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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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올해로 출간된 지 10년을 맞은 작품인데 근래 리커버가 나올 정도로 아직 인기가 많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식인 행위가 등장한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는데, 도서관에 들렀다 아직도 대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읽어보게 되었다.

오래되기도 했고 인기도 많은 작품이기에 스포일러 걱정 없이 줄거리와 감상을 섞어보려 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작품은 '구'와 '담'이라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태초부터 반으로 나뉘었던 두 톱니바퀴가 서로를 찾듯이 외롭게 세상에 내던져진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본능처럼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부모도 모른 채 할아버지와 살던 담은 할아버지 사후 누군지도 몰랐던 이모와 함께 살게 되고, 구는 부모가 사채까지 박박 긁어 빚을 내버린 탓에 어릴 때부터 언제 어떻게 썼는지도 모를 빚을 안고 살게 된다.

서로의 반쪽을 굉장히 어린 나이에 찾았지만,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온전하게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꿈을 꾸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혹독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은 역시나 누군가의 죽음이다.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이고 담과 구 모두 주변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어릴 적부터 외로움에 방치되다시피 한 인물들임에도 그들은 아프고 쓰린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담은 시작부터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고, 자신을 희생해 담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이모도 떠나보낸다.

구는 작품 시작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에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또한 담과 구는 함께 지내던 한 소년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타인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작품 초반부터 죽음이 예고된 구와 구의 시신을 마주한 담에게 죽음이란 곧 존재 자체의 부정과도 같았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지만, 사회 밑바닥을 전전했던 구는 이름은커녕 그의 가죽조차 돈으로 바꿔 먹을 사람들이 있기에 남길 것이 전혀 없었다.

가진 건 몸뚱이 하나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부모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었고, 돈을 빌려준 자들 입에서도 나온 말이었다.

몸뚱이... 몸은 인격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는 고기, 사람이라는 물건, 사람이라는 도구.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영혼 값은 달랐다.

돈 없는 자의 영혼을 깎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pg 152)

작품의 제목인 '구의 증명'은 바로 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의 짧지만 처절했던 삶을 증명하는 것은 그가 남긴 육신뿐인데,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아는 담에게 구의 시신은 태워 없앨 수도, 묻어 썩게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담은 자신이 더 살아감으로써 구의 존재를 스스로와 세상에 증명하고자 구의 시신을 자신의 육체에 결합하려 한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서의 섭취 행위는 단순히 시신을 감추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에게 행하는 약속이나 의식과 같은 행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마찬가지로 밑바닥을 전전한 담에게는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일지 모른다.

특히 이모를 화장하면서 느꼈던 담의 감정은 이후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모 몸을 태우는데, 이모의 몸이 그렇게 사라지는 게 무서웠다.

고통에 시달리다 죽은 이모의 몸을 다시 불속에 밀어 넣기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모의 몸과 같이 살고 싶었다.

영혼이 없으면 어떤가. 몸이 내 옆에 있는데.

몸이 거기 있으면 분명 다 듣고 보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pg 129)

이러한 담의 소망을 담아 작품 내에서도 육신을 잃은 구의 독백이 등장한다.

물론 유물론자로서 신체와 영혼이 구분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즉 내가 영원히 경험해 보지 못할 삶의 형태를 대변해 준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설정이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가슴이 시릴 정도의 감정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소재도 그렇고 줄거리도 그렇고 꽤나 난해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의외로 필체가 간결해서 술술 넘어가는 편이었다.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인데도 꽤 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아직까지 인기가 있는지 저자의 문장과 이야기가 가진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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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독서평설(12개월 정기구독)
지학사(월간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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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만화만 잘 읽던 아이에게 줄글 읽기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었는데, 개인적으로 효과가 가장 좋지 않았나 싶은 것이 바로 독서평설이다.

처음에는 앞에 놔줘도 시큰둥했었는데 요즘은 새로운 편이 나왔다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여주니 권해주는 마음도 좋다.



이번 10월 호에도 여러 재미난 글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표지와 연관된 주제는 바로 게임이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게임을 30년 이상 즐겨온 게이머이기도 하고 주말에는 온 가족이 게임기 한 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정을 꾸리고 있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게임에 현질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주제로 찬반 토론을 벌이는 코너가 하나 있고, 게임 중독을 다룬 기사가 하나 수록되어 있다.

