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예술 -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삶의 불길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심보선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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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쉬운 책은 아니었다. 내 기준에서 쉬운 책이란 이런 것이다. 별 고민 없이, 쓱쓱 읽어 나갈 수 있고, 내가 잘못 읽었는지 잘 읽었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책. <그을린 예술>은 쉬운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이 책을 진정으로 다 읽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는 사회학을 꽤 좋아하지만 사회학의 용어와 개념을 잘 알지 못하고, 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용어들은 가끔 너무나 생소해서 책을 노려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것은 이 책이 어렵지 않았다는 점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용어는 장애이기는 했지만 아주 큰 장애는 아니었다. 조금 거리가 먼 징검다리 정도를 생각하면 딱 좋다.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가기는 하지만 책에는 핵심이 있었고 그 핵심 자체는 단순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읽은 핵심은 이렇다 : "지금 예술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예술은 죽었다 /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

 

  이 책을 읽으며 종종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지음)>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맥도날드에서 '하나뿐인 한정판 시'를 증정해주는 특별한 버거인 '마이클 버거'를 판매해 히트하기까지의 과정이 이 단편의 내용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꾸는 꿈과는 정반대에 존재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예술은 하나의 상업도구가 된다-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혁신적이라며 칭찬한다. 예전 뉴스에서 나온, 하나의 투자상품이었던 <행복한 눈물>이란 그림과 같은 선에 놓여있다. 팔기 위한 시, 금고 대신이었던 그림, 이것들은 예술인가?

 

  p.13  그것은 시인인 내가 꿈꾸어 왔던 꿈이기도 하다. 회의 시간에 짬짬이 남몰래 시 한 편을 써 내려갈 때 나는 투사나 영웅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살고 싶었다. '마지 못해, 죽지 못해'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잘,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모든 물음은 결국 하나다. 예술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예술을 하고 왜 예술에 매혹되는가? 나는 예술에 깊게 몸 담은 사람이 아니므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좀 난감하다. 아주 기본적인 대답밖에는 할 수 없다. 좋으니까, 숨통이 트이니까, 가끔 힘들여 무언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힘을 주기도 하니까.

 

  그동안 즐기던 글과 그림과 음악에 대해 뭉뚱그려서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를 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던 내용과는 다소 달랐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도 같다. 다음에 시간이 날 때 또 한 번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2013. 7. 7.

 

 

*  <그을린 예술>을 보면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두리반, 자립 의지의 거점'이었다. 이것은 해피엔딩이고, 예술의 힘과 기능을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좋다.

 

** 181페이지에서 눈에 띄는 오타가 하나 있었다. '스탠들' -> 스캔들로 수정되어야 할 듯 하다.

 

*** 저자가 시인이자 사회학자여서 그런지 사용된 언어가 꽤 재미있었다. 딱딱해보이는 문장의 틈바구니에서 놀랄 만큼 유려하고 가슴을 건드리는 언어가 섞여 있다.

 

**** 여기부터는 메모.

 

p.42  그리하여, 직장을 옮기든, 혹은 커리어를 바꾸든, 뭘 하든, 혹은 뭘 안 하든 간에, 우리는 이제 덧없고 불가능한 우정의 약속이라는 기준에서, 다시금, 가까스로, 인간적이라 불릴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떠났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돌아올 것인가?

 

p.111  "철거민과 나의 처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노래할 곳이 없다는 점에서."

 

p.139  "감정과 사유에는 그것을 경험하고 사유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감정과 사유가 현존하려면, 누군가가 그 책을 집어들고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개인은 저자가 남긴 시의 텅빈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 사람은 저자가 작품에서 자신의 부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해던 똑같은 비표현적 몸짓을 반복할 것이다."

 

p.174  이제 "예술가들은 결국 지극히 상업적인 팝스타인 동시에 비주류 아방가르드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스타덤이 제공하는 재료들로 전혀 상업적 가치가 없는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p.182  현대의 예술가들은 모두들 수상대를 향해 서 있다. 질투심과 열패감에 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지만 어느 쪽이든 수상대는 있다.

