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치매전과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내가 지금까지 지켜오던내생의 역사와 가치, 목적, 규칙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도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겉모습이 같고 주변 사람들이 같은 이름으로 부르니 여전히 ‘나‘일까, 아니면 인지기능이 변하고 기억을 잃으면서 더는 과거와 같은 인물로서 ‘나‘를구성할 순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 P114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의료윤리‘를 생각한다는 게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좌절을 안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정의를 희구하며, 비록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을지라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좌절감이 더 커지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까지 의료윤리 관점에서 그나마의 논의가 있어왔고 또 문제제기도 있었기에 현재와 같은 성과라도 얻을 수 있지않았던가 생각해본다. 코맥스 퍼실리티가 준비돼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백신의 공정 분배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책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관련 정책과 제도 정비마저 없어도 되는 건 아니다. 미래를 위해 더 많이 대비해놓으면된다. - P185
애초 치료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며 심지어 현실적 가능성이 생겼는데도 신이 금지했다거나 알 수 없는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치료를 받지 말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게 말이야 할 수 있다 해도, 환자 또는 가족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회를 빼앗으려면 그에 상응하거나 넘어서는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데, 지금은 중세처럼 모두가 신을 믿는 시대가 아니다. 미래의 알 수 없는위험성 때문에 당장의 치료 가능성을 물리쳐야 할까. 이득도 위해도 모두 가능성의 영역이라면 그 사이 어딘가에 선을 그을 필요가있으며, 이것이 생명공학에 관한 윤리적 접근의 핵심이다. - P196
마침내 우리도 그 질문을 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의약품이나재료 또는 약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줄 것인가. 보건의료에서 정의가 다루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차별과 분배정의다. 차별은 보편적 사회정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여러 차원에서 논의된 바 있다. 그리고 분배정의 문제는 보건의료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오랜 논의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분배정의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자. - P253
이것이 생명윤리로 넘어가면 연구의 맥락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연구자는 연구 참여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연구 참여자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위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단, 연구는 지식획득을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므로, 연구 참여자의 이익, 위해와 사회의 이익, 위해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또한 연구 참여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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