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영화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포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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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네자와 호노부의 <바보의 엔드크레디트>를 읽고 비슷한 계열의 소설에 흥미를 느껴서 찾아보았다.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 <탐정영화> 등 몇 권이 있었는데, 기억해두고 뭐부터 읽을까 생각하다가 <탐정영화>와 연이 닿아서 먼저 읽게 되었다.

 

 

  <탐정영화>라는 탐정영화를 찍는 중에 감독이 사라졌다.

  개봉일은 1월 15일, 그 때에 맞춰서 영화를 개봉하지 못하면 도산한다. 감독이 실종이라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도 도산한다.

  결국, 남은 스태프와 배우들은 머리를 모아 영화의 결말을 구성해보기로 하는데.......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론하는 과정들이 영화 결말을 추리하는 과정에 나와, 책을 읽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재미있다. 감독이 장치한 몇 가지 상황으로 범인을 제한할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연기가 불가능한 배우라던가, 창문이 열리지 않는 세트 등). 다만 소설과 달리 영화이기 때문에 각 시퀀스를 상상하는 장면이 필요한데, 글자를 영상화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나는 영화를 상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탐정영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소설 속에서 나오는 많은 영화이다.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을 듯 하고, 탐정영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 있는 영화들을 찾아봐도 좋을 듯 하다.

 

  감독이 왜 사라졌는지는 짐작이 가능했지만, 영화의 결말을 알아내는 것은 실패했다. 초인적인 탐정은 없고, 기발한 트릭도 없지만 소소하게 흐름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201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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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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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부 시리즈 2.

 

  축제에 상영하려던 비디오카메라 영화. 제목은 없음, 통칭 '미스터리'로 불리고 있음. 트릭 모름. 범인 모름. 결론 모름. 왜냐면 영화가 중간까지 촬영되었을 때 그 영화의 결말 부분의 각본을 제작중이던 여학생이 쓰러져 요양중이기 때문이다. 고전부는 그 영화의 결말(최대한 모순이 없고 논리적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영화 촬영에 관여한 이들의 추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추리영화의 결말과 관련된 이야기이다보니, 한층 추리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열린 결말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끝이 이랬을까 저랬을까 생각해보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여기서도 단순하게 결말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사실과 진실의 교묘한 경계로 인해 생기는 반전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각 단락의 소제목을 보면 '아, 그래서!'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추리라는 측면에서보면 <빙과>보다 강화된 느낌이고, 심리도 보다 복잡해진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악의와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떤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부 시리즈를 읽으며 얻는 또 다른 재미는 글의 끝에 달려 있는 평론가의 말이다. 평론가가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과 엮어 알려준 몇 개의 책은 매우 흥미가 간다. 조만간 읽을 예정.

 

 

201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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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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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아주 충동적으로 책을 사곤 하는데 <빙과>가 그랬다. 하지만 그런 책이라고 선택의 기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빙과>라는 애니메이션의 리뷰를 봤고(왠지 이 애니메이션 연애물인가 싶은 리뷰였다), 이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라이트노벨이 아니고 웬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 추리소설을 요네자와 호노부가 썼다는 걸 알았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을 재밌게 봤고, <개는 어디에>와 <추상오단장>도 상당히 인상깊게 봤던 것이 기억났고, 그럼 대충 이 책들도 중간은 가겠구나 싶었다. 읽어본 결과 역시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빙과>는 청춘물이고 성장물이고 추리물이다. 추리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죽고 동기 및 트릭을 추적하는 그런 류가 아니라, 일상 추리물이며 안락의자탐정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주된 등장인물은 넷이다. 몇 년 째 신입이 없어 폐부 직전이었던 고전부에 누나의 부탁으로 가입한 오레키 호타로, 모종의 이유로 고전부에 가입한 명가의 아가씨 지탄다 에루, 나중에 고전부에 합류하는 오레키의 소꿉친구 후쿠다 사토시와 이바라 마야카. 이들은 지탄다의 삼촌이 삼십삼년 전에 겪은 일과 고전부의 문집 이름이 어째서 <빙과>인지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빙과>의 캐릭터 넷은 탐정의 미덕(?)을 넷이서 골고루 나눠가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의롭고 염세적인 시선은 이바라가, 탐정의 넓은 지식은 후쿠다가, 탐정의 호기심과 관찰력은 지탄다가, 그리고 연역적인 추리력은 오레키가 각각의 특징점으로 가지고 있다. 왠지 넷이 모이지 않으면 사건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 묘한 조합이다. 사건에 임하는 자세도(아마 서술자는 오레키의 에너지 절약주의 신념 때문일 것 같지만) "나(우리)는 이 사건을 꼭 해결하겠어!"라는 느낌이 아니라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결해보자"의 느낌에 더욱 가깝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글을 읽다 보면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든다. <추상오단장>을 읽을 때까지는 왜 그럴까 싶었는데, <빙과>를 읽고 나니 조금 알 것 같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글에서는 사실과 진실이 다르다. 종종 같은 것으로 착각되는 둘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다. <빙과>에서도 그렇다. 삼십삼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탄다는 삼촌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삼촌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드러나는 순간 관점이 옆으로 한 발 옮겨가면서 그런 시선의 변화가 등골을 차갑게 쓱 훑고 지나간다.