두 주제가 게임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얼핏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두 가지가 사실 굉장히 큰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독성이 심한 게임이 모두 현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현질이 필요한 게임은 대체로 중독성이 심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이런 부분을 잘 알려주고 있기도 하지만, 게이머로서도 게임기나 게임 타이틀 구매 외에 게임에 현금을 쏟아붓게 되면 아이건 어른이건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꽤 많은 부분 저당잡힐 수 있으니 반드시 주의하기를 바란다.

그 외에도 시작을 여는 독일 통일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캘리그래피 작가에 대한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월간지 답에 시사에 대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있는데, 특히 이번 호에는 큰 문제가 되었던 강릉시의 물 부족 사태도 다루고, 이재명 정부가 주도하는 정부 조직 개편안에 대한 소개도 수록되어 있어서 초등학생을 위한 잡지지만 담긴 정보의 수준만큼은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콘텐츠들의 퀄리티도 좋고 아이도 잘 보니 부모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권해주게 된다.

월간지인만큼 다음 호에는 어떤 재미난 정보가 수록되어 있을지 계속해서 기대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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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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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도서관 대출

읽을 땐 재미있는데 읽고 나면 금방 휘발되는 것 같아 요즘 조금 등한시했던 저자인데, 최근에 나온 이 작품은 인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길래 더 늦기 전에 읽어보게 되었다.

역시나 범죄가 일어나고 이를 해결하는 '고다이 쓰토무'라는 형사가 등장한다.

저자의 다른 작품에 나왔었다고 하는데 본격적인 활약은 이번 작품이 처음이라고 한다.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핵심인 작품이므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라 줄거리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저자의 기존 범죄물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는 점만 언급하고 싶다.

저자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독자들이 찾아내야 하는 진상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사건에 담긴 트릭의 비밀, 진범의 정체 혹은 사건을 일으킨 동기를 찾아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찾아야만 한다.

사건 자체도 위장되어 있고, 의심스러운 사람도 비교적 일찍 발견되나 진범이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아쉬우며 범행의 동기는 후반부까지도 베일에 감춰져 있다.

저자가 준 힌트이므로 하나만 언급하면, 책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를 고민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 읽고서는 역시 저자의 스토리텔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지만 주말 내 다 읽었을 정도로 상당한 재미를 준다.

게다가 진상에 접근하는 과정이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겹겹이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저자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빠른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또한 이번 작품에서 활약하는 형사 캐릭터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기존에 인기를 끌었던 그의 작품 속 형사 내지는 탐정들이 남들과는 다른, 유별나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면 이 작품 속 형사는 그저 조금 더 성실하고 살짝 더 똑똑한 정도의 캐릭터로 묘사된다.

주변 다른 경찰들도 꽤 유능해서 도움도 많이 받는 편이고 핵심적인 정보들도 형사의 특출난 직관이나 추리보다는 각 인물들의 증언과 정황에서 나온다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나면 꽤나 충격적인 스토리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자체가 너무 강력한 스포일러라 남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어쨌든 모든 인간관계가 '호불호'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 가능한 내 입장에서는 이 정도로 복잡한 인간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저자의 상상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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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 - 양자 역학부터 양자 컴퓨터 까지 처음 만나는 세계 시리즈 1
채은미 지음 / 북플레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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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유튜브 영상을 통해 먼저 접했다.

어려운 양자 컴퓨터 관련 내용을 편안한 말솜씨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 과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 교양서를 냈다는 소식에 바로 읽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양자역학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었던 경험에 비추어 이 책만의 특징을 찾자면, 이 책은 이론에 대한 설명보다는 양자역학이 어떻게 우리 삶을 바꿔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즉 양자의 입자성과 파동성, 중첩과 같이 양자역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이론적인 설명은 초반에만 짧게 이뤄지고 이어서 이러한 양자역학이 실생활에 적용된 여러 사례들이 등장한다.

양자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듯이 양자역학의 활용도 양자의 입자성을 이용하는 방법과 파동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원자가 방출하는 빛의 진동 수를 측정함으로써 매우 정확한 시계를 만들 수 있고 이 시계가 곧 우리가 매일 쓰는 GPS의 근간이 된다거나 이제는 길거리나 자동차에도 많이 쓰이는 LED와 같은 기술들은 양자의 입자성을 활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초기에는 비교적 제어가 용이한 양자의 입자성을 활용한 기술들의 발전이 두드러졌다면 최근 여러 국가와 기업에서 사활을 걸고 만들고 있는 양자 컴퓨터는 양자의 파동성을 활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현재 양자 컴퓨터의 개발은 대체로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각 기업마다 큐비트를 만드는 방식부터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각 방식마다 현재 어느 수준으로 발전이 되어 있고, 각각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특정한 방식이 분야를 주도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있고 각각의 장단점이 명확하기 때문에 장점을 강화하면서 단점을 극복할 방법들을 찾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여하간 양자 컴퓨터가 고전 컴퓨터에 비해 특정 문제들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은 기대하는 만큼의 성능을 뽑아낼 기술력을 갖춘 곳은 없는 것 같다.

