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결과를 영어와 한국어로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두 가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먼저 영어로 출판하지만 원할 경우 부록으로 한국어판을 함께 출판해주는 《한국역학회지》에 논문을 출판했습니다.15 한국어판으로 논문 심사를 받고 출판이 확정된 이후, 영어 초벌 번역을 학술지에서 도와주었지만, 저희 연구팀은 모든 영어 문장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지만, 연구 실적은 한 편으로만 계산됩니다. 또 하나는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진행하며 배우고 고민했던 내용을 묶어,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과 『오롯한 당신』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기존의 출판 논문을 모은 게 아니라 글을 새로 써서 책을 출판하는 작업이었기에 논문을 쓰는 일보다 몇 배의 노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16 하지만 이러한 단행본 작업은 대학 순위 평가에 항목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학이 지금과 같은 지식 생태계를 가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 시스템으로 인해 어떤 연구자와 어떤 연구가 배제당하고 있는지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한국사회의 고유한 문제를 한국어로 고민하고 쓰는 연구자들이 오늘날 대학에서는 가장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특히 한국사회의 사회적 약자에 관해 연구하는 경우 더욱 도드라집니다. 전 세계 지식 시장에서 한국이 ‘변방’이기에 생겨나는 지식 생산과 유통의 문제점이 한국사회 내부에서도 발생합니다. 한국에서 권력과 자본에 소외된 이들의 삶을 연구할 때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알라딘 eBook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지음) 중에서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일하며,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할지 매 순간 선택해야 했습니다. 연구주제를 정하고 논문을 쓰고 그 지식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나은 선택인지 판단하는 일이 제게는 항상 어렵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만을 주목하는 오늘날 대학에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의 몸과 질병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과학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알라딘 eBook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지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