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오렌지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12
구현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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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리니름 있습니다 )
 
 
 
  이 소설의 제목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다. 에이전트라는 단어에서 첩보물의 냄새가 나고, 오렌지라는 단어는 상큼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합쳐지면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의 고목을 말려 죽이는데 사용한 고엽제의 이름이 된다. 고엽제는 심한 후유증을 낳는 화학약품인 게 밝혀져서 이후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의 환경과 사람에 가한 어마어마한 폭력, 에이전트 오렌지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그저 한 편의 잘 나가는 액션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초능력자 노인이 있고, 초능력자 노인을 돕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이 세상을 호도하며 그물을 죄어오고, 한판 대결 끝에 초능력자 노인이 승리하지만 악당의 무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을 보면, 이 글에서 의미 있는 것은 사실 배경인 척 깔린 것들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든다. 미국의 실험, 6.25전쟁, 베트남 전쟁, 80년대 학생운동, 라이따이한, 연쇄살인마, 언론의 선정적 보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폭력이다.
 
  책을 덮고 났을 때 기억에 남은 건 초능력자 노인의 괴력이나 악당의 비열함 따위가 아니었다. 노인을 상대로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내는 ‘언론’, 미국 기관의 명령에 자국민이 다칠 만한 일일지라도 기꺼이 협조해주는 ‘정부’,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는 광기어린 ‘대중’이 잔상처럼 남았다.
 
  소수의 진실은 보잘 것이 없다. 정 기자는 초능력자 노인의 진실을 밝히려고 주변을 파헤치지만 사건의 실체를 알고서도 기사화하지 않고 잠적한다. 중학생 유나도, 라이따이한 흐우도 정 기자와 함께 잠적한다. 그들은 서류상 죽은 사람이 되어 숨어서 힘을 기른다. 그들은 왜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모든 일이 미국 기관의 손아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길러 싸울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나는 정 기자가 기사를 써도 그 기사는 인쇄-배포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는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여도 무마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소수의 사람들은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결국 커다란 힘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진짜라고 믿는 거예요? 지금 이 상황이? 서장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우리가 뭘 믿는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 안 그래? 힘 있는 친구들이 이게 진짜라고 말하면, 그게 진짜인거야. 그런 게 세상이야. 우리 같은 일개 부속품들은 그렇게 기능하다 한순간에 버림받는 거라고. (p.201)

 
  그래서 정 기자 일행은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대신, 진실을 경험한 소수끼리 힘을 길러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 기자 일행이, 자신을 지키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대가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을 정 기자 일행의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다수를 가만히 보면, 그들은 어떤 의견을 참으로 여겨 동의한다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동조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다. 판단을 남에게 미뤄버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끌려가는 일이 의외로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니 옳겠지.’ ‘저렇게 권력 있는 사람이 옳다고 하니 옳겠지.’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어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부분을 얄팍하게 그저 받아들인다.
 
  외눈박이 나라에선 두눈박이가 병신이랬다. 다수가 틀렸을 때 다수결에 따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다수는 언제나 옳은가?
 
  자신이 스스로 연쇄살인범을 따라 나간 게 아니라, 연쇄살인범이 반장을 찾자 반친구 모두가 자신을 보고 그 중 친구가 자신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밀려났다는 유나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연쇄살인범들이 자신을 지목하지 않아 안심했고 이 살인행각이 얼른 끝나기를 빌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나의 등을 슬쩍 밀었다. 하지만 유나가 돌아왔을 때, 친구들은 유나를 반친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려 한 영웅으로 생각했다. 자신들이 유나를 연쇄살인범에게 밀어 넣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다. 유나와 같은 반친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고, 어떤 종류의 폭력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다수의 마법이랄까.
 
  <에이전트 오렌지>에서는 ‘장난’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특이한 것은 장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항상 가해자라는 점이다. 9명의 사람을 교실에서 고깃덩이로 저며 놓은 연쇄살인범도, 누가 더 많은 베트콩을 죽이나 겨루자고 말한 조지 랜돌프도, 그것에 의한 한국 군인도. 유나가 진심으로 반친구들에게 그날의 일을 따졌다면, 그들도 유나에게 그건 별거 아닌 장난 같은 일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폭력은 도처에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다양한 폭력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쟁, 살인, 차별. 그리고 직접 폭력을 쓰지는 않더라도, 폭력적인 행위를 묵과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폭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동조이고, 방관이고,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세상을 보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살아남으려 발버둥 쳐봐도 언젠간 누구나 죽고 이렇게 헤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니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예요. (p.173)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는 소수의 모습도 보여준다. 폭력을 당하는 소수, 그리고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 다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소수의 모습을 말이다.
 