 

p.192  창작의 행동은 노동의 제작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에 노동자가 도면에 따라 자동차를 완성했을지라도, 거기에 재료와 노동 과정에 대한 장인적 통제와 자주적 관리가 개입된다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최종 경과에 낯선 경이로움을 느낀다면 그때 노동은 창작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p.268  그러나 그들이 작품 제작에 쏟아붓는 열정은 거의 필사적입니다. "적어도 그렇게는 못 살겠다."와 "적어도 나는 시를 쓰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이 두 말의 결합은 삶과 상상력의 결합을 대변합니다. 이 결합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주인으로 갱신되고 고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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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탐정
마야 유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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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서 골랐고, 재미있는 추리소설이었다.

  유쾌한 포장 속에는 잘 정리된 논리를 담은 본격추리가 담겨있다.

 

  도련님 혹은 아가씨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유쾌한 분위기를 띤다는 점에서 <부호형사>나 <수수께끼풀이는 저녁식사후에>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귀족탐정>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추리소설이란 무엇이고 탐정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한다. 탐정이 추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명이 나오지 않은 귀족탐정님은 "추리?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지? 노동은 하인들이 한다고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라고 말하며 거리낌없이 집사, 하녀, 운전기사에게 단서를 모으게 하고 추리를 시킨다. 귀족탐정이 하는 것은 그저 거기 숨을 쉬고 존재하는 것 뿐이다.

 

  이 구성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귀족탐정은 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탐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흠없는 추리를 보이는 것은 집사, 하녀, 운전기사이지만, 그들이 탐정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집사도 하녀도 운전기사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귀족탐정의 명령에 따른 수동적인 행위일 뿐으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하는- 소위 말하는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고 귀족탐정은 탐정인가? 물론 귀족탐정은 범죄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사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내릴 뿐이다.

 

  따라서 <귀족탐정>에서 관점에 따라 탐정은 수사 명령을 내리는 귀족탐정일 수도 있고 혹은 직접 움직이는 집사 하녀 운전기사일 수도 있다.

 

  "제 능력은 이미 보여드렸습니다.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저기 있는 세 명이 바로 제 두뇌입니다. 저들은 제 소유물이니, 추리같은 하찮은 일은 모두 저들에게 맡겨두면 됩니다(p.355)"

 

  이럭저럭 생각을 해 봐도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고, 탐정이 나오기는 하고, 그 탐정을 누구로 봐야 하는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지만 동기가 먼저인가 수단이 먼저인가라는 것은 쉽게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냥 다음에 한번 더 읽으면서 생각해봐야겠다. 어쨌든 <귀족탐정>에서 성립하는 탐정이 매우 독특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건 자체도 재미있고 본격추리도 재미있었지만, 그보다 예기치않게 받은 화두가 더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탐정은 누구일까?

 

 

201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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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1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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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별다른 게 없다. 일본의 3대 탐정 중 한 명이 나온다니까 구입했다. 음, 다시 생각해도 참 심플한 구매동기다. 보통 심플하게 구입하면 크게 후회하거나 / 아주 좋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는 그냥저냥 괜찮은 정도였던 것 같다. 글은 재미있었지만 나와는 별로 맞지 않는 느낌이라는 게 정확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은데, 첫째는 요즘 현대 추리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옛 추리소설을 읽으니 고풍스러운 느낌이 두드러졌기 때문이고(특히 문체가 옛 느낌이 강하게 났는데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둘째는 탐정을 띄우는 것 치고는 크게 활약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이 꽤 많이 죽는다(아니 이건 어쩔 수 없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재미있는지 없는지 물으면 재미있었다고 대답할 것 같다. 일단 서장에서 제시한 힌트가 아주 핵심적임에도 불구하고("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좀처럼 생각이 거기로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지만 범인을 지목하면서도 망설이게 된다. 인형이 죽는다. 같은 방식으로 사람이 죽는다. 다시 인형이 죽는다. 같은 방식으로 다시 사람이 죽는다. 이런 반복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생각이 한쪽으로 굳어져버린다. 기괴한 것에 심취한 미치광이가 저지른 짓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범인은 매우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동기조차도 매우 현실적이다.

