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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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가 속삭여주는 동화처럼 조근조근하게 들려오는 영미시 이야기.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하는 삽화와 어우러진 영미시(영어원문과 한국어번역문이 같이 있다), 그리고 뒤에 짤막하게 덧붙여진 저자의 감상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생일>이라는 제목처럼 읽으면 가슴이 따듯해지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들이 가슴을 두드린다.

 

Leisure                                                       여유

                  - W.H.Davies -                                                              - W.H.데이비스 -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양이나 젖소들처럼 나무 아래 서서
And stare as long as sheep or cows                         쉬엄쉬엄 바라볼 틈 없다면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숲속 지날 때 다람쥐들이 풀숲에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도토리 숨기는 걸 볼 시간 없다면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이 총총한
Streams full of stars,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like skies at night.

(<생일(장영희, 비채)>118p~119p)

2009.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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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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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을 달래는 순서
- <고통을 달래는 순서(김경미, 창비)> 16p~17p -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토련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게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나는 시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시라고 하면 무턱대고 어렵기만 하다. 그리하여 내가 읽는 시는 죄다 유명한 시, 어디서 주워들었음직한 시, 남들이 좋다 권하는 시이다. 그런 시들은 남들이 해석을 달아놓은 것도 많고, 많이 들어 익숙해서 왠지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실제로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내가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는 시집을 집어든 이유는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우울했고, 우울해서 닥치는대로 책을 뒤적였고, 뒤적이다가 보니 또 우울해졌고, 뭐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니, 이 시가 내 우울도 달래줄까.

  시 '고통을 달래는 순서'는 고통을 달래고자 움직거리는 일련의 이미지가 이어진 다음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견딘다 라고. 이 시 전체에 마침표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은 그 고통이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견디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견딘다, 견딘다, 이 부분을 수없이 되씹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견디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무뎌질 때까지 버티라는 잔혹한 말이지만, 그 어떤 위로보다도 옳기에 그냥 웃는다. 앞에 있는 이미지들이 그저 어렴풋하게 떠도는 것과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폐를 찔러 비틀어 올리는 한 마디.

  그래서 나는 이 시가 좋아졌다.

  더불어 이 시집도 좋아졌다.

2009.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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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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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책.

  (...라고 말하고 마치면 역시 너무 짧을까. 최소한 내가 나중에 이 글을 읽었을 때 책의 느낌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을 정도까지 길게 늘여보기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한 나의 느낌은 역시 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말한다. 내가 어느 책을 읽는 순간 다른 책들은 외면을 당한다. 맞는 말이다. 한 주에 쏟아져나오는 신간도서만 봐도 머리가 핑핑 돈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책으로 범위를 좁혀봐도 매한가지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한정이 되어 있고, 내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다른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통은 이 즈음 해서, "그러니까 양질의 독서를 하기 위해 좋은 책을 선별하여 읽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시절에도,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러 곳에서 여러 방식으로 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색다른 논리를 편다. 그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읽지 않은 책'이라 여겼던 것도 책을 읽은 것으로, 다시 말해 독서의 범주로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책의 첫장부터 끝장까지 차근차근 정독한 책"을 '읽은 책'으로 분류해왔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보면 이처럼 정독한 책은 많지 않다. 남에게서 주워들은 책, 훑어보기만 한 책, 그리고 읽었는데 내용이 아리송한 책, 그리고 책의 본문은 읽지 않았지만 '관련된 책'에서 대충 내용을 알게 된 책 등.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읽은 책'보다는 이런 식으로 스쳐지나간 책이 더 많은 것 같다. 만약 이런 방식들까지 독서로 취급한다면 나의 독서 폭은 조금 더 풍요로워질 것이며, 사람들과 더 다양한 책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창의력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라고 피에르 바야르는 말한다.

  생각해보면 피에르 바야르가 제공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이미 나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필수수업으로 들어야 했던 "독서세미나"에서는 20명 즈음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진짜로 책을 읽고서 오는 애들은 5명이 채 안 되었다. 하지만 토론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 토론은 그다지 이상하게 흘러가지도 않았고, 책을 전혀 읽지 않고 말했구나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책을 읽지 않고 세미나를 한 것을 알게 된 것은 사적인 자리에서 오가는 잡담 때문이었다). 책에 대해서 토론한다는 것은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이 담고 있는 어떤 생각과 그에 관한 나의 생각을 말한다는 것이고, 아주 세부적인 사항으로 가지 않고 일반적인 이야기에 머무는 이상 대화 및 토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대로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차근차근 이해하며 읽어내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나도 피에르 바야르처럼, 그 외에 책을 읽는 방법 또한 독서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싶다. 지나치게 딱딱한 것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법이다. 조금 물렁해진다면 사람들이 편하게 책을 읽고 책을 더 읽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단, 비(非)독서와 무(無)독서는 구분하자.
 


