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건강한 발전을 이룩하고 있던 한반도는 조선 중기 이후 의미 없는 사상논쟁과 정치싸움으로 수렴한 끝에, 점차 세계정세에 무감각해지고 사회발전에 뒤쳐지게 되었다. 조선 말기, 나름대로의 정치력을 발휘했던 흥선대원군은 이미 뒤쳐진 사회와 혼란한 시국 속에 한동안 문호를 걸어잠구는 수를 둘 수 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그 끝은 조선이 강제로 개항을 당하고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결말로 나타난다.
개항을 요구하는 프랑스와 미국, 일본의 함선이 찾아와 차례로 충돌을 일으키는데, 이때 조선은 생각보다 열악했고 동시에 또 생각보다는 갖춰져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명량>을 보면, 배의 하부에서 수많은 장정들이 수동으로 노를 저어 배를 이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조선 말, 서양의 대형 배들은 이미 한참전에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겪고 자동화된 엔진을 장착하였는데, 아직도 조선배들은 단체로 노를 젓는 몇백년 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임진왜란 이후 그 영향으로 조총이 도입되어 조선에서도 총이 쓰였기에, 조선 말 외세와의 병력 대치가 헐벗고 창을 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학살당하던 그 수준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물론 세계의 흐름에 한참 뒤쳐진 구식 장비였기에 여러모로 상대가 안되었다.
오랜 시간 정체하다 못해 퇴행한 사회였던 조선이 결국 오욕의 세월로 향하는 본격적 단추를 끼우게 되는 계기가 일본과의 강화도 불평등 조약이다. 그 중심에는 서양에 먼저 문호를 개방당했지만 늦게나마 부랴부랴 사회 발전을 이끌어낸 일본이 가져온 서양식 함선 운요호가 있었다. 운요호는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을 장착하였다. 석탄은 영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며, 또 그만큼 활용한 결과 영국을 한때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역사 속 전쟁에 기술의 발전이 드러나고, 또 그 속에는 화학이 있다.
<속절없이 빠져드는 화학전쟁사>는 우리 역사 속 전쟁장면에서 드러나는 화학을 이야기한다. 생각보다 역사 파트가 본격적이기에, 한국사에 화학 요소가 양념처럼 뿌려져 있는 책이라 보면 될듯. 책의 분량이 짧아 가볍게 보기엔 좋으나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삼국시대 말기, 후삼국-고려, 고려말-조선, 조선 말기의 네 파트의 한 장면들을 다루기에, 흥미롭게 책을 읽다가 금방 끝나는 느낌이다. 좀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주제를 담은 증보판이 나오면 좋을듯.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 드러나는 화학전도 흥미롭지만, 과학의 발전을 주도하여 전쟁을 빠르게 현대화시켜나간 서양 전쟁에서의 화학전이 정말 화학전의 역사가 아닐까. 이 책이 화학전쟁사라는 새로운 테마를 발굴하는 시작이 되어 앞으로 더 장대한 기획을 거친 대작을 완성시켜주길 바라 본다.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