  정 기자 일행은 스스로 움직였다. 그들의 앞날이 밝을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바위를 향해 돌진하는 계란이나, 불꽃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 할일을 결정했다. 결과가 어떻더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는 문제가 아니라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느냐의 문제다. 많은 사람이 그걸 잊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잊고 있었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생각을 해야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하나의 폭력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주변에 따라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는 행동이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쏟은 내 노력도 아주 의미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201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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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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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편집.
  <회귀천 정사>에 이은 '화장 시리즈' 단편 3편과, '양지바른과 사건부' 3편이 실려 있다.
  '화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계속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이 글에 기본으로 깔린 정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복되는 미(美)적인 강조도 불편했다. 나는 탐미라는 장르를 안 좋아한다.
 
 
* 붉은 꽃 글자
: 나는 친구이자 같은 물리학도인 미즈사와와 놀러갔다가 어릴 적 헤어진 여동생 미쓰를 우연히 만난다. 미즈사와는 미쓰에게 마음이 있는 눈치를 보인다. 나는 미즈사와와 미쓰가 밀회하는 것을 안다. 미즈사와는 약혼녀가 있고, 나는 미쓰를 추궁한다. 미쓰는 미즈사와와 연락을 끊지만 이미 미쓰는 임신한 상태였다. 어느 날 나는 미쓰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나는 미즈사와를 찾아가는데......
-> 반전이 인상적인 단편. 이미지가 굉장히 선명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야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나'가 약혼녀가 있으면서 미쓰를 꼬여내는(마지막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싶다나--;) 미즈사와는 내버려두고 미쓰만 질책하는 점,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하나 미쓰의 유혹에 거리낌없이 잠자리를 하는 '나', 그리고 수면제 먹고 자는 동안 미즈사와와 몸을 섞은 게 미즈사와 약혼녀에게 사죄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미쓰.... 납득이 가거나 공감이 가는 감정이 없다. 탁 까놓고 '나쁘지만 어쩔꺼야' 이러면 차라리 속 시원할 텐데, '나쁘지만 나쁘지 않아 이건 아름다운 것'하는 식으로 보여주려 해서 더 일그러져 보인 것 같다. 미쓰가 미즈사와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모르겠고, 미즈사와는 실제로 미쓰에게 무슨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보여주기 위해 연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 느낌이라고 할까, 그들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게 이상해보이기만 하는데, 이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가?
 
 
* 저녁싸리 정사
: 어릴 적 나는 길을 잃었다가 싸리꽃을 든 여인과 학생복을 입은 남자를 만나, 등불을 건네받고 여인이 떨군 싸리꽃을 따라 돌아간다. 그는 며칠 뒤, 여인과 남자가 같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 커서도 저녁싸리 정사라 명명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인(다지마 유우)와 동반자살한 남자, 미하기 신노스케가 쓴 저녁싸리 일기를 읽고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나는 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 이것도 반전이 있음. '알려진 것과는 다른 진실'이라는 점에서 붉은 꽃 글자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이 글을 읽고 제일 궁금해진 건, 이 사건을 과연 정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유우는 신노스케를 만나기 전부터 자살할 계획이 있었다. 말하자면 자살의 이유가 '신노스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아닌 셈이다. 유우는 오래도록 죽고 싶어했으니까. 유우의 계획에 신노스케가 그냥 딸려간 셈. 쓸쓸해서 누구라도 데려가고 싶었던 건가.
  유우는 신노스케를 사랑한 걸까? 유우는 신노스케와 절대 몸을 섞지 않는다. 장지문 너머로 쓰다듬을 뿐이다. 그 모습은 나에게 유우가 신노스케를 좋아한 걸까 하는 의문을 심어줬다. 그녀에게서는 '같이 죽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의 뜻도 존중해줘야 할 것 같은데... 으음. 유우가 신념을 갖고 신노스케를 배신했다면 모르겠지만, 유우는 그냥 다지마 노리부미의 말에 따라 다지마가 신노스케의 계획을 역이용하려는 것을 묵과했다. 이런 저런 것들이, 유우의 사랑을 의심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녁싸리 정사>에 실린 '화장 시리즈' 중에서 제일 알기 쉽고 명확한 캐릭터는 다지마 노리부미였다. 최소한 이 사람을 보면서 답답하진 않았다. 비열하거나, 음흉하거나, 뭐 그런 감정은 들었을지라도.
 
