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소설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가득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다. 영화가 개봉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즈음하여 원작을 구입한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볼 것인가, 영화를 본 뒤 책을 읽을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원작을 먼저 읽기로 했다. 원작을 보고 영화를 봤으니만큼, 원작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본 사람과의 감상에서는 많은 차이가 날 거 같다. 아니, 나겠지. 나는 이미 많은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래서 아예 대놓고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기로 했다.

  영화를 한 줄로 정리해보자

  : 총리 암살범으로 몰린 아오야기가 센다이 시내에서 도망다니는 이야기다.

 
  [골든 슬럼버]는 쫓고 쫓긴다는 점에서 스릴러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할리우드식 스릴러와도 다르고 한국식 스릴러와도 다르고, 이게 스릴러냐고 물으면 이건 스릴러라고 답하기가 참 묘하다. 쥐가 고양이에게 도망다니면 스릴 있겠지만, 개미가 사람에게 쫓기면 그게 스릴이 있는 건가? 그냥 그건 무서운 거다.  

 

  평범한 택배원인 아오야기(그가 내세울 수 있는 싸움기술은 밭다리후리기 정도다)가 정보를 장악하고, 거리낌없이 총을 쏘고,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받는 '국가기관'에게서 도망가는 것은 개미 입장에서는 커다란 그림자가 앞뒤좌우를 덮고 있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보통 스릴러처럼 쫓고 쫓기는 스릴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의 초반 뿐이고 중반부를 지나면서는 직접적으로 추격당하고 쫓기는 것보다는 아오야기가 압박을 느끼며 숨어다니는 장면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소설 원작을 살리려고 무척 애쓴 모양새다. 소설의 구조와 영화의 구조는 다르기 때문에 아예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에서 몇 가지 설정을 빼거나 살짝 비틀었을 뿐 원작의 라인을 똑바로 따라가고 있다. 사건 부분을 떼어내어 잔가지를 쳐내고 클라이막스를 강화한 정도? 게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스릴러라고 말하기에는 점점 정적으로 변해가는데, 알면서도 140분 간 숨죽이게 하는 게 능력이라면 이 영화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것 같다. 활자와 영상은 박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소설 속에서 갑자기 탕! 해봤자 아 총을 쐈구나 하고 말지만, 영화 속에서 갑자기 탕! 쏘면 심장이 벌떡벌떡한다), 나는 활자를 영상으로 옮겼는데 차마 볼 수 없게 변한 영화를 본 적 있다(그것이 ㅎㄱㄴㅊㅂ이라고는 굳이 집어서 말하지 않겠다).

  신기한 것은, 개미가 인간에게 쫓기고 있으면 그저 절망만이 있을 것 같은데, 영화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중간중간 웃음이 터진다는 거다. 인간의 최고의 무기는 유머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그런 장면들 때문에 쫓기는 것처럼 쫓길 수조차 없는 아오야기를 보면서 숨이 돌아가고, 계속 지켜볼 용기가 난다. 평범한 사람이 이유도 모른 채 누명을 쓰고 국가에게 쫓기고 삶이 온통 망가져버리는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미를 주는 것은, 아스팔트 사이사이에 자라고 있는 잡초처럼 군데군데 포진해 있는 웃음이다. 나는 심각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골든 슬럼버]의 무겁지만 아주 무겁지는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결말을 보고 생각건대 아오야기를 쫓는 사람들은 끝까지 아오야기를 쫓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아오야기라는 개인이 아니라 누명을 쓰기에 적당한 사람을 보고 있었던 거니까. 그런 점에서 아오야기가 선택된 것은 무척이나 불운한 일이고,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아는 사람들이 믿고 도와줄 정도로 제대로 살았던 아오야기가 누명을 쓸 사람으로 간택된 것은 불운한 일이고, 누군가를 암살하고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덕에 누군가가 배불리고도 사실은 알아도 진실은 모른채 잘 돌아가는 사회에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불운한 일이고, 불운한 일이 있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은 행운이지만, 그래도 완벽한 해피엔딩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불운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다가, 참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가만 보면 나쁜 게 더 많은데 희망적으로 보인다는 게.

  원작을 본 사람은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불만을 말하게 된다고 하는데, 나는 [골든 슬럼버]를 보고 꽤 만족했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리뷰라는 게 개인적인 거지만 다른 사람의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하니까, 약간은 다른 사람도 생각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원작을 보고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다. 영화 [골든 슬럼버]는 원작을 보고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지만, [골든 슬럼버]를 영화로 처음 접한 사람들은 이 영화를 100% 즐기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키로 한 73% 정도? 원작에서 상당히 지루하게 앞을 차지하고 있었던 '제 3의 목격자'와 사소한 설정들이 실은 사건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밑판이었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깨달았다. 영화를 보고 음? 싶은 부분들은 대부분 원작에서 읽은 지식으로 메웠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영화만 봤다면, 그래서 상세한 뒷이야기를 몰랐다면, 아주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의문을 좀 안고 나왔겠지. 리뷰를 쓰기 전에 네이버 평점을 구경하고 왔는데, 평이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1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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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골든 슬럼버>가 나왔다는 건 진즉 알았는데 선뜻 손이 안 가서 미적대다가, 영화 <골든 슬럼버> 개봉을 계기로 얼른 샀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읽어야지, 하고 손에 잡고서는 끝날 때까지 정신없이 읽었다. 

