아졌다. 침대에 누워서 팔을 뻗으면 킹의 책을 집어서 읽어내릴 수 있다는 건 꽤 멋지다. 마감하는 와중에 오버룩의 풍경이나 빨간 칙칙폭폭같은 게 떠오르는 건 썩 도움은 안되는데.. 으 이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는 책을 읽는 건 기쁘다. 즐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