 
* 국화의 먼지
: 다기리 시게타로가 저녁 7시경 방에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그러나 '나'는 다기리의 부인 세쓰가 6시경 군인 남자와 집에서 만나는 걸 봤고, 피에 젖은 국화꽃과 실밥은 다기리의 방 이외의 곳에서 발견했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다기리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 작품 말미, 다기리 세쓰의 논리를 들으며 좀 무서웠다. 맹목인 '무사의 피'에 대한 집착과 증오라니. 그녀의 논리는 꽤나 전체주의적이고, 개인의 감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집단의 감상 같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초반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소식이 나온다) 더 불편했다.
    <저녁싸리 정사>에서는 '바람은 피웠지만 몸은 떳떳한' 유부녀가 나왔다면, <국화의 먼지>에서는 '바람은 피웠지만 목적 달성(아이갖기)을 위해서지 마음은 떳떳한' 유부녀가 나온다. 몸과 마음 중 하나는 무조건 지켜줘야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것에 좀 변명하는 느낌이랄까. 거기서 이 글이 사실 꽤나 옛날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 때문에 연극적이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읽고 느낀 것은 '화장 시리즈'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히기는 잘 읽히는데 읽을수록 불편하다.
  그래서 뒤쪽의 '양지바른과 사건부' 단편 3편이 반가웠다.
  유머 미스터리라고는 하는데 딱히 아주 우스운 것은 아니고, 느낌이 코메디라기 보다는 시트콤 쪽에 가깝다.
 
 
* 하얀 밀고
: 사회부 기자가 모텔에서 독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신문사 분위기는 어수선해지만 자료부 2과(속칭 양지바른 과) 4인방 시마다 과장, 아이코, 로쿠스케, 쇼타는 평화롭다. 한 통의 밀고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 밀고 전화는 범인이 사회부 시즈타라고 밝히고, 그 이후 270통의 밀고전화가 신문사 각 부서로 쏟아진다. 그 와중 아이코는 자신과 사귀는 와시즈 타로가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데......
-> 우왕좌왕하는 양지바른과 사람들이 귀여웠다. 가장 흥미가 간 사건. 아무래도 사건이 양지바른 과 사람들과 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어지는 2편 단편의 서막.
 
* 네잎클로버
: 쇼타가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었던 인기 가수 '리리와 루루'의 리리가 살해당한다. 동시에 리리의 쌍둥이자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설이 사실로 밝혀지는데... 그 진상은?
-> '하얀 밀고'에서 시작된 아이코의 심리 복잡한 연애 얘기가 리리 살인사건보다 관심이 갔다. '하얀 밀고'처럼 직접 범인을 잡지 않아서 그런지 상당히 루즈한 느낌? 밝혀진 진실은 꽤 재미있고 어느 정도 블랙코미디 같다.
 
* 새는 발소리도 없이
: 한 여인이 로쿠스케에게 대신 전화를 걸게 시킨다. 철 뇌조의 행방을 준코라는 여대생이 알고 있다고 밀고하는 내용. 그러나 밀고한 여자가 준코라는 게 밝혀지고, 준코 자신은 철 뇌조의 행방을 모른다고 진술한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미행당하는 준코, 준코가 사는 집에서 속옷을 계속 훔쳐가는 도둑, 그러다 준코가 길에서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 아이코의 연애 3편...도 있지만 로쿠스케와 도망간 부인의 얘기도 나온다. 전편에 비해서 미스터리가 좀 복잡해진 느낌. 하지만 양지바른과 사람들의 일상이 사건보다 관심이 가는 건 여전하다. 양지바른과는 결국 해피엔딩^^ ...중년의 가을을 느끼는 시마다 과장만 빼고.
 
 
  양지바른과 사건부는 막 재미있지는 않은데, 기분전환하기 괜찮았다. 사람 성격이 유쾌하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다들 나름 귀엽다. 시대배경은 현대기는 한데 현재보다는 좀 옛날이라는 느낌...
  이 시리즈는 사건보다는 양지바른과 사람들의 일상에 더 관심이 간다. 기본적으로 양지바른과 사람들이 심각하게 개입되어 있지도 않고, 사건의 해결이 본업도 아니라서 그런 듯 하다.
 
