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년 촛불 - 3.1혁명부터 촛불혁명까지
손석춘 지음 / 다섯수레 / 2019년 3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무릇 직필은 어렵다.
권력이나 자본이 가만두지 않는다.
직필은 '사주'라고 불리는 언론자본과 고위간부들이 통제하며 때로는 이해당사자들이 덤벼들고 '몽매한 세론의 비난'까지 따른다.
반면에 곡필은 쓰기 쉽다.
권력과 자본이 비호해준다. 권력이 제안하는 고위 관직이나 자본이 제공하는 고액 연봉 자리로 언제든지 옮겨갈 수 있다.
그래서다. 송건호는 힘주어 썼다. "곡필은 하늘이 죽이고 직립은 사람이 죽인다." (pg 510)
'손석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학 시절이 생각난다.
'신문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되었다.
이후에 '유령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의 문학 작품에도 발을 들였었다.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그때는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버릇을 들이기도 전이라 '마르크스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나진 않지만 여하간 그의 비소설보다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들으니 다시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생겨났다.
100년 촛불.
단순한 제목이지만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제목이다.
왜 하필 지금 시점에서의 100년인가?
3.1혁명이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촛불인가?
지금 이 정부를 만든 힘이 촛불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약 700페이지 정도로 처음 받아보면 '어우, 두꺼운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3부로 나눠져 있어서 부제를 읽고 처음에는 대충 1부가 3.1운동(읽기 전엔 운동이라고 생각했으니),
2부가 4.19혁명, 3부가 촛불혁명 이야기인가보다 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혁명적인 사건 그 자체 보다는 10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을
치열하게 살았던 개개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1부는 의암 손병희 선생, 2부는 단재 신채호 선생, 3부는 청암 송건호 선생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특이하게도 세대를 이어가며 위 세 인물의 주변에서 역사의 흐름을 함께하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의암의 곁에는 최바우가, 단재의 곁에는 최사인이, 청암의 곁에는 한민주라는 인물이 있다.
최바우의 아들이 최사인이고 그의 외증손자가 한민주이다.
역사적 팩트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 가상의 인물들이 걸출한 세 명의 위인을 곁에서 관찰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인물들이 굳이 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100년의 역사를 한 책에 묶으려다보니 아무래도 의암, 단재, 청암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설명은 간략히 넘어가는 측면이 많은데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 속에 픽션을 넣어야 하니 가상의 인물들이 큰 업적을 세우는 역할로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들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유추해보았다.
작가는 그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걸출한 업적을 남겨 후대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 말고도
이들을 따르며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이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걸출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계층이나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살다보니 어떤 계기를 접하게
되고 그 계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은 물론, 역사를 바꾸는 흐름에 동참하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허구의 인물이 실제의 인물 속에 섞여있다보니 읽으면서 검색할 일이 꽤 많다.
역사 전공이 아니라면 장담컨데 평소 독립운동가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르는 인물이 꽤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인물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검색해보게 되는데, 실제 인물이라면 바로 사진이 뜨니 읽어가면서 생동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물론 실제의 인물이기 때문에 어떤 여성 독립운동가를 검색하면 '누구의 배우자'라고 뜨는 등 의도치않은 스포(?!)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허구의 인물들 역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이 소설 3부에 등장하는 한민주나 2부에서 악질 친일경찰로 등장하는 박병도라는 인물은 작가의 다른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작품들에서도 한민주는 기자로, 박병도는 친일 경찰로 등장한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손석춘 유니버스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소설은 모두 이렇게 역사에 허구를 가미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던데 모든 작품들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현상이라면 이를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 자체가 조금 두껍기도 하고 생소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서 금새 읽을 수 있는 책은 분명 아니었다.
또한 손석춘 책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 외에도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순 한국어가 많이 등장해서 휴대폰을 곁에 두지 않고서는 진도가 잘 안나가는 책이기도 하다.
일례로 '부부'라는 말 대신 '가시버시'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평소에 잘 쓰이지 않는 말이므로 찾아서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점들이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서 누구에게나 흔쾌히 추천해 주고픈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 속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예를 들어 김상옥 선생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보면 보통은 아래와 같이 사실들만 무미건조하게 나열된다.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검거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를 거행하였고, 수백 명의 일경과 홀로 대치한 상황 속에서 자결 순국을 택하였다.
(출처: 네이버캐스트,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062&cid=59011&categoryId=59011)
위에 등장하는 사건을 소설에서는 아래처럼 표현하고 있다.
김상옥도 총을 여러 발 맞았다. 최선을 다해 싸워 총알이 하나 남았다.
문득 어머니가 눈에 선했지만 결연히 마음을 다진 김상옥은 벽에 기댄 채 총을 머리에 대고 겹겹이 포위한 일경들이
모두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방아쇠를 당겼다. 담벼락 아래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쓰러진 김상옥의 두 손은 권총을 꼭 쥐고 있었기에 멀리서 이를 발견한 일본 경찰은 행여 살아있을까 싶어 누구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일제 경찰은 야비했다. 끌고 온 김상옥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했다.
