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걷기
이상국 지음 / 산수야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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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라디오를 들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고, 대화를 하면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옛사람들은 걷는 것을 어떻게 즐겼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읽은 책이 바로 '옛사람들의 걷기'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생각한 걷기와는 많이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걷기란 가벼운 일상에서의 휴식 같은 시간인데, 이 책에서 다루는 걷기는 역사속의 인물들의 삶 속을 걷는 것이었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걷는 풍경이 연상되는 내용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느 지역의 길을 걷는 것 보다는 그들이 어떤 삶을 걸어가는지를 표현한다고 느껴졌다.

 

이 책의 서문 '길내기 - 신발끈을 매며' 부분은 길의 의미를 정말 잘 표현한 최고의 글이었다.

'길은 길다. 길어서 길이다.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진 길, 혹은 막다른 골목으로 막힌 길은 길이라 부를 수 없다. 길은 앞이 트여 있어야 한다. 길은 내는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은 땅이다. 땅과 사람이 서로 죽이 맞아야 길이 된다.(p.5)'

길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워주는 명문장이라 느껴졌다.

 

'발길이라는 말이 있다. 길을 만드는 발이 방향을 잡는 힘이 곧 발길이다. 발길 속에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인간의 마음이 들어 있다. 신과 발이 서로 죽이 맞아 제대로 된 신발이 되도록 관성을 만드는 것을 우린 길 내기라고 부른다.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거나 서투른 것을 능하게 하는 것을 우린 길들인다고 한다.(p.6)'

길이라는 말에 이렇게 오묘한 뜻이 있다니 처음 알았다.

길에 대한 심오한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지어진 말들은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 참 멋진 단어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옛사람들이 온몸으로 걸어간 길을 문헌으로 살피면서 그들이 남긴 사문들과 다른 이들의 증언을 곰곰이 따져 재구성한 책이다.

그래서, 내용이 쉽지 않은 책이다.

내용 자체가 상당히 역사적이면서 철학적이고, 한문도 많이 나오고, 생소한 단어들도 많이 나온다.

책을 읽을수록 저자의 탐구력, 독서력, 해석력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탁월함이 느껴지지만 독자를 위해서 좀 더 쉽게 기술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술의 길을 걸은 겸재 정선, 철학의 길을 걸은 여헌 장현광.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의 갈림길에 섰던 홍낭과 이옥봉 그리고 어우동과 나합.

개성에 가서 고려의 길을 거닐은 젊은 조선의 젊은 선비들,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을 만든 겸재 정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겸재 정선의 삶 속으로 걸어간다고 하는 것이 이 책에 적합한 표현법이라고 해야겠다.

 

정선은 59세인 1733년에 현감으로 발령을 받아 영남의 청하에 온다.

청하에 오기 전인 37세에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린 해악전신첩은 조선을 매료시킨 최고의 히트상품이었고, 당시 지식인들은 훔치고 싶은 물건 1호가 해악전신첩이었다고 한다.

정선은 그림 분야에서 부동의 스타였던 것이다.

청하에 와서 영남의 방방곡곡을 그려서 영남첩을 만들고자 했으며, 청하시절 영남첨이 66폭의 화보를 이루어 하나의 화풍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의 시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보고 또 보고 싫증이 날 만큼 돌아다니라.(곽희)'

정선 편에서 성류굴, 내연산, 문수산, 향로봉, 삿갓봉, 천령산, 청하계곡, 사자상폭, 보현폭 등 여러 지명이 나열되어 있다.

나열된 지명의 장소를 걷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 아니고, 정선이 걸어간 삶의 길이 주요 내용으로 다가 왔다.

그래도 화가 정선의 삶을 표현하면서 정선의 그림은 책에 실려있지 않다.

이 책에는 그림과 지도가 전혀 없는 점이 아쉬웠다.

정선의 대표적인 그림과 작가가 말하고 있는 지명들이 그려진 지도가 함께 있었으면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세오, 월섬, 이병연 시인이 등장하고 그들과의 대화와 일화를 통해서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만들어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여헌 장현광은 처음 들어본 인물인데, 대단한 인물이었다.

16세기 조선 성리학에 퇴계, 남명, 율곡이 있었다면 17세기에는 여헌이 있었고, 조선시대 스토리텔링의 초절정고수이고, 인조인금이 '500년마다 한 분씩 나타난다는 성현'으로 찬사를 했다고 한다. 

여헌 장현광을 따라 포항 죽장의 입암(선바위)로 향한다.

여기서 내용의 기술 방식은 빈섬이 여헌 장현광과 인터뷰를 하는 형식이다.

 

예술과 관련된 옛문헌에 대한 나의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진다.

역사속 인물의 평전을 읽는 기분이다.

 

착한 여자로 홍낭과 이옥봉이 살아온 길이 기술되고, 나쁜 여자로 어우동과 나합이 살아온 길이 기술된다.

홍낭과 이옥봉이 착한 여자로 표현되는 것은 운명의 남자를 사랑하며 일편단심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우동과 나합이 나쁜 여자로 표현되는 것은 성과 권력의 미로를 걸었기 때문이다.

 

조선초 한양의 지식인들이 개성에 가는데는 왕이 내린 재충전 휴가인 사가독서때문이다.

사가독서는 일정 기간 공무를 면해주고 집에서 쉬며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는 재충전 휴가이다.

사가독서는 세종 때 실시되었다가 세조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성종시대에 성종은 비대한 신하권력을 무너뜨린 후 신예 관료 6명에게 사가독서를 명한다.

그 6명은 채수, 허침, 양희지, 유호인, 조위, 권건이었다.

이들은 파주를 지나 개성을 여행한다.

이들의 여정이 나오지만 여행 후기 스타일의 글은 아니고 이것도 이들이 살아온 행적과 당시의 역사 중심으로 기술된다.

이들의 여행에 성현이 합류한다.

성현은 나중에 연산군에 의해서 부관참시를 당하는데 저자는 '시절이 문제였다'라고 말한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비될 때 성현은 대사간이었어으니 폐비사건을 비켜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성현 일행의 개성 여행을 기술하면서 저자는 '고려 콤플렉스 탈출 여행', '개성을 걸을수록 전왕조가 다시 살아나는 역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성계의 일생과 조선건국에 대한 내용도 기술되고, 여행자들이 지은 옛시들이 인용되면서 이들의 개성 여행길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여행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여행이라는 가벼운 옷을 살짝 걸쳐 놓은 인물과 역사 평전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저자의 역사와 문헌에 대한 수집, 해석 능려은 탁월한데 내게는 생소한 인물들이고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아직은 부족함이 많아서 유감스러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이 책을 천천히 천천히 다시 읽는다면 더 많은 감동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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