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157. 파블로는 결국 하와이처럼 생긴 섬에 도착해. 햇빛이 눈부 시게 쏟아지고 파란 바다 앞에 모래사장이 있고 야자수가 있 고 거북이가 다녀. 마지막 장면이 이래. 파블로가 선글라스를 쓰고 야자수 사이에 해먹을 쳐서 그 위에 누워 있는 거야. 음료수를 마시고 부채를 부치면서. 그 아래 이런 멋진 글귀가 있었어.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159.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안 좋은 점은, 일단 걔랑 있으면 내가 너무 슬퍼질 거 같더라.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가 없다는 거. 전업주부가 아니라 내가 직장이 있어도 경제적 으로 독립하긴 어려울 거 같더라고. 전에 한번은 지명이한테 "너는 왜 매일 퇴근이 늦냐, 평생 그렇게 야근을 해야 하는거냐?" 하고 따지니까 걔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있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 "호주에선 안 그래." 내가 반박했지. "호주에서도 그럴걸. 너도 호주에서 제대로 된 사무직 일 은 해 본 적 없잖아. 호주에서도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은 정신없이 바쁠걸?"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160.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178. "[...]어차피 여기서도 알바를 해야 하잖아요? 호주에서 낮에 물리치료사나 제빵사 같은 걸 하면…….." "내가 이미 얘들한테 입이 닳도록 권했어. 오기 싫대." 내가 재인의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어. "오기 싫다고? 왜?" 재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더라. "조금만 더…… 한국에서 조금만 더 해 보고요." 예나의 남자 친구가 꼬인 혀로 말하더라.
187. 난 이제 "해브 어 나이스 데이."가 어떤 때에는 냉소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걸 알아. 미국에서 점원들이 주로 쓰는 인사라 영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이 말이 좀 웃긴다고 여기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날부터 이 인사를 좋아하게 됐어. 그날그날의 현금흐름성 행복을 강조하는 말 같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