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통을 달래는 순서 ㅣ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평점 :
고통을 달래는 순서
- <고통을 달래는 순서(김경미, 창비)> 16p~17p -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토련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게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나는 시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시라고 하면 무턱대고 어렵기만 하다. 그리하여 내가 읽는 시는 죄다 유명한 시, 어디서 주워들었음직한 시, 남들이 좋다 권하는 시이다. 그런 시들은 남들이 해석을 달아놓은 것도 많고, 많이 들어 익숙해서 왠지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실제로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내가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는 시집을 집어든 이유는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우울했고, 우울해서 닥치는대로 책을 뒤적였고, 뒤적이다가 보니 또 우울해졌고, 뭐 그런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니, 이 시가 내 우울도 달래줄까.
시 '고통을 달래는 순서'는 고통을 달래고자 움직거리는 일련의 이미지가 이어진 다음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견딘다 라고. 이 시 전체에 마침표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은 그 고통이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견디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견딘다, 견딘다, 이 부분을 수없이 되씹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견디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무뎌질 때까지 버티라는 잔혹한 말이지만, 그 어떤 위로보다도 옳기에 그냥 웃는다. 앞에 있는 이미지들이 그저 어렴풋하게 떠도는 것과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폐를 찔러 비틀어 올리는 한 마디.
그래서 나는 이 시가 좋아졌다.
더불어 이 시집도 좋아졌다.
2009.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