  하지만 렌조 미키히코의 다른 글을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다. 
  
 

 
201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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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구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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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세 개 반.
  중간 부분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조금 지루했다. 장편보다는 중편이나 단편으로 갔으면 더 임팩트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 또한 범인찾기가 아닌 트릭밝히기다.
 
  줄거리.
  IT회사 사장인 마시바 요시다카가 자택에서 사망한다. 사망은 아비산 중독. 커피/ 커피찌꺼기/ 주전자에서 아비산이 검출된다. 최초 발견자는 요시다카의 애인인 와카야마 히로미이고, 유력한 용의자는 요시다키의 부인 아야네이다. 그러나 아야네는 그 때 홋카이도의 친정에 있었다. 부인의 알리바이는 완벽하고 독의 투입경로는 모호하다.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는 여형사 우쓰미 가오루의 의뢰를 받고 부인이 범행을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내는데 그게 허수해(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방법)였다!
 
  트릭은 진짜로 있음직하지 않다. 그 트릭을 쓰려면 다른 생활을 포기하고 긴 시간동안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대체 아야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언제든 요시다카를 죽일 수 있다는 만족감을 얻은 건가? 요시다카의 진심을 알았을 때 한 대 갈기고 결별하는 게 나았을 거 같은데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면서 할 만큼 그 복수가 가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확실히 많은 수다. 그래도 확실히 영리하고 끈기있는 여자다. 아야네의 행동은 처음에는 '잡히면 할 수 없지' 식의 자포자기 같았는데 보면 볼수록 '날 잡을 수는 없을 거야'의 자신감으로 보인다. 히로미에게 취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너는 내 발끝에 못 미쳐.'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어쨌든 대단히 자존심이 높아 보인다. 그래서 자신에게 상처준 요시다카를 용서할 수 없었던 걸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을 읽어보면 '완벽한 피해자'가 없다. 아야네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였다. 그 부분을 보면서 왠지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의 피해자가 떠올랐다. 애인과 옛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둘 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해서 가엾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그들을 협박했다는 뜻밖의 면을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덕분에 이번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요시다카로 말하자면 아주 교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보면 그의 연애는 항상 '양다리 시즌'이 있다. 사귀는 사람이 바뀌기 전에, 꼭 '시험 기간'처럼 전 여자와 새 여자를 사귀는 시간이 겹치는 기간이 있는 것이다. 여자보는 눈이 까다로운 만큼, '아이를 낳아줄 적당한 여자'를 찾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일까?  이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헤어진 뒤 다른 여자를 찾는 성의라도 보여야지. 자신은 리스크를 하나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하나도 없는 새끼다. 과연 아이가 생겼다고 그가 현재 애인에게 정착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든다.
 
  이 글에서 처음으로 여형사 우쓰미 가오루가 나온다. <용의자 X의 헌신>이후 구사나기와 유가와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에, 유가와를 수사에 끌어들일 방편으로 만든 캐릭터인 듯 한데 나는 얘가 참 싫다. 직감 수사 좋다. 좋은데, 너무 직감에 집착하니까 무섭다. 자기가 틀릴 거라는 생각을 한 톨도 하지 않고 있는 거 같다. 만약 그 직감이 틀렸으면?? 이번 사건은 맞았으니 다행이고, 소설이니까 아마 그녀가 가진 직감이 맞아 떨어지겠지만, 현실에서 이런 형사가 내 사건을 맡는다고 상상하면 끔찍하다. '직감이 발동하면' 우쓰미는 모든 단서를 자신이 지목한 범인에게 꿰어맞추고 싶어하는 느낌이 든다. 매우 강경하게. 그리고 여자는 운운하면서 '모두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거북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은 역시 읽으면 조금 찜찜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캐릭터보다는 사건이 두드러진다. 재미있긴 하지만 사랑스럽진 않다. 인간에 대한 경멸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할까;; 그래도 재미있으니까 읽는다. 이 책으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다 읽었다~. 
  
   


201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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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세 번째. 가장 먼저 출간됐고, 출판사가 다른 시리즈와 다르다. 내가 이 책을 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기야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을 때는 일본 추리소설도 하나도 안 읽었었지. 어쨌든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됐는지는 알 것 같다. 대체 이시가미의 수법이 뭔지, 경찰(유가와 포함)이 밝혀낼 수 있을 것인지 흥미진진하다.
 
