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철학 및 문화관 프란시스 쉐퍼 전집 1
프란시스 쉐퍼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란시스 쉐퍼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생명의 말씀사의 전집의 1권인 '기독교 철학 및 문화관'을 통해 읽었다. 총 4권을 모은 책으로서 2권 "이성에서의 도피", 3권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4권 "다시 자유와 존엄으로"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전집을 읽게 된 것은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를 거의 읽은 후 수립한 독서 계획에 여러 기독교 고전과 함께 쉐퍼의 책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시절 읽었던 "이성에서의 도피"는 가장 핵심적인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4권이 50 페이지 정도로 짧고, 2권과 3권이 100 페이지 정도의 작은 책인데 비해, 이번에 읽은 1권은 280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현대 철학과 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을 담기 위해 저자는 고민하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 기독교와 복음주의 신앙을 바르게 재정립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2권인 '이성에서의 도피'는 조금은 어렵지만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총 6부로 이루어진 내용은 앞의 3부에서 기독교 신앙과 세상의 절대적 기준에 대해 명확히 논하고 있다. 현대인은 '절망선'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여기서는 '영성'이란 말 자체도 기독교 영성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 현대 신비주의가 이런 부류이다. 고전적 반정립의 방법론에서 벗어나 진리 개념을 바꿈으로서 현대인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절대 기준과 반정립이 없어진 사고 형식을 따라 실용적 상대주의에 도달했다. 이런 내용에 대해 아래에서 다시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이분법의 현상이 발생한 것은 철학자 헤겔을 지나면서 부터이다. 이후 키에르케르고를 거쳐 세속적 실존주의와 종교적 실존주의로 나뉘게 된다. 이성으로는 종합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기에 합리적인 것과 신앙은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한다. 즉 신앙을 일종의 도약으로 보는 현대적 개념이 나왔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무언가 비이성적인 현상이 아니라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 신비적 체험이 따르지만, 신비주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런 현상을 이용한다.)

 

이러한 현재의 신비주의는 '절망을 넘어선 절망'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절망에 빠진 현대인에게 더욱 큰 절망을 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현대인의 절망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분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을 자연과 은총로 나누고 이의 단절로 보는 것이다. 신앙과 합리적인 것이 나뉘었기에 인간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신앙을 가지면 합리적일 수 없고, 합리적이면 신앙의 신비를 가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둘을 합칠 수 없기에, 합치려 하지 않기에 "반항하는 인간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 신앙은 합리적이다. "모든 반정립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절망선 아래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은 성경적 신학을 택하거나 철학자들이 택한 합리주의였다. 하지만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신앙이라는 상층부를 체험할 수 없었던 철학자들은 어떤 비합리적 도약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이는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적" 신학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성경관의 차이가 아니라 잘못된 진리관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현대인의 절망을 자세히 살펴보면, (1) 가장 단순한 현대의 허무주의가 있다. (2)단계로는 앞에서 언급한 이분법을 수용하는 허무이다. (3) 현대 사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절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이분법의 한 수준에 머무를 수 없었던 결과로 절망의 세번째 수준"으로 나아간다. "즉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신비주의의 수준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정리하면,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기 때문에 허무주의로 빠지거나, 이분법을 받아들여 합리적으로만 살거나, 신비주의 도약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약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절망을 넘어선 절망을 현대인에게 준다. 합리적인 사고가 없이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상층부에서 활동하려 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합리적이고 지적인 것을 포함한 전임(全人)에 관심을 두는 살아있는 신앙"이 아니다.

 

 

 

"현대인은 과거의 철학자들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도약"을 받아들여, 다음의 세가지 절망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1. 단순한 허무주의.

2. 절대적 이분법의 수용.

3. 내포적 단어에 근거를 둔 의미론적 신비주의."

 

현대 철학의 이분법 사고를 넘어서 나타나는 신비주의는 다음과 같은 현상을 가진다.

"거의 모든 형태의 새로운 신비주의는 범신론의 이념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언어에 나타난 신비주의 - 하이데거 : 이 신비주의는 언어에 담긴 내용을 다루지 아니하고 단순히 언어 자체를 다루려 하므로 의미론적 신비주의이다. 말하고 있는 사람은 비인격적인 "무엇"(존재)의 대변자가 된다. 비인격적이고 알려지지 않은 존재는 말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존재, 즉 인간을 통하여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믿음의 대상이 계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자연과 은총에 관련된 투쟁은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하나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투쟁이다."

"현대인은 자연과 은총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통일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포기해 버렸다."

"기독교에서 신앙의 가치는 이 신앙이 향해있는 대상에 의존한다. 그래서 이 신앙은 밖으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역사 속에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속죄 사역을 완성하시고 다시 시공간에서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이런 대상이 있으므로 기독교 신앙은 토론과 검증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검증할 수 있는 사실과 인식'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의 말을 가져와 본다.

"우리 시대가 '종교적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역사와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언어로 표현된 형식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이 명제를 통하여 인간과 의사소통하신다는 사실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 지식의 영역에는 통일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지식의 영역에 대하여 진리를 말씀하였으므로 여기에 통일성이 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내가 외부 세계에 만들어 둔 진리에 대하여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외부 우주에 있는 유한한 인간은 유한하므로 자신으로부터 절대적이며 자율적으로 시작한다면 충분한 준거점(reference point)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다. 과학자는 이 지식을 마음에 두고서 자신이 탐구하는 진지를 그 궁극적인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연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연구를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거하게 하신 우주에서 적절하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거기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며, 동료 인간의 지식 창고에 지식을 더하고 있다.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성경적 기독교인은 위의 그림과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본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은, 인격성의 측면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빠짐없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참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한자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닫혀 있지 않다."

 

 

책의 앞부분을 위주로 요약정리하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전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전도를 해야하는 이유와 함께 잘못된 전도는 대상자를 더욱 큰 절망으로 넣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에는 진리를 몰랐기에 오히려 편안했던 현실이 상황을 파악하면서 알아차리게 되었고 슬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전도를 하게 되면 단순히 선포에 그치는 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를 사랑하면서 인격적으로 빠져나올 길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많은 전도에서 단순히 믿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신앙을 설명함으로서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바울이 감옥에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구절을 보면, 이미 간수는 모든 바울의 설교를 들었고 여러 상황을 이미 보았다. 그렇기에 지진이 나고 자살하려던 상황에서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자 바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라고 질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순히 믿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독교인으로 딜레마는 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은 전도자를 볼때 생기곤 했다. 저렇게 전도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했기에 불편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처럼 신앙을 실천하는 모습도 아니기에 부끄럽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 것은 그런 전도는 지금 시대에 하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평양에서 하던 전도법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기독교인의 생활과 여러 소식으로 이미 관계적이며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설명이 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면 이미 받아들일 토양이 갖추어졌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대와 같은 불확실하고 범신론적 신비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먼저 합리적인 설명이 우선되어야 하겠다는 사실이다. 그가 처한 근본적 불안에 대해 합리적이며 관계적이며 인격적인  구원이 있다는 것을 먼저 설명해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