 

  심각하지도 격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지만, 찾아낸다고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그렇지만 그냥 묻어두고 지나갈 수 없는 것. 뭔가 싱숭맹숭한 느낌이 이 글 속에 있다. 현재는 고전이 되고, 고전은 사실 그렇게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가도 좋은 것은 아니다. 고전부 시리즈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고전부 시리즈는 현재 2편까지 번역된 것 같은데, 뒤쪽을 보니 3~5 시리즈도 조만간 번역이 될 모양이다. 꾸준히 찾아볼 것 같다.

 

 

ps.

  책을 읽다 보면 몇 번씩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게 원문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게 무슨 뜻인지 몇 번 되짚어 읽어야 하는 문장이 있었다. 참고로 읽는 동안 오타는 발견 못함.

 

 

201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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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예술 -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길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심보선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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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쉬운 책은 아니었다. 내 기준에서 쉬운 책이란 이런 것이다. 별 고민 없이, 쓱쓱 읽어 나갈 수 있고, 내가 잘못 읽었는지 잘 읽었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책. <그을린 예술>은 쉬운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이 책을 진정으로 다 읽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는 사회학을 꽤 좋아하지만 사회학의 용어와 개념을 잘 알지 못하고, 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용어들은 가끔 너무나 생소해서 책을 노려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것은 이 책이 어렵지 않았다는 점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용어는 장애이기는 했지만 아주 큰 장애는 아니었다. 조금 거리가 먼 징검다리 정도를 생각하면 딱 좋다.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가기는 하지만 책에는 핵심이 있었고 그 핵심 자체는 단순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읽은 핵심은 이렇다 : "지금 예술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예술은 죽었다 /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

 

  이 책을 읽으며 종종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지음)>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맥도날드에서 '하나뿐인 한정판 시'를 증정해주는 특별한 버거인 '마이클 버거'를 판매해 히트하기까지의 과정이 이 단편의 내용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꾸는 꿈과는 정반대에 존재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예술은 하나의 상업도구가 된다-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혁신적이라며 칭찬한다. 예전 뉴스에서 나온, 하나의 투자상품이었던 <행복한 눈물>이란 그림과 같은 선에 놓여있다. 팔기 위한 시, 금고 대신이었던 그림, 이것들은 예술인가?

 

  p.13  그것은 시인인 내가 꿈꾸어 왔던 꿈이기도 하다. 회의 시간에 짬짬이 남몰래 시 한 편을 써 내려갈 때 나는 투사나 영웅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살고 싶었다. '마지 못해, 죽지 못해'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잘,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모든 물음은 결국 하나다. 예술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예술을 하고 왜 예술에 매혹되는가? 나는 예술에 깊게 몸 담은 사람이 아니므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좀 난감하다. 아주 기본적인 대답밖에는 할 수 없다. 좋으니까, 숨통이 트이니까, 가끔 힘들여 무언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힘을 주기도 하니까.

 

  그동안 즐기던 글과 그림과 음악에 대해 뭉뚱그려서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를 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던 내용과는 다소 달랐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도 같다. 다음에 시간이 날 때 또 한 번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2013. 7. 7.

 

 

*  <그을린 예술>을 보면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두리반, 자립 의지의 거점'이었다. 이것은 해피엔딩이고, 예술의 힘과 기능을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좋다.