  줄거리.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이웃에 사는 야스코 모녀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묻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는 완벽한 논리를 세워놓고 야스코 모녀에게 지침을 내린다. 공터에서 얼굴과 지문이 뭉개진 시체(나중에 도시가미로 추정된)를 발견한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야스코를 지목하지만 그녀의 알리바이는 허점이 있는 듯 하면서도 없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구사나기는 조사차 방문한 방에서 이시가미의 출신 대학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고 유가와에게 말하고, 유가와는 옛 친구 이시가미를 찾아왔다가 수상한 징후를 포착하는데.......
 
  <용의자 X의 헌신>은 이시가미와 야스코 위주로 얘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범죄극 같은 느낌을 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범인 맞추기 놀이와 탐정보다 범죄의 과정에 주목하는 것 같다. 도구, 수법 뿐만이 아니라 동기나 범인의 인간성, 성격 같은 것 말이다.
이시가미의 논리는 완벽했다. 증거가 없으니 아무리 유가와가 옳은 해답을 찾았어도 진실은 묻혔겠지. 야스코가 마지막까지 이시가미의 지시에 따랐다면 결코 '야스코 모녀의 살인'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수많은 변수가 있고, 그 변수에 이시가미의 논리는 무너졌다.
 
  선입견을 찌르는 허점이 대단하다. 트릭이 그거였을 줄은... 시간상 불가능한 알리바이가 모녀에게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미사토가 도시가미 손목을 잡아누른 자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과감한 트릭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기야 보통 사람은 쓸 수 없는 수법이기는 하다.
 
  범죄가 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면 다른 한 축은 연애일 것이다. 이시가미는 야스코를 좋아한다. 그래서 야스코 모녀를 돕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야스코는 이시가미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하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 야스코는 이시가미를 부담스러워하고, 그가 이 일을 빌미로 자신을 붙잡을까 걱정한다. 그녀는 이기적이다. 시간이 갈 수록 그녀는 '(도시가미가 없는) 본래의 삶'을 돌려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 범죄의 사실도 없고, 범죄의 은폐를 도운 이시가미도 없는 삶 말이다. 책의 뒷부분에서 그녀가 모든 것을 안 후에 구도의 청혼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이시가미도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조금 소름이 끼친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편의적으로 생각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자기합리화는 편리하지만 무섭다.
 
  그에 비해 딸 미사토는 이시가미에 대한 고마움과 부채의식, 그리고 죄책감을 보다 '정석적으로' 표현한다. '그가 우리에게 해 준 만큼 우리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랄까. 그래서 야스코가 구도를 만날 때 불편해하고, '그 사람을 배신해서는 안 될 거 같아.'와 같은 말을 한 거라고 생각한다.
 
  모녀의 태도는 다르지만 기본 발상은 비슷하다. 기브 앤 테이크. 받은 만큼 뭔가 줘야 한다는, 저 사람이 준 만큼 뭔가 받으려 할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이시가미는 야스코 모녀의 생각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말 그대로 헌신했던 것이다. 유가와가 이시가미를 가리켜 순수한 사람이라고 한 게 떠오른다. 이시가미가 어떤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여기가 아마도 감동받을 포인트겠지만 나는 메마른 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야스코의 행동이 미심쩍어서 그런지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이시가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모녀의 두 눈이 누구보다 깨끗했다고 한다. 그런 눈은 본 적이 없다고. 그러나 글에서 묘사된 모녀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양심이 있고 어느정도 세상에 찌들고....... 야스코 모녀는 자신의 기준으로 이시가미의 행동을 재단하고 판단했지만 이시가미 또한 자신의 머리 속에서 그들을 미화시킨 것 같다. 첫 눈에 반했다는 걸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을 읽으면 왜 이렇게 찜찜한지 모르겠다. 그의 세계는 가만히 보면 토머스 홉스의 세계관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 <용의자 X의 헌신>은 그걸 뛰어넘는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데, 사실 그 행동조차도 잘 파고들어서 보면 이기적이다. 노숙자는 무슨 죄일까. 미사토의 자살 시도는 왜 일어났을까. 이시가미 또한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재단한 듯 하다. 그 주축에 자기가 아니라 야스코 모녀가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 복잡해져서 이만 생각을 줄여야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을 읽은 뒤에 찜찜하든 말든, 확실히 그의 글은 재미있다. 
  
   

201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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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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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제 2탄. 

  장편인 줄 알았는데 단편집이었다. 신비한 사건을 과학적으로 풀어낸다는 기본 방침은 그대로지만 신비>과학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단편 다섯 편을 수록했다. 반전이 꽤 강하다.
 
