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녀가 보기에 연승은 자신과 얘기하기를 피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왜 항상 채근하고 따져 묻게 만드는 걸까. 왜 꼭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 들까. 이런 역할은 질색이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애야.

🖍52. 네가 세상에 원한을 품지않을 수 있을까. 진아는 문득 생각했다. 눈길을 피하는 연승의 얼굴,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 때면 입꼬리를 어색하게 씰룩이는 표정이 눈앞에 떠올랐다. 네가 일그러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건 정말슬픈 일일 거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54. 어디를 둘러봐도 젊음과 시작으로 가득했고, 그녀는 자신만만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가오는 것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낯선 장소에서 추위에 떨며 기억을 되짚었다.

🖍191. "이거 뭐야? 어떻게 하는 거야?"
루미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한다.
"그게,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해."
나는 이게 정말 중대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걸 뒤집으면 모든 게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294. 좋아하는 작가와 책들에 대해, 서로의 글에 대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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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157. 파블로는 결국 하와이처럼 생긴 섬에 도착해. 햇빛이 눈부 시게 쏟아지고 파란 바다 앞에 모래사장이 있고 야자수가 있 고 거북이가 다녀. 마지막 장면이 이래. 파블로가 선글라스를 쓰고 야자수 사이에 해먹을 쳐서 그 위에 누워 있는 거야. 음료수를 마시고 부채를 부치면서. 그 아래 이런 멋진 글귀가 있었어.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159.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안 좋은 점은, 일단 걔랑 있으면 내가 너무 슬퍼질 거 같더라.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가 없다는 거. 전업주부가 아니라 내가 직장이 있어도 경제적 으로 독립하긴 어려울 거 같더라고. 전에 한번은 지명이한테
"너는 왜 매일 퇴근이 늦냐, 평생 그렇게 야근을 해야 하는거냐?" 하고 따지니까 걔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있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
"호주에선 안 그래."
내가 반박했지.
"호주에서도 그럴걸. 너도 호주에서 제대로 된 사무직 일 은 해 본 적 없잖아. 호주에서도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은 정신없이 바쁠걸?"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160.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178. "[...]어차피 여기서도 알바를 해야 하잖아요? 호주에서 낮에 물리치료사나 제빵사 같은 걸 하면…….."
"내가 이미 얘들한테 입이 닳도록 권했어. 오기 싫대."
내가 재인의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어.
"오기 싫다고? 왜?"
재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더라.
"조금만 더…… 한국에서 조금만 더 해 보고요."
예나의 남자 친구가 꼬인 혀로 말하더라.

187. 난 이제 "해브 어 나이스 데이."가 어떤 때에는 냉소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걸 알아. 미국에서 점원들이 주로 쓰는 인사라 영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이 말이 좀 웃긴다고 여기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날부터 이 인사를 좋아하게 됐어. 그날그날의 현금흐름성 행복을 강조하는 말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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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들이 좇는 길, 새롭게 눈뜬 가치, 전망, 욕망, 야망, 이 모든 것이 종종 어쩌지 못할 만큼 공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태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삶, 암울함 이상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무엇인가 입을 무한히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45. 그곳에서 싼값에 주석 제품들을 구하고, 짚으로 짠 의자, 술잔, 뿔 손잡이가 달린 칼, 그들이 애지중지할 재떨이로 쓸 녹청 낀 그릇을 샀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이 확신컨대 《엑스프레스》가 언급했거나 앞으로 언급할 물건들이었다.

47.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이 법에 전적으로순응하고 있었다.

61.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꿈은 여지없이 깨졌다. 매일저녁, 만원인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은 불만투성이였다. 씻지도 않고 멍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간이침대에 쓰러졌다. 오직 긴 주말과 빈둥거릴 수 있는 날, 여유로운 아침만을 꿈꾸게 되었다. 덫에 걸린 쥐처럼 사방이 막힌 듯했다. 그들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다.

98. 더 이상 전체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동떨어진 그림으로, 흠 없는 총체가 아니라 조각난 파편으로,
모든 이미지들이 저 멀리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나타나자마자 스러져버리는 암시적이고 환영에 찬 반짝임처럼,
먼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가장 걸맞지 않은 욕망의 우스꽝스러운 투사, 손에 잡히지 않는 희미한 빛의 반짝!
임,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꿈의 조각에 불과한 것 같았다.

79. 조기 퇴직, 휴가 연장, 무료 점심, 주당 30시간 근로를 우습게여겼다. 그들은 그 이상의 여유를 원했다. 클레망 디스크 플레이어, 그들만을 위한 백사장, 세계 일주, 화려한 호텔을 꿈꿨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106.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 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114.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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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우리에게 제공한 혜택은 셀 수 없고, 과학의 발명과 발견이 가져온생산력으로 얻게 된 온갖 풍요로움은 비할 데 없다.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고자 인간이 만든 경이로운 창작품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수정처럼 맑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삶이라는 샘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노동에 시달리며 이를 좇는 사람들의 목마른 입술에는 여전히 아득히 멀다.
맬컴 로리

166. 더 나아가 법의학자로서 우리 사회에 죽음을 숙고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그래야 우리들 삶이 행복해지겠다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갖 게 된 것이다.

어떤 죽음은그 죽음으로써 사회적인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의 문화적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살인 사건에서의 죽음또한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드러내면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질문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I see it now. This world is swiftly passing!
이제야 깨달았도다. 생이 이렇게 짧은 줄을!!
예전에 영문으로 된 『마하바라타』를 읽었었는데 당시이 대목에서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었다. 카르나라는 인물
‘이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한탄하는 데서는 비장미와 숭고미가 함께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237. 심리적 정리 또한 필요하다. 죽기 전에는 대부분 누구나한한 고립감에 빠지게 된다. 사실 죽음을 인정하고 수용해서 승화하는 단계까지 가면 좋지만 인정조차도 제대로못 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의 현실이지 않나 싶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왜 죽음 이야기를 읽고 있는

266. 카르페 디엠 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앞서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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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여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127. 사람은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심에서나온 것이라 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고 두 배나 더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말없는 공감이 제일입니다.

151. 훨씬 덜 아름답고 덜 효과적이지. 독자는 쉽게 남을 믿는 한나를, 또한 자기 자신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하나를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할 거야.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게 나는 싫어.

208.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를 이렇게 내모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자문해 보아도 모르겠는 거야. 그리고 그건 바로 너 자신이야, 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말일 뿐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거야. 그럴 것이, 나 자신은 오로지행복을 원하며 행복에서 쫓겨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 마찬가지로, 이것은 너의 운명이야, 라고 대답하면 역시 말일 뿐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거야. 그럴것이, 이 운명은 누가 만드는데? 나 자신이잖아. 그러면 왜? 이렇게 의문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되는 거야.

209. 그런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행복해진다면 너는 글을 쓸 수 있겠니? 나를 봐. 나는 비교적 행복한 편이야. 내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신문 기사. 그래, 그게 전부야. 그리고 내가 어떤 다른 글을 시도해 보면 겉만 맴돌 뿐 아무도 거기서 감동을 느끼지 못해. 너는 글을 쓸 수 있어. 그리고 대신 돈을 현금으로 지불받고 있는 거야. 이건 너도 알고 있잖아. 너는 많은것을 지불하고 많은 것을 얻고, 나는 거의 아무것도 지불하지않고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공평하지 않아?

320. 당신은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만큼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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