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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발견 - 오늘부터 가볍게 시작하는 일상 우울 대처법
홋시 지음, 정지영 옮김 / 블랙피쉬 / 2019년 9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는 제멋대로 세상에 태어나 제멋대로 죽는 존재다.
사실 살아가는 목적이나 사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이라는 커다란 시점에서 생각하면 자손을 남긴다는 목적이 있을 뿐이다.
아무런 사명도 목적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스스로 정하면 된다. (pg 161)
뭐 읽을 만한 책 없나 인터넷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던 중 눈에 띄는 책 소개를 발견했다.
요즘 의욕이 많이 없어져서 고민이었는데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우울증을 겪고 퇴사했다가 약물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자신에게 이런 저런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고,
그 중 효과가 있었던 것들을 묶어 이렇게 책을 펴 내게 되었다고 한다.
우울증.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젠 짜증이 나는 단어다.
최근에 우울증으로 친동생을 잃었다.
우울증을 겪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우울증을 가진 사람과는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다.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듣고 있다 보면 끊임없는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 속으로 빠져든다.
위로하려고 하면 '니가 뭘 아느냐'고 하고 공감해주다 보면 '역시 나 같은 건 살 필요가 없지' 따위의 말들로 대화가 이어진다.
진짜 우울증 환자들 카운슬링 하는 심리치료사들은 죽으면 사리가 엄청 나올거다.
동생이 우울증 진단을 처음 받은 것이 12, 13년 전이니 우리 식구들은 10년이 넘게 우울증을 가진 가족을 알고 지낸 셈이다.
물론 나도 동생도 집 나와 산지 오래 되서 사실 얼굴 볼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툭툭 올라오는 동생의 우울증은 굉장히 신경 거슬리는 일이었다.
더욱 짜증나는 것은 동생 사후에 그 우울함이 다른 식구들에게도 전염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엄마도 내 딸 아이와 잘 놀다가도 가끔 눈물을 글썽이는가 하면, 나도 뭔가 요즘 의욕이 없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일이 한참 바쁠 시즌이어서 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팔, 이렇게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배송 오자마자 약간의 당혹감이 들었다.
우울증 환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약간은 칙칙한 책을 떠올렸는데 귀엽기 그지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인사를 하고 있다.
(집사람이 표지 귀엽다고 엄청 좋아했다.)
(앞 표지)
한없이 귀여운 표지였지만 책을 받아 들자마자 동생 얼굴이 떠올라 미간이 찌뿌려졌다.
만약 한 1년 전에 내가 이 책을 알게 되어서 동생에게 선물했다면 그 자식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책 읽을 마음의 여유는 있었을까? 이런거까지 선물한다며 내 인생 갈 때까지 갔다고 더 싫어했을까?
여하간 찜찜한 마음으로 책을 폈다.
우울증 환자들은 어떤 것 하나에 깊이 집중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한다고 저자도 밝히고 있기 때문인지,
방법들 하나하나가 길지 않고 문장도 간결한 편이다.
더구나 페이지 순서대로 쭉 읽을 필요도 없다.
목차만 보고 땡기는 것만 읽어도 좋을 구성으로 되어 있다.
책을 처음 접할 때에는 저자가 일본인인줄은 몰랐는데 책이 일본어 번역투여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흔히 말하는 오타쿠 말투가 더러 눈에 띈다.)
책 뒷표지 날개 부분에 보면 자신의 우울 정도를 간단히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가 있다.
여기에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리스트를 보면서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긴 한가?' 라고 생각했는데
집사람한테 물어보니 집사람은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단다;;;
여하간 난 두어개쯤은 해당되는 것 같아서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참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당사자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현상에 대한 대책을 이야기하면서 그 현상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제시하는 대책은 영 현실적이지
못할 때도 많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 썩 신뢰가 가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가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을 쉽고 간단하게 잘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나름대로 난이도와 효과까지 자신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제시해주고 있다.
슬프지만, 우울증을 앓아본 적 없으면서 이 병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는 법이다. -중략-
심지어 같은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서로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도, 우울증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를 세운 다음 "알아주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만 알아줘도 충분해!"라고
스스로 긍정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pg 151)
다 읽고 난 소감이지만, 나는 걱정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우울한 편은 아닌 모양이다.
작가가 병을 앓고 있을 때를 서술한 부분들을 보면 난 그 정도까지 심각한 수준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한 해결책 중에서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들이 꽤 되었다.
무언가 집중할 거리를 찾아 책을 읽는다든지, 게임을 한다든지, 출퇴근 길에 되도록이면 걷는다든지 등등
나도 모르게 요즘 들어 자주 하는 것들이 해결책으로 많이 제시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 음주하는 빈도와 강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점은 다소 우려스럽지만, 그래도 술 대신 다른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이런 습관도 조금씩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책이 좀 더 일찍 나왔었다면 동생에게 추천해줄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과연 동생의 삶에도 변화가 있었을까? 너무 궁금해진다.
내 동생과 같은 상황에 있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도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우울증 환자가 책을 진득하게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 이 글을 쓰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읽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울증 환자는 늘어가는 추세다.
출산율도 나날이 감소하는데 그나마 태어난 사람들 중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으니 정말 문제는 문제다.
이런 현상에 경종을 울리는 글들은 넘쳐나지만, 그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런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는지를 알려주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부분이 괜찮았지만, 번역에 있어서 원문을 너무 충실하게 살리느라 약간 일본어를 쓰는 오타쿠 느낌이 드는
문장들이 더러 눈에 띄여서 다소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었다.
서평에 채 담지 못했지만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일기는 작은 행복을 줍는 훈련이다. (pg 093)
세상에는 잘난 체하며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 많고, 칭찬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지 않으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그러니 자신의 재능에도 눈을 돌려보자.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의 달리기 실력이나 피카소의 그림처럼 뛰어난 재능이 아니어도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하는 능력 정도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 (pg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