 
  꿈에서 본 소녀
: 사카기 노부히코라는 남자가 저택에 무단침입 후 들켜서 달아나다 한 사람을 치여 죽였다. 그는 17년 전부터 저택 주인의 외동딸인 '모리사키 레이미(16세)'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운명의 연인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초대를 받아 저택에 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떻게 모리사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걸까?
-> 실험 등장 안 하고 추리만 등장. 탐문수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한 편이다. 단서는 아주 사소하다. 뭔가 음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음모의 이유가 내가 생각한 이유와 좀 달라서 놀라웠다.
 
  영을 보다
: 호소다니는 친구 고스기의 집에서 기요미의 유령을 본다. 그 시각, 기요미는 고스기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진짜 기요미의 유령을 본 걸까?
-> 연애에서 살인으로 가는 이야기. 어김없이 치정사건인 것 같지만 기요미가 언급한 '사진'이 마음에 걸려서 뭔가 있을까 짐작했는데 이런 방식이었을 줄은 몰랐다. 차근차근 생각하면 풀 수 있지만 숨겨진 단서를 찾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단서가 잡음이 나는 오디오라니!
 
  떠드는 유령
: 구사나기는 누나로부터 한 여성을 소개받는다. 그녀의 남편은 실종되었으며, 남편이 방문한 시설 근처에 있어 친해진 다카노 히데가 공교롭게도 그날 사망했다. 그녀는 다카노의 조카와 친구 부부가 그 집에 살면서 8시가 되면 항상 외출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구사나기는 그녀와 함께 잠복하다 빈집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몰래 집에 잠입한 구사나기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목격하는데......
-> 시체와 추리소설에 관한 유가와의 논평이 인상깊었다. '가장 큰 증거물은 시체'라는 범죄사회학 교수님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시체가 없으면 수사도 하지 않는다... 확실히 맹점이다.
  소설의 내용은 씁쓸했다. 돈이 뭐길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악당의 정체도 사건의 개요도 짐작한 대로지만, 폴터가이스트의 원인은 의외였다. 그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좀 신기하다. 그 타이밍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게.
 
  그녀의 알리바이
: 한 공장의 사장이 돈을 갚는다고 한 사람을 만나러 나가서 다음날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만나기로 한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그가 최근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용의자로 유력한 사람은 알리바이가 모호한 사장의 부인. 그러나 그녀는 며칠 뒤,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하는데......
-> 신비한 현상이 가장 약했던 단편. 피해자의 딸이 목격한 도깨비불이 나오는데, 그게 단서이긴 하지만 중심 의문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갈레 씨 홀로 죽다>가 생각났다. 하지만 씁쓸하고 슬펐던 갈레 씨에 비해서 이 소설은 좀 메마른 느낌을 준다. 사장의 부인이 그 계획을 과연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하기에 그녀의 행동은 매우 치밀하니까. 나도 사장 부인에게 깜빡 속았다.
 
  예지몽
: 나오키는 후배 미네무라와 부인 세이코와 있는 자리에서 애인 후유코의 협박전화를 받는다. 부인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목을 매고, 그 모습을 세 사람 다 목격한다. 통상의 자살사건으로 보이는데 이웃의 여성이 묘한 증언을 한다. 자신의 딸이 전날 밤 후유코가 자살하는 모습을 봤다는 것.
-> 끈적끈적한 치정사건. 처음에 미네무라가 세이코의 취향에 맞춰 와인을 가져왔다는 걸 보고 얘네 뭐가 있겠군 했는데 뭐가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과학을 내세워 신비한 현상을 파헤치지만, 사실 좀 오컬트를 좋아하지 않나 싶다. 신비한 현상을 부정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잘 모르니까 굳이 생각하지 말자'는 투의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번에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가 또 다른 예지몽을 얘기하면서 끝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관심이 있는 건 범인이 아니라 범행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탐정 비중이 작은 건 여전하고 범인이나 목격자 시점을 넣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정체보다 다른 걸 더 궁금하게 만든다. 이번 책은 수수께끼가 돋보였다. 갈릴레오 시리즈의 독특함(과학적 범죄/과학적 수사)은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재미났다. 일단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하는 듯. 좀 껄끄러운 구석은 없잖아 있지만.
  이걸로 갈릴레오 시리즈 2권 남았다. 
  
   

201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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