 

  다음 시리즈도 아마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별 무리 없이 구입해서 볼 것 같다. 다만 다음에는 표지가 덜 무서웠으면 좋겠다. 뭔가 표지가 별 거 아닌데 섬뜩해서 보기가 힘들다. ㅠㅠ

 

 

201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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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가 잠긴 방
기시 유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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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 유스케의 추리 단편집. 밀실을 주제로 <서 있는 남자>, <자물쇠가 잠긴 방>, <비뚤어진 상자>, <밀실극장> 총 네 편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밀실 극장>은 별로였지만, 나머지 세 편은 집중해서 읽었다. 네 편 다 밀실을 주제로 하고 있고, 그 중 세 편은 범인이나 범행동기보다 범행수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밀실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와 범행동기, 범인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내용은 상당히 압축된다. 한 마디로, 이 책이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어떻게 방이 밀실이 되었는가"이다.

 

  사실 밀실이라는 번거로운 일을 할 법한 이유는 '그 죽음이 자살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그래서 자신이 용의선상에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외에는 별로 없다. 자살로 보이게 해야 하는 이유는 타살이라면 거의 틀림없이 자신이 용의선상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기시 유스케는 이런 부분은 쿨하게 드러내버린다. 글을 읽다 보면 범인과 동기는 명명백백하다. <비뚤어진 상자> 같은 경우는 아예 범인의 시점으로 시작해서, 대놓고 범인과 동기를 까발리고 시작한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어떻게 이 범행이 가능했는가"이다.

 

  범행수법 한 곳에 시선이 몰리니만큼, 수법이 허술하다면 책 또한 김 빠진 콜라처럼 미적지근했을 거다. 그 미적지근함이 없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글이 늘어지는 느낌 또한 없다. 시간이라는 새로운 축을 추가하거나, 새로운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단편도 있고, 공간감각을 시험하는 단편도 있다. 범행수법에 시선이 몰리니만큼 등장인물들은 다소 밋밋한 느낌을 주는데(심지어 탐정과 그 조수(?)마저도), 다 읽고 나면 묘하게 범행 자체가 범인의 특성과 매우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 깔끔한 단편집이다. 이런 단편집이 또 나왔으면 좋겠다.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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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전 雙典 - 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
류짜이푸 지음, 임태홍.한순자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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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전, 다시 말해서 수호전과 삼국지를 새롭게 바라본 책이다. 저자는 이 두 책을 재앙이라고 말하며, 중국 사회에 크나큰 해악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둘은 고전이 아닌가? 고전이라 함은 읽는 것을 권장받는 책이 아닌가? 하지만 저자는 문학적인 가치와 영적인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수호전과 삼국지가 문학적으로 가치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치와 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첫째로, 저자는 수호전에 나타나는 폭력에 대한 숭배와 폭력취미, 나아가서 '반란은 정당하다'고 고취시키며 '반란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정당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저자가 수호전에서 들고 나온 이야기 토막들은 굉장히 잔인하며 인간같지 않다. (그러나 내가 정작 수호전을 읽었을 때는 이런 장면이 썩 거북하지 않았다. 아마 책의 논리와 동화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가 경고하는 것도 아마 이런 식으로 무장해제 당했을 적 스며드는 사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잔학성에는 "목표"를 위해서 "사람"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스며 있다. 그들은 그 논리로 인해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는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p.115.

 독자들이 이규 등의 행위를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정당성' 때문이었다. 살인은 완전히 양산박의 반란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큰 도리는 작은 도리보다 앞선다'는 명분인 것이다. / 그런데 중국 문화는 맹자로부터 시작하여 그 '큰 도리'라는 것을 오히려 작은 도리라고 지적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사람과 짐승이 구별되며, 그것이 바로 큰 도리인 것이다.

p.108.

  그러한 논리는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는 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보다 더욱 악하게 행동해도 된다. 사회는 어둡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보다 더욱 어둡게 행동해도 된다. 이러한 논리를 배경으로 반란이 정당하다는 주장이 생겨나고 이것이 변해서 강탈도 정당하며, 살인도 정당하고, 사람을 먹는 것도 정당하다는 주장이 된 것이다.

 

  위에서 나타난 것처럼, 독재에 대항해 일어난 세력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독재적이라는 것은 괴상하다. 이런 논리에는 어떠한 반론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무서운 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소를 희생시키며 나아간 대의 결말에 있다.

 

p.130.

 독재가 아닌 정치 형태나 문화 형태가 새롭게 세워진 적은 결코 없었다. 그 원인은 독재 정권의 주체와 독재 정권에 반항한 주체가 심리적으로 모두 동일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p. 21.