휘청거리면서도 서둘러 다가간 어머니는 쓰러지듯 털썩 주저얹아 피투성이 아들의 몸을 품에 꼭 안고 오열했다. (pg 315)
장면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 하면서 순간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요즘은 검색만 하면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바로 뜨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목숨을 바쳐 투쟁했던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주된 스토리는 위에서 소개한 3명의 위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최근 100년사를 정리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유관순,
윤봉길, 전태일 등 수많은 위인들의 업적도 짧지만 강한 인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가혹하게 도륙한 친일 및 반민주, 군부독재 세력들의 악행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책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작가는 이렇게도 많은 인물들 가운데 의암 손병희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청암 송건호 선생에 특히 주목했던 것일까?
내 나름대로 내린 답은 작가가 쓴 아래 문단들에 숨어 있다고 보았다.
민중은 단순히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낼 주체가 아니다. 자유, 평등, 평화로운 사회를 구현해갈 주체이다.
최사인은 소소와 단재 모두 정치적 주체성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성을 중시했고 그 사상적 귀결점이 민중 직접혁명이라고 이해했으며,
조선혁명이 담당한 세계사적 과제는 자본주의의 상공인 계급 지배도 공산주의의 공산당 지배도 넘어선 새로운 혁명이라고 확신했다.
(pg 384)
해방공간에서 청년 송건호는 정치의식이 없었다. 훗날 그때를 회고하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언론의 본성에 성실한 언론인으로 살아오며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을 체화해왔고
마침내 '참된 힘은 민중의 힘'이라는 깔끔한 결론에 이르렀다. (pg 590)
손석춘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특정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민중이 스스로의 역사를 개척해나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주목했던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일제시대 이후 친일 잔재를 소탕하지 못한 것이나,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오랜 군부 독재 등
분명 한국의 최근 100년사는 그리 아름다운 역사로 기억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민중'이 희망이며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손석춘의 시각에서는 충분히 아름다운 역사일 수 있었다.
책을 덮은 지금 생각해 보면,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의미있는 책이었다고 기억될 것 같다. 충분히 재미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단재 신채호의 이야기부터 몰입감이 올라가서 끝부분부터는 거의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읽었다.
특히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나에게는 스토리가 부여되며 이름을 외울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도 많아 다소 길지만 꼭 발췌해두고 싶어서 아래에 정리해 두었다.
국호는 대한민국, 정체는 민주공화국으로 결정했다. 임시헌장 10개조를 발표했다.
독립선언문에 이어 왕정 체제를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조선왕조의 끝자락에 위치한 허수아비 대한제국에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대한민국, 곧 민중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민족적 결의를 천명했다.
바로 그래서 '3.1 운동'이 아니다. 3.1혁명이 적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다.
조선의 기나긴 역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pg 197)
삶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으로 어떤 부모, 어떤 자녀, 어떤 이성, 어떤 배우자, 어떤 스승을 만느느냐가 중요하다.
다만 그 만남엔 전제가 있다.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사람과의 어떤 만남도 사회를 떠나 이루어질 수 없으며, 사회 또한 다른 사회와의 만남으로 역사를 형성한다. (pg 206)
우리 민중은 알았다. 깨달았다. 저들 야수들이 아무리 악을 쓴들, 아무리 요망을 피운들, 이미 모든 것을 부인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대계를 울리는 혁명의 북소리가 어찌 자연히 까닭 없이 멎을소냐.
벌써 구석구석 부분 부분이, 우리 민중과 저들 야수가 진형을 대치하여 표화를 개시하였다.
옳다. 되었다. (pg 396)
소수가 다수에게 지는 것이 원칙이라 하면, 왜 최대 대수의 민중이 최소수인 야수적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고기를 찢기느냐? -중략-
저들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까닭일까? 군함, 비행기, 대포, 장총, 장갑차, 독가스 등 흉칙한 무기 까닭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요, 원인이 아니다. 저들은 역사적으로 발달 성장하여온 누천년이나 묵은 괴동물들이다.
이 괴조물들이 맨 처음에 교활하게 자유, 평등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 민중을 속이어 지배자의 지위를 얻어 가지고,
그 약탈 행위를 조직적으로 대낮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인육을 분장하는 곳'인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려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 형법 등 부어터진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시키려는 소위 명분, 윤리 등 상어같은 도덕률을 조작하였다. (pg 395)
자연스레 건호의 마음에 저항감이 싹텄다. 그때부터 건호는 일본말 쓰기를 꺼렸다.
자신이 다니는 학급에서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친구들을 꼽아보니 많이 잡아도 예닐곱 정도였는데,
적극적인 친일 학우도 일고여덞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침묵을 지켰다.
송건호의 회고는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반민족행위자와 독립운동 사이에 대다수는 침묵하며 살았다.
송건호는 그 시절을 버티고 살아가며 침묵하는 사람들은 잘 순종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pg 474)
심훈은 일찍이 박헌영과 주세죽의 사랑을 담아 <동방의 애인>을 썼다.
두 주인공은 소설 창작 시점에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더구나 그들이 각각 죽음을 맞은 도시는 평양과 모스크바로 두 사람이 평생을 공헌한 공산당이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주세죽은 유배 내내 언젠가 역사가 평가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단야에 이어 박헌영마저 '미제의 간첩'으로 살해당하는 현실은 너무 잔혹했다.
작가 심훈이 그 참극을 목격하지 않고 요절한 사실을 다행이라 위안 삼아야 할까.
아니면 실제 삶이야말로 언제나 소설보다 더 소설답다며 소설을 써야 할까. (pg 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