저자는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를 고려해 볼 때 대략 2030년대가 되면 꽤 경쟁력 있는 양자 컴퓨터가 등장하리라 전망하고 있다.

양자 컴퓨터가 특히 소인수분해 문제와 최적화 문제에 강점을 가진다는 점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러한 강점이 어떤 분야에 응용될 수 있는지는 잘 몰랐다.

책 후반부에 이러한 강점들이 잘 활용될 수 있는 분야로 금융, 물류, 제약, 인공지능 등의 분야가 소개되어 있어 이러한 궁금증을 꽤 해소할 수 있었다.

양자역학을 다루는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쉽기만 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 역시 초반의 이론적인 부분은 여타의 양자역학 교양서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준으로 쉬운 편이지만, 양자 컴퓨터의 제작 방식부터는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사실 고전 컴퓨터를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양자 컴퓨터의 제작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도 초창기에는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조금만 배우면 쓸 수 있는 것처럼, 양자 컴퓨터도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도 활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발전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 인류가 도전하고 있는 양자 컴퓨터의 모습이 어떤지를 맛보기에는 충분한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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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섬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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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호러'가 아닌 '테러'라는 키워드로 섬뜩한 상상력을 잘 보여주었던 단편집 '인형의 주인' 이후 두 번째 접하는 저자의 책이다.

지금까지 천 편이 넘는 단편을 쓴 저자의 이력답게 이번 책 역시 단편집으로 총 열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음산한 느낌의 표지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번 책에 수록된 작품들도 음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단편들이니만큼 공통된 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다 읽고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뒤틀린) 관계'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싶었다.

수록작들 모두가 어딘가 굉장히 뒤틀려있는 형태의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제로섬'은 흠모하던 교수의 집에 초대받은 한 대학원생의 이야기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결실인 교수의 아이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안긴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이런 식으로 뒤틀린 애정이 향한 희생양들의 멘탈을 털어 버리는 결말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인지 이어서 수록된 '상사병'이나 '참새' 등의 작품에서도 인물들이 정신적으로 고통받게 되는 결말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작품인 '끈적끈적 아저씨'는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아들이 성 노예로 팔려 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소녀들이 잠재 고객들을 소탕(?!) 한다는 내용인데 잔인함의 수위가 상당히 세다.

충격적인 장면들을 통해 뒤틀린 정의감과 이를 공유하는 우정의 위태로운 모습도, 훗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정을 꾸려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양면성이 가지는 섬뜩함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록작들이 대체로 50페이지 미만인데, 중반에 수록된 '자살자'는 80페이지 정도로 다른 작품들보다 길다.

이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자살 시도를 하는 남편을 맹목적으로 돌보는 아내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속 아내와 '한기' 및 '베이비 모니터'에 등장하는 엄마의 심리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자식이나 남편 모두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임에는 분명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파괴할 정도의 맹목적인 애정이라면 그건 더 이상 애정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라면 그 애정 때문에 어느 한 쪽이 힘들어하는 결과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면, 심지어 상대가 그러한 희생을 원한 것도 아니라면, 그 희생은 솔직히 스스로가 희생하는 자신에게 중독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모든 중독은 적절한 치료의 대상이지 결코 애정의 결과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수록된 세 작품은 앞의 작품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 작품 모두 SF 소설 속 디스토피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인데 마치 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간 순서로 연이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첫 작품에서는 뇌를 파먹는 아메바가 등장한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세계가 멸망해가는 가운데, 타인과의 연결이 부재한 개인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에서는 인류의 마지막 개체의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서로 연관성도 있고 각각의 길이도 짧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저자인 만큼 기본적으로 모든 작품들이 읽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중반의 '자살자'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뒤로 갈수록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고, 특히 마지막 세 작품은 SF를 좋아하는 개인 취향에도 잘 맞아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단편만 천 편을 쓴 저자라 하니 앞으로도 저자의 주옥같은 단편들이 더 나와줄 것 같아서 앞으로 국내에 어떤 작품들이 소개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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