 격동의 시기를 만나서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정당성을 내걸고 모였을 때 인간성 속에 있는 폭력적인 경향은 바로 조직화된다. 아울러 조직적인 역량은 폭력적인 재난을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사라들의 타고난 양심과 천성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층층이 차단된다. 우리가 역사상의 폭력 현상을 관찰할 때 정말 무서운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폭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두 번째로 저자는 '삼국지가 지닌 총체적인 효과는 영혼은 없고 마음의 꾀만 가지고 있는 삼국지 인간을 부단하게 제조해내는 것이었다.(p.195)'라고 말하며 삼국지를 비판한다. 저자는 일차로 등장인물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유비의 유술, 조조의 법술, 사마의의 음양술, 그외 소설에 나오는 미인술 등 술수)을 말하며 삼국지에 얼마나 교활함이 가득차 있는지를 말하고, 그후 삼국지에서 얼마나 많은 변질이 일어났는지(의리, 지혜, 역사, 미)에 대해 말한다.

 

p. 210.

 무릇 백성들은 모으기가 어렵지 않다. 그들을 사랑해주면 친해지고, 이롭게 해주면 모여든다. 그들을 칭찬해주면 일에 힘쓰고,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되면 흩어진다. 백성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것은 '인의'에서 나온다. '인의'를 순수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적고, '인의'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다.

p.217.

그래서 루쉰은 법술을 가리켜 '명술', 즉 '밝은 술수'라고 했다. 그것은 비록 기만술이며 권모술수이지만, 법의 이름을 사용하며 인의 가면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만약 사람을 죽이고자 하면 합법적인 근거를 만든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죽인다. 그것은 분명히 '기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만들어버린다.

p.259.

 이것을 보면 '결의'의 '의'란 단지 패거리 집단의 협소한 윤리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사회의 일반적인 윤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의'는 그들 사이에서는 진실일지 모르지만, 외부의 보편 사회에 대해서는 거짓이었다. 이것이 바로 '의'의 변질이다.

 

  삼국지에 나타난 위형을 조목조목 지적한 말을 읽고 있자면 조금 섬뜩해지는 것이, 그것이 결코 삼국지 속에서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고 있자면, 정치는 물론이고 현대 개인의 인간관계에서도 삼국지 못잖게 얼마나 많은 기만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정치투쟁의 3원칙 (p.305)

1. 성실성은 필요없다

2. 사당을 결성한다

3. 상대방에게 먹칠을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이고, 자신의 형제('우리 집단')의 이익이다, 이익이 되는 것은 옳은 것이다, 속이는 것은 영리한 것이며 속는 사람은 바보이다, 기타 등등. 세상 살기 위한 술수 혹은 요령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모두 삼국지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잠깐 들 정도다.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국에서 오래도록 내려온 충고의 말을 인용한다. "어려서는 수호전을 보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보지 마라." 그러나 저자는 수호전과 삼국지는 널리 읽히고 있으며, 오래 사랑받은 만큼 그 해악이 깊이 뿌리내려 민족의 집단적인 무의식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저자는 중국에 한정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도 그리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라는 부제가 과장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강한 목소리로 쌍전을 비판하지만, 탄탄한 논리로 그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은 능히 받아들일 만 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쌍전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거기에 더해, <쌍전>은 "문학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가치를 가진다.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는 저도 모르게 그 책의 논리에 동화되기 마련이고, 그 논리는 내재되어 그 후 사람의 행보에 영향을 미친다. 비판적인 책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세상에 해약을 주는 책이 비단 수호전과 삼국지 뿐이겠는가?

 

 

+ 덧붙여

 

p.148.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혼외정사'한 여성들에 대해서, 홍루몽은 그들을 천당으로 보내고, 금병매는 그들을 인간세계에 집어넣고, 수호전은 그들을 지옥으로 쳐넣었다.

 

  저자는 책의 상당한 면을 할애해서, 수호전과 삼국지에서 여성에게 보이는 태도를 지적한다. 이 두 소설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며 일종의 사물이다. 요물, 독물, 제물, 기물, 희생물, 먹거나 잘리는 물건. 이렇듯 여성의 사물화가 일어난 것에 대해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정리하며, 그에 관해 유가의 책임을 묻는다.

 

  <쌍전>은 수호전과 삼국지를 비판하고 있지만,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인간성인 것 같다. 인간성의 회복.

 

201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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