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성과 무한 -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레비나스 선집 3
에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김도형 외 옮김 / 그린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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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함은 타자와 관계하는 한 방식이다. 어느 지점에서든 타자와의 접촉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를 취하고펼치는 것이다. 참여와의 단절은 분명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긴 하나,
더 이상 이 접촉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기게Gyges처럼 보여짐 없이 보는 것이다." - P74

무한은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매 순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생각하는 사유에 의해 접근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무한이 시선의 지평들을 넘어서는 거대한 대상인 것은 아니다.
무한의 무한성을 재는 것은 욕망이다. 왜냐하면 그 욕망은 측정의 불가능성 자체에 의한 측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에 의해 측정된과도함이 얼굴이다. - P76

여기서 욕망은 일종의 전도로 나타난다. 욕망속에서 존재는 선함이 된다. 행복으로 뻗쳐 나가고 에고이즘 속에서 자신을 에고로 정립하는 그 존재의정점에서, 이제 존재는 자신이 이뤄 온 기록을 깨고 다른 존재에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근본적 전도다. 존재의 기능들 중의 어떤 것, 즉 자신의 목표를 에두르는 한 기능의 전도가 아니라, 존재의 실행 자체가 전도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는 실존하려는 존재의 자발적 운동을 중지시키고, 존재의 극복 불가능한 변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 P78

동일자에 적합한 형식을 지우고 타자로서 스스로를 제시하는 이러한 방식이 바로 의미함signifier이다. 달리 말해 의미sens를 가짐이다.
의미하는 가운데 자신을 현시하는 것이 말함이다. - P84

대화는 단지 직관의 (또는 사유의) 변양이 아니라, 외재적 존재와의 근원적 관계다. 대화는 지적 직관을박탈당한 한 존재의 유감스러운 결점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독적 사유인 직관이 관계 속의 전적인 올곧음의 모델인 것처럼여기는 것이다. 대화는 의미의 생산이다. 의미는 이념적 본질로 생산되지 않는다. 의미는 현전에 의해 말해지고, 가르쳐진다. 그리고 가르침은 동일자의 사유인 감성적 직관이나 지적 직관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자신의 현전에 의미를 주는 것은 명백함으로 환원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직관으로 편입되지 않는다. - P84

더욱이 하이데거에서 상호주관성은 공동실존이고, 나와 타자에 앞선우리이며, 중립적 상호주관성이다. 대면이야말로 사회를 알려 주며, 동시에 분리된 자아를 유지하게 해준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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