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위시의 대표인 황병승의 시는 21세기 젊은 시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세대인 황병승은 그의 시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의 시적 언어란 시적 행위이며,  기존 시인들의 특징인 서정성이라든가 운율적 형식을 허물었다.  

 즉, 감동을 주기 위해 시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 자체에 들어 있는 의미가 감동이 되는 것이다.

「트랙과 들판과 별」은 어른이 되지 못한(되기를 거부한?) 아이들의 방황과 반항,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기이한 동화의 세계인 것처럼 시의 주인공들이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순수한 꿈을 갖고 있는 기존의 시에서 등장되는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이지만 어른들에게 겪는 다양한 성적 폭행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고, 한편으로 보면 그 아이들 자체도 생물학적 연령으로 보는 아이가 아닌, 성인의 외적 조건을 갖춘 성장하지 못한 미성숙 어린아이의 자아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어른들을 지칭하기도 하다.

나는 「트랙과 들판과 별」의 모든 시들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생생한 이미지로 시집을 감상했다. 그리고「트랙과 들판과 별」의 시의 전체에서 시인이 시적자아들에게 갖고 있는 사랑을 읽었다. 그 사랑이 아픔에 대한 것들이다. 그의 모든 시에서 섹스의 행위가 읽혀진다. 시적 자아는 대부분 어린아이이거나 약물에 중독된 창녀들, 근친상간, 게이들의 성행위를 그리고 있다.

처음 시집을 읽었을 때는 눈으로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자아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스토리의 흐름만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두 번째 다시 시집을 들어 펼쳤을 때는 시의 정황들이나 표현, 시의 해설이 묘한 성행위의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성행위 쪽으로 비약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시들에서 성행위의 이미지가 묘사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변태(?) 같다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의 시들은 말 그대로 언어로써 전위적인 성행위를 보여 준다. 포르노그래피 사진첩 같다고나 할까.

 

난쟁이는 작은 녀석을 뜻하지만 그것은 몇 개의 숨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락방, 낚시, 목이 긴 장화, 배지badge, 맞잡은 손, 외투, 구름, 가루란 말 역시

몇 개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상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외투속의 구름 구름 속의 배지 배지와 낚시 낚시와 목이 긴 장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비밀을 한두 개쯤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이 음악이 되기 전엔 차가운 동전이거나 혹은 주머니 속의 밀떡

<눈보라 속을 날아서 (상) -부분>

 

 

‘눈보라 속을 날아서 (상)’ 을 살펴보면 시 안에서 지칭하는 난쟁이는 작은 녀석을 뜻하지만 몇 개의 숨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다. 난쟁이 자체에 의미를 띤다. 난장이는 자라지 못한 자아를 갖고 사는 어른들을 의미할 것이다. 어른의 몸을 타자화해 자아의 미성숙을 난장이에 비유한다. 다락방의 의미 역시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서 가루란 ‘마약’을 뜻하는 의미 일 것이다. 건강하고 성숙된 자아를 지닌 성인이 가루 속에 묻혀 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난쟁이들이 묻혀 산다고 말하는 것이다.

 

피아노의 건반은 여든 여덞 개

그것들은 하나같이 만족을 알까……

 

당신은 피아노를 사들인다

어린이 날이라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빵 부스러기를 흘리는 내가

흑백의 기묘한 작대기들과

교감을 나누리라고.

꿈에서조차 나는 단 하나의 건반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데,

나는 두드린다!

나는 두드리고 당신은 즐거워, 한다

우리 아이는요 피아노를 집돼지처럼 다뤄요

손바닥만한 당신의 뱃속에서

팔다리를 온전히 뻗지도 못하던 내가

처음 하나의 건반을 걷어찼을 때

당신이 내지르던 그 야단스런 음계들이 뭘 의미하는지

꿈에서조차 나는 알고 싶지 않은데,

나는 두드린다!

어린이날이라고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

나는 더 세고 강하게!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

당신은 그저 즐거워, 한다 어린이날 기념 독주회라고

우리아이는요 금세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 보세요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 전문>

 

‘당신은 피아노를 사들인다 어린이 날이라고’/는 아빠가 새 엄마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화자는 코물을 흘릴 정도의 어린아이이다. ‘흑백의 기묘한 작대기’/는 새 엄마를 뜻한다. ‘꿈에서조차’/ 새엄마와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은 어린이인 화자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두드리고 당신은 즐거워한’/ 는 새엄마가 화자와 성관계를 맺는 일이다. ‘손바닥만 한 당신의 뱃속에서’/는 여자의 자궁을 뜻한다. ‘팔다리를 온전히 뻗지도 못하던 내가’/는 화자가 태어나기도 전 태아의 상태였을 때를 말한다. ‘처음 하나의 건반을 걷어찼을 때’/란 새엄마와 화자의 성행위를 묘사한다.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는 새엄마와 화자와의 성행위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는 화자가 새엄마의 성폭행에 희생당하는 입장에서의 심정이다.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는 화자가 이제 새엄마와의 관계가 이미 확실해졌다.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에서 해설은 이 모든 상황이 인간으로서 절대 용서될 수 없는 범죄임을 말한다.

