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 보고왔습니다.
아주아주아주 고퀼의 2차창작.....
1. 유명한 대중영화만 보는 싸구려 입맛의 평범한 관객인 저에게는 딱히 감독님의 스타일을 짚어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봉준호 영화면 뭔가 찰지고 씁쓸하고 쓴맛이 도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부조리를 한큐에 쓸어모아서 푹푹 끓여낸 것같은 진한 맛이 우러난다는 거라든가 박찬욱 영화면 신경을 칼로 갈라 끌어내서는 한땀한땀 저며내는 것같은 피맛이 난다던가 류승완 영화면 영화가 가볍고 존내 빠르고 터프한데 슬로우 모션이 그렇게 빨라보이는 신기한 영화라든가.. 든가든가 정도. 하물며 이준익 영화는 <왕의 남자> 하고 <사도> 이거 딱 두편 봐서(중간에 사극영화 본것도 같기는 한데 기억이 안나요) 뭐라 평할 능력은 진짜 거하게 떨어집니다
만
2. 아주아주아주 고퀼의 2차...... 2222222
3. 아니 그도 그럴게 서사나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없단 말이에요. 2차스러운 부분이라고 한다면 `니들 이거 다 알거라는 거 전제로 깔고` 자기 좋아하는 장면만 겁나 개멋있게 연출하는 특성이 있는데 이 영화가 딱 거기에 맞아 떨어진단 말입니다. 영조가 무수리의 자식이고 숙종 독살설이 돌았던 건 다 알고 있어야 하고 사도세자의 자식이 정조이며 영조도 정조도 존내 세기에 남을 먼치킨이고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썼고 사도 세자는 광증으로 궁인들을 죽이고 다녔고 어릴 때는 총명했는데 아버지 편집증과 등쌀에 억눌리다가 돌아버렸고 종래에는 옷입는 것도 싫어해서 하루에도 수십벌씩 옷을 해바쳐야했다던가. 니들 다 알지? 아니까 나 좋을 대로 연출한다!! <--- 딱 이거.
4. 그러니까 사실 영화는 아아아아아무런 부연설명도 안해줍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가 영조라는 것조차 안나와요. 아들이 정조인 것도 안 나오고. 그거야 그럴 수 있죠 굳이 전체 설명을 깔고 가야할 필요는 없으니까? 근데 귀주에 집어넣어지기까지의 행적들을 부분부분 잘라가면서 묘사하는데 그게 진짜로 토막만 던져주고 홀케이크는 알아서 찾아보셈 `ㅅ` 수준이거든요. 2차 창작계에서 잘하는 딱 그 짓이에요.
5. 아니 뭐 굳이 나쁜 건 아니고 저도 국사를 빡시게 배운 한국인+만화로 배우는 조선왕조실록+아주 살짝 역사덕후까지는 아니라도 야사 찾아보는 거 좋아함 = 그럭저럭 배경에 익숙한 인간이다 보니 거슬리는 거 하나 없이 잘 보기는 했는데 별로 영화가 기승전결보다는 순간의 장면에 주력하다보니까 나중에는 뭔가 좀 안씻고 나온 기분이더라고요. 시오노 나나미 책 보는 기분이야 엄청 재밌고 구미가 당기기는 하는데 이걸 정사로 볼수는 없고 그렇다고 정사를 빼고 이야기만으로 생각하기에는 남는 게 없어...
6. 영화는 전체적으로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에 주력하면서 이야기를 다뤄갑니다. 문제는 주력은 하는데 이게 기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비춰주는 데에서 시작하다가 끝나고, 승에서는 일방적인 영조의 지랄(;;) 인거라 인물이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갈등은 없고, 전.. 전은 모르겠다 전은 초반부터 집어던져놓은 `귀주`이기 때문에 전이 사실상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고, 결은.. 사도 세자의 결이라면 세손의 목소리를 듣는 그 장면일 거고 이야기의 결이라면 정조의 손에서 활시위처럼 춤추던 그 부채일진대 둘다 거어어어어업나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기 때문에 이 극 전체에서 인물끼리의 갈등이라던가 입체적인 묘사는 사실 전무합니다. 극중에서 가장 살벌하게 부딪히는 씬이 영조와 사도의 대화장면인데 그 상태에서 이미 사도세자는 뗏장 쌓인 귀주 안에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둘이 마주치지도 않아요. 극중 가장 격렬하게 사람과 사람의 감정이 부딪히는 씬이 독백극이라고요. 무라카미 하루키냐?