  줄거리 : 

  아오야기 마사하루는 평범한 택배 배달원. 어느 날 대학 동창의 부름을 받아 불려나간 곳에서 동창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 때마침 거리 저편에서 행해지던 퍼레이드 중 폭탄이 터져 총리가 암살당한다. 그리고 아오야기는 영문도 모른채 총리 암살의 범인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쫓기기 시작하는데.......

  구성이 독특하다. "사건의 시작", "사건의 시청자", "사건 20년 뒤"가 나온 뒤에야 본편 격인 "사건"이 나오고 에필로그와도 같은 "사건 석달 뒤"가 따라붙는다. 이 구성이 번잡스럽다는 이야기도 봤는데, 나는 좋았다. 사건 당사자가 아닌 세간의 시선을 보여주고, 사건의 의문점을 보여준 뒤에야 사건으로 들어가서 오히려 더 사건에 대한 의문이 깊어지게 한다. 만약 이 구성이 달랐다면(보통의 글처럼 시간 순서대로였다면) 느낌이 매우 달라졌을 것 같다. 

  <골든 슬럼버>는 도망과 추적이 주된 내용이지만, 그보다 더 관심이 가는 건 언론과 일반 사람들의 반응이다. 사람들은 언론이 내보내는 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아오야기가 총리 암살범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오싹해진다. 판단을 남에게 미뤄버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들, 그와 나는 다른가?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어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부분은 얄팍하게 그저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 모두가 적이 된 상황에서, 아오야기는 열심히 도망다닌다. 거대한 것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일밖에 없다는 게 참 억울하고 화나면서도 현실감있는 설정이라 뭐라고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장르소설로 끝날 수 있는 얘기를 뭔가 다르게 만들어주는 건 이사카 코타로의 특이한 현실감각인 것 같다. 그의 글을 읽자면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옳은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망다니는 아오야기보다 심각하게 와닿은 것은 그 주변 사람들이 당하는 폭력이었다. 특히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히구치 하루코와 납치 위기까지 겪는 나나미의 모습은 너무 상상이 잘 되어서 속상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섬찟했다. 

  <골든 슬럼버>의 미덕은 그러나,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두 아오야기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진 않는다는 데 있다. 총리 암살범 누명을 쓴 아오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도와준다.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 힘들은 아오야기가 '사건 20년 후'를 보게 만드는 데 큰 힘이 된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는 말이 있다. 진실은 느리지만 시간을 따라 천천히 다가온다. 자칫 피폐해지기 쉬운 상황을 나열하면서도 골든 슬럼버가 따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 하다.

 

  덧붙임 

  아오야기 마사하루의 아버지가 당신 아들이 총리 암살범이라며 소감이 어떠냐 떠드는 매스컴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라고, 그 정도 각오는 하라고 소리치는데 아무도 이름을 대지 않는 부분에서 멈칫했다. 마치 인터넷의 악플 같아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언론,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나열하는 악플. 안전한 곳에서 일방적으로 떠드는 건 비겁하지만 어떻게 보면 참 인간적이다. 

 

2010.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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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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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카 코타로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다작하는구나 하는 걸 깨닫고 있다. 정말 꾸준히 책을 낸 것 같다. 그래도 지금까지 읽으면서 딱히 그만 읽자거나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걸 보면, 꽤 취향이 맞나보다. 

  <종말의 바보>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의 종말이 닥친 순간도 아니고, 세상의 종말이 지나간 순간도 아니고, '세상의 종말이 닥쳐오기 3년 전'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종말이라는 단어가 야기하는 절박함 대신에 쉼표 같은 느낌이 소설 전반을 맴돌고 있다.

  소행성이 떨어져서 세상이 끝장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일본 센다이 시의 힐즈타운 사람들. 종말은 5년 전에 예고되었고, 종말이 오기까지는 3년 남았다. 종말이 오지 않아도 세계는 어느 정도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범죄가 횡행하며 자살이 자주 일어난다. 소설 속 세계는 이미 종말이 온 것 같다. 종말이 올지, 아니면 루머일지, 그게 밝혀지지 않아 소설은 '도중'에 멈춰 있지만 진짜 종말이 와도 혹은 종말이 오지 않아도 안타까운 느낌이다. 