 덧붙임. 
 책 디자인에 가볍고 얇고 보기 쉽게 편집되어 있으나, 불행히도 오타가 몇 개 눈에 띈다.

 

2009.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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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정치학 - 와인 라벨 이면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최고급'와인은 누가 무엇으로 결정하는가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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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와인 산업과 미국의 와인 산업을 비교하고 각각의 나라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개입하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조명하는 책이다. 즉, 와인은 단순히 포도로 빚은 술로써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게 아니라 정치가, 유통업자, 평론가 등 제 3의 세력(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생산자-소비자 이외의 변수들)의 입김이 들어 있음을 여러 자료를 들어가며 설명해준다.

  만약 대한민국이 와인의 주요 생산지이며 수출국이라면 <와인정치학>은 한 번 쯤 읽어봐야 할 책이었겠지만 불행히도 대한민국은 와인의 수입국이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 아니다. 따라서 와인이라는 상품에 얽혀있는 이해관계, 정치법안, 사회분위기는 말 그대로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 내 이야기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어딘지 조금 붕 뜬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내렸다. (더구나 나는 와인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지지도 않았고 와인에 열광하는 와인컬렉터도 아니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한 가지- 와인에 개입하고 있는 정치처럼 우리 나라에서 다른 식품, 다른 상품, 다른 어떤 것에도 정치가 개입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와인정치학>을 읽는 동안 꾸준히 들었다. 정치는 단지 와인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며 저 국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내 식탁을 비롯하여 나의 주변에 광범위하게 직/간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자 한국판 <와인정치학>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제목이 와인정치학이 아니겠지만.

 

2009.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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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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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사람이 만들어낸 책이 사람을 만든 과정에 대해 훑어간다. 11명(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고, 혹 이름이 생소해도 약력을 보면 아, 그 사람이로군, 이라는 생각이 드는)과 그들을 스쳐간 혹은 그들에게 박혀있는 책을 말한다. 온전히 정혜윤의 시선으로. 정혜윤은 인터뷰하는 내내 그들을 재해석한다. 마치, 자신이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책을 읽어가는 와중에 머릿속에서 비슷한 다른 책이 링크되고 끊임없이 자신의 해석과 추측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단상이 어지럽게 얽히는 것처럼,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정혜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말한 책을 자신이 이전에 읽었던 경험을 떠올리고, 사람들이 말한 책과 그 사람과의 이미지를 연관짓고, 책이나 사진 그리고 영화포스터의 그림을 끌어다가 인용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인터뷰라고 하기에는 꽤나 적절치 않다. 책에 대한 설명과 인용이 반이고, 반의 반은 정혜윤의 책에 대한 생각의 서술이고, 그 외의 것만이 각 장의 제목이 된 사람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마치 '진중권' '공지영' '변영주' 등의 주제어로 검색해서 정혜윤 자신의 경험을 끌어내는 것만 같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을 해 주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나와 친한 누군가가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소르르 빠져든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의 책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남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치환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미성숙하고 불안정한- 소위 말해 '폼 안 나는' 과거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성공한 사람 특유의 번쩍이는 느낌이 없다. 촛불 아래에서 글자를 더듬어가는 듯한 열기와 어슴푸레한 빛, 그리고 꼿꼿함이 있을 뿐이다.

  보스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그 책을 언급하며 정혜윤이 말한 것처럼, 책들은 끊임없이 인용되고 그래서 한 책으로 시작해서 다른 책을 만나게 되고 하다 보면 책은 일렬로 줄을 서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기도 하고 무리지어 군무를 추기도 한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수많은 책과 인용문이 모여서 합창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이 사람을 만들었어. 너를 만든 것은 누구니. 그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책에 대해 알고, 그 책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고, 지금 11명이 어디에 와 있나를 생각하면서 다시 나를 생각한다. 책이 지금도 나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도 이제 나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정리한 목록을 들고, 오늘 도서관이라도 들러봐야겠다.

 

2009.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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