 

** 181페이지에서 눈에 띄는 오타가 하나 있었다. '스탠들' -> 스캔들로 수정되어야 할 듯 하다.

 

*** 저자가 시인이자 사회학자여서 그런지 사용된 언어가 꽤 재미있었다. 딱딱해보이는 문장의 틈바구니에서 놀랄 만큼 유려하고 가슴을 건드리는 언어가 섞여 있다.

 

**** 여기부터는 메모.

 

p.42  그리하여, 직장을 옮기든, 혹은 커리어를 바꾸든, 뭘 하든, 혹은 뭘 안 하든 간에, 우리는 이제 덧없고 불가능한 우정의 약속이라는 기준에서, 다시금, 가까스로, 인간적이라 불릴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떠났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돌아올 것인가?

 

p.111  "철거민과 나의 처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노래할 곳이 없다는 점에서."

 

p.139  "감정과 사유에는 그것을 경험하고 사유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감정과 사유가 현존하려면, 누군가가 그 책을 집어들고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개인은 저자가 남긴 시의 텅빈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 사람은 저자가 작품에서 자신의 부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해던 똑같은 비표현적 몸짓을 반복할 것이다."

 

p.174  이제 "예술가들은 결국 지극히 상업적인 팝스타인 동시에 비주류 아방가르드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스타덤이 제공하는 재료들로 전혀 상업적 가치가 없는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p.182  현대의 예술가들은 모두들 수상대를 향해 서 있다. 질투심과 열패감에 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지만 어느 쪽이든 수상대는 있다.

 

p.192  창작의 행동은 노동의 제작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에 노동자가 도면에 따라 자동차를 완성했을지라도, 거기에 재료와 노동 과정에 대한 장인적 통제와 자주적 관리가 개입된다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최종 경과에 낯선 경이로움을 느낀다면 그때 노동은 창작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p.268  그러나 그들이 작품 제작에 쏟아붓는 열정은 거의 필사적입니다. "적어도 그렇게는 못 살겠다."와 "적어도 나는 시를 쓰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이 두 말의 결합은 삶과 상상력의 결합을 대변합니다. 이 결합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주인으로 갱신되고 고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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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탐정
마야 유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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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서 골랐고, 재미있는 추리소설이었다.

  유쾌한 포장 속에는 잘 정리된 논리를 담은 본격추리가 담겨있다.

 

  도련님 혹은 아가씨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유쾌한 분위기를 띤다는 점에서 <부호형사>나 <수수께끼풀이는 저녁식사후에>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귀족탐정>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추리소설이란 무엇이고 탐정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한다. 탐정이 추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명이 나오지 않은 귀족탐정님은 "추리?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지? 노동은 하인들이 한다고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라고 말하며 거리낌없이 집사, 하녀, 운전기사에게 단서를 모으게 하고 추리를 시킨다. 귀족탐정이 하는 것은 그저 거기 숨을 쉬고 존재하는 것 뿐이다.

 

  이 구성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귀족탐정은 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탐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흠없는 추리를 보이는 것은 집사, 하녀, 운전기사이지만, 그들이 탐정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집사도 하녀도 운전기사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귀족탐정의 명령에 따른 수동적인 행위일 뿐으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하는- 소위 말하는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고 귀족탐정은 탐정인가? 물론 귀족탐정은 범죄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사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내릴 뿐이다.

 

  따라서 <귀족탐정>에서 관점에 따라 탐정은 수사 명령을 내리는 귀족탐정일 수도 있고 혹은 직접 움직이는 집사 하녀 운전기사일 수도 있다.

 

  "제 능력은 이미 보여드렸습니다.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저기 있는 세 명이 바로 제 두뇌입니다. 저들은 제 소유물이니, 추리같은 하찮은 일은 모두 저들에게 맡겨두면 됩니다(p.355)"

 

  이럭저럭 생각을 해 봐도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고, 탐정이 나오기는 하고, 그 탐정을 누구로 봐야 하는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지만 동기가 먼저인가 수단이 먼저인가라는 것은 쉽게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냥 다음에 한번 더 읽으면서 생각해봐야겠다. 어쨌든 <귀족탐정>에서 성립하는 탐정이 매우 독특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건 자체도 재미있고 본격추리도 재미있었지만, 그보다 예기치않게 받은 화두가 더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탐정은 누구일까?

 

 

201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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