  종말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바보>는 일상의 연장에 놓여 있다.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사람들이 제각기 이야기를 한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이다.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들은 얘기를 한다.

  개인적으로 <강철의 킥복서>가 특히 좋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p. 210. 

  "나에바, 내일 죽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쩔 거야?" 

  배우가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했다. 

  "다르지 않겠죠." 나에바 씨의 대답은 냉담했다. 

  "다르지 않다니, 어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로 킥과 레프트 훅밖에 없으니까요." 

  배우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고 한다. 

  "그건 연습 얘기잖아. 아니, 내일 죽는데 그런 걸 한다고?"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글자들이라서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나에바 씨의 말투는 정중했을 게 틀림없다. "지금 당신 삶의 방식은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방식입니까?" 

   어떻게 보면 너무 모범적인 얘기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종말이 온 세계에 내가 있다면, 하는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다.

 

201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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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듀본의 기도 - 아주 특별한 기다림을 만나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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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사카 코타로의 판타지적인 설정을 좋아한다. 현실을 배경으로, 딱, 어쩌면 있을 것도 같은 수준까지만 존재하는 판타지라서. <오듀본의 기도>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설정이 나온다. 

  <오듀본의 기도>에서는 150여년 간 외부와 교류가 없는 섬 오기시마와 말하는 허수아비(더구나 미래도 알고 있는) 유고가 나온다. 허수아비가 나와서 그런지 읽는 내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허수아비가 생각났다. 하지만 걸어다니는, 소심한, 오즈의 허수아비와 달리 유고는 움직일 수 없고 어딘지 초연한, 섬의 신적인 존재다. 뇌도 있고.

  나는 미래가 보인다는 게 어떤 건지 짐작도 가지 않고 어떤 단체의 대들보가 된다는 것도 상상이 안 가서 유고의 심정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그네 비둘기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각각 부탁을 해 결국 소네가와의 죽음을 만든 유고를 보고, 또 '유고는 새를 훨씬 좋아했다'는 본문의 말을 읽고서 인간이 특별하고 신이 인간을 위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한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고가 처음으로 상항을 바꾸기 위해 (그 미래로 가기 위해) 사람들을 배치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듀본의 기도>는 이사카 코타로의 첫 책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풋풋하고 거친 구석이 보인다. 한 권에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자는 거지, 하는 생각도 중간에 조금 들었는데 그 많은 수수께끼가 다 마무리가 된 걸 보며 좀 놀랐다. 많은 수수께끼 때문에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읽어버린 책이다.

  섬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대답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바깥 세상에는 없고 섬에는 있는 허수아비 유고가 없어지고, 바깥 세상에는 있고 섬에는 없는 음악이 들어왔다. 이제 오기시마 섬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
  

2010.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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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7 링컨 라임 시리즈 7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사라진 마술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링컨 라임 시리즈를 챙겨봐야지 하고 집어온 책. 다 읽고 나서 링컨 라임 시리즈는  ↗↘↗↘  이런 곡선을 그리나 싶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책장이 넘어갈수록 점점 맥이 빠진다. 

  링컨 라임 시리즈라고 보기에는 법의학이 너무 안 나오고, 활약하는 것도 캐서린 댄스고, 새로운 이 캐릭터와 심문법에 대해 알려주느라 태반이 설명조가 된다. 무엇보다 반전이 재미없었다. 다른 링컨 라임 시리즈처럼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반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작가의 강박관념이 반전에서 느껴질 정도다. 별로 납득이 안 되는 느낌.

  S.S.밴 다인이 말한 추리소설의 법칙에 '최소한 1명은 죽어야 한다. 살인 사건 같은 중대한 범죄 없이 범인을 찾으라고 독자에게 몇 백 페이지의 글을 읽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콜드 문>을 보면서 밴 다인의 말에 공감했다. 나는 이 책의 결말을 보고 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쫓아왔지? 하는 느낌.

  전체적으로 캐서린 댄스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링컨 라임 시리즈의 지면을 할애한 느낌이다.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등장한 인물이 매력적이라 새 시리즈를 만든 게 아니라, 새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링컨 라임 시리즈를 이용한 느낌이다. 뭐, 나쁘지 않다. 홍보가 잠깐이었다면. 잠깐이 아니었기에 문제지.

  그나저나 새로운 시리즈로 눈을 돌린 걸 보면 링컨 라임의 수명이 거의 다 되었다는 걸까? 조금씩 라임의 활약이 줄어드는 느낌이고 시리즈가 비슷한 패턴이라 긴장감이 떨어지긴 했지만 아쉽다.

  <사라진 마술사>에 미스디렉션(눈속임)이 나왔다면 <콜드 문>에서는 *****가 나온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일을 하기위한 발판이 되는, 그런 뜻이다. 그러나 <사라진 마술사> 만큼 이 용어를 잘 활용하진 못한 것 같다. 

 

201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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