7. 생각해보면 왕의 남자에서도 가상캐릭터인 공길에 장생을 등장시켜서 극을 끌고 나갔는데도 뭔가 여백을 읽게 만드는 밋밋함이 있었거든요. 패왕별희마냥 손가락 자르는 신에서부터 마지막 검날에 이르기까지 전생애를 묘사하라는 건 아니지만 공길의 과거도 현재도 (심지어 궁에 들어온 이후의 행보에서까지도) 암시적인 묘사는 있는데 그게 구체적인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섬세하게 파편처럼 묘사되었었구나, 생각하니까 이게 이분 스타일인가 싶어서. 사도에서는, 아예 `모두가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에 깔고 들어온 이 극에서는 그냥.. 존나 니들은 다 아는 거다 난 그냥 만든다급의 패기를 보여줍니다. 혹시 누구라도 외국인이 보는 거면 어쩔뻔 했냐.
8. 이렇게 말하면 엄청 싫어하는 것처럼 써놨는데 전혀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재밌었어요. 첫번째로 연기가 미쳤습니다. 송강호에 유아인이야. 광인 연기의 신 타이틀을 획득하고 싶은지 온몸으로 미침을 발산하는 유아인 사도세자인데 상대가 연기의 신 타이틀을 발로 굴리면서 이미 있는 거라 또 필요없어 허허 할 수 있는 송강호 영조입니다. 극이 아주 그냥 전체적으로 묵직합니다. 영조가 편집증을 온몸으로 발산하면서 아들 몰아세울 때는 물론이고 마지막 `나는 자식을 죽인 애비로, 너는 역모를 꾸민 죄인이 아니라 <미쳐서 애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남을 것이다` 에서는 그냥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대사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저 부분에 왜 <> 표시 넣었는지 보고 온 분이면 아실 듯. 아역에서부터 조연 한명에 이르기까지 전체의 연기가 미친듯이 반짝입니다. 묵직하고 아름답고.
9. 장면의 묘사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미장센이라고 하나요. 어려운 용어는 모르지만 종묘를 원경으로 넓게 잡은 풍경에 그림처럼 드리워진 천들, 근정전 넓은 마루 위에 그림처럼 쌓이는 눈과 사도 세자. (그 몸 위에 쌓인 눈은 절대로 계산해서 배치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흰 옷입고 달려나가는 사람들 위로 깔리는 음악. 비오는 날 사도세자의 관 위로 미끄러지는 꿩깃털, 영조의 가마 끝으로 걸리는 색색의 장식들. 단호하게 아름다웠고 잔혹하게 예뻤습니다. 마지막 염하는 장면이 그러했고.
10. 보고 즐겁게 나와서 전혀 아쉽지는 않은데 동인지 보는 마음으로 가뿐하게 보고 나왔더니 계속 드문드문 묘사는 되었는데 스쳐 사라져간 것들이 아쉬웠습니다. 혜경궁 홍씨라든가 화완옹주라던가. 화완옹주는 영조가 조오오오오온내 편애하면서 예뻐했던 두 공주중 한명으로 알고 있는데 (이 분 자식 편애가 쩔어서 싫어하는 자식은 보지도 않고 예뻐하는 자식은 결혼시키고도 옆에 끼고 살았다더랍니다) `아버지가 내 말은 듣는다니까`라는 장면을 넣어주고 연희궁으로 옮기게했으면 영조가 진짜 예뻐했는지 아닌지는 넣어줬어야죠. 그리고 무수리 천하다는 말에 기겁하는 신을 넣을 거면 암시 말고 묘사도 좀 해줘도 되지 않았을까여 영조도 평생 독살설+출신성분 콤플랙스로 헤메다가 편집증으로 돌아버린 인간일텐데..
11. 묘사를 최대한 간결하게 넣었으므로 극중에서는 뭔가 나쁜 사람이 없는 것같지만 영조는 자식 잡아먹은 애비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신분에 대한 불안과 정적들과 정당성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찜쪄먹을만했던 총명함. 시시때때로 공부하고 또 책을 읽던 편집적인 완벽주의자.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안들을 총명과 슬기로 막아낼 수 있었기에 제 자식도 그러리라 믿었을 거고, 편집적인 애정이 가끔 폭발하듯이 매도하고 잡을 듯이 예뻐하는데 어떤 애가 안 망가지겠어요. 역사 기록에 궁 밖에 있을 때는 사도세자의 불안증세가 사그러들었다던 대목을 보고나면 아 그냥.. 참.... 싶습니다. 세손 정조가 미칠듯한 먼치킨이 아니었다면 폐세자했을망정 죽이지는 않았을텐데, 영조의 강박증에 사도세자의 광증(+살인)이 겹치고 세손이라는 대체재가 워낙 완전무결했으니 무탈하게 정통성을 이어주기 위해 아들을 죽였던 아버지.
12. 그냥 역사적 사실만으로 사실 진짜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내용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죠. 부채 활용법은 좀 과하게 덧칠했다싶어 아쉬웠지만 그냥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것이 좋았습니다. 좋은 연기와 좋은 장면이 있던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