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더 나가면, 노동자가 공장 부품과 같이 일해야 했던 시대에 ‘고장을 고치는’ 의학은 사회 유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산업 사회에서 의학은 아프면 치료받고 다시 돌아와 일할 수 있는 몸을 만들었고, 노동의 조건을 바꾸는 대신 몸을 고쳐 쓰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방식을 고집해야 할까요? 전체를 다 바꿀 수는 없더라도 부작용 해결을 위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고장을 고치는 것을 넘어, 고장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는 것을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의학은 스스로 질병에 대해, 신체에 대해 최고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맞서서 의학과 생물학이 장애가 있는 신체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주장합니다. 의학이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은 장애의 경험을 충분히 알 수 없고,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연구자가 전부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를 수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의료인은 장애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당위가 생깁니다. 어떤 것이 필요하며 어떤 부분을 바꿔야 하는지 이해하고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기 위하여.
-알라딘 eBook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김준혁 지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