 

엄마는 울면서 잡든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춥니다

지난밤 드로그 씨네 둘째가 총에 맞아 뻗어버렸다는구나 너도 몸조심해라

땀이 나고 미끌거리는데 여자 친구는 손을 꼭 잡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드로그 웨이는 죽기 전, 금고를 열다 감전이 되었고

두 손이 새카맣게 타버렸다는구나 망할 놈의 금고 회사!

새벽이 오면 떠돌이 늙은 개가 방으로 뛰어들어와

내 거시기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습니다 킁킁킁 싫다는데도.

동생은 또 자다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엉덩이에 염소 뿔이 박혔고

나는 노트에 갈겨썼어요

그나마 성한 발가락으로 펜슬을 꽉 쥔 채,

 

죽음, 그런 것은 지우고 다시 써버린다

<엽차의 시간 -부분>

 

‘총에 맞아 뻗어버렸’/은 강간을 의미한다. ‘땀이 나고 미끌거리는데 여자 친구는 손을 꼭 잡’/은 성기부분을 의미한다. ‘여자 친구는 성기를 꼭 잡고’가 될 것이다. ‘동생은 도 자다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엉덩이에 염소 뿔이 박혔’/은 자신의 동생이 게이라는 뜻으로 남성끼리의 성행위를 뜻한다. ‘죽음, 그런 것은 지우고 다시 써버린다’/는 성기의 발기 전 후를 나타내는 것이다.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

사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가 알

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



 

그런 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전문>

 

‘2층 사는 남자’/는 여자 위에 올라타 있다.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은 남성의 성기, ‘소리나게 열어젖힌’/는 여자의 누워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은 리얼한 성행위 장면이다. ‘야 야 됐어’/ 성행위가 끝난 후에 하는 말일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란 표현이 재미있다. 남성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성행위를 하지 못하는 이에게 여자가 무슨 필요이냐는 말일 것이다.



악성 독감에 걸린 모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답게 살자,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쨌거나 나답게 살아야 해

다짐하며 밤새도록 열에 시달린 새벽

 

바다가 호수가 되고 처녀가 수염을 기르고

토끼가 사자를 쫓는 악몽에서 깨어난 뒤

모모는 자기도 모르게 바보 천치가 되어

나담게 살자는 지난밤의 다짐을 잊고

콜록콜록 죽은 할아버지의 곰방대를 훔쳐 집을 나갔다.

 

모모…… 그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을까

그러나 모모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모와 모가 갈갈이 찢겨진 이상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모모 -부분>

 

‘모모’는 가족의 비극 사를 ‘악성 독감’에 비유한다. ‘나답게 살자,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모모가 말하는 모모다운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타자인 모모와 자아인 모모가 갈등하는 것일 것이다. 어린 모모가 어찌해야 될지 모르는 극한 상황이 벌어진 날이다.

‘바다가 호수가 되고 처녀가 수염을 기르’/는 날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모’의 가족에게 이러난 이런 비극도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악몽이고 싶었다.

‘죽은 할아버지의 곰방대를 훔쳐’/ 는 그리하여 결정한 것은 죽은 할아버지가 가족에게 저질렀던 성 폭행을 자신이 저지르지 않기 위해 자신이 집을 나가는 것으로 현실을 피한다.

‘모와 모가 갈갈이 찢겨진 이상한 모습’/에서 모와 모가 나뉘는 것은 모모 자신안의 선과 악의 대립을 보여준다.

 

모모는 두 늙은이와 어린 계집애에게 사로잡혀

겨우내 담배를 태우며 지냈다

<모모 - 부분>

 

‘모모는 두 늙은이와 어린 계집애에게 사로잡혀’/에서 모모는 부모와 여동생과의 관계를 밝힌다. ‘겨우내 담배를 태우며 지냈’/담배란 이미 죽은 할아버지가 그의 가족에게 했던 성폭행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이보시오! 실은 내가 말이오, 당신들도 어쩌면 눈치 챘겠지만 나는 사람의 탈을 쓴, 사

납기 그지없는 늑대올시다! 허 허 허, 배불리 먹여줘서 고맙긴 한데 나는 은혜 따위 모르

는 들짐승, 이제 슬슬 배은망덕을 좀 보여드릴까?!”

<모모 - 부분>

 

시적 자아 ‘모모’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다. ‘사람의 탈을 쓴’/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나온다. 사람의 탈을 쓴 늑대라고 밝힌다. ‘배은망덕 좀 보여드릴’/에서 모모가 저지르는 죄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비좁은 방공호 속

열두 살짜자리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한 녀석은 목을 잡고 다른 한 녀석은 앞다리를

또한 녀석은 뒷다리를 잡고 떠돌이 개 뽀삐와 했다

 

그 뒤로 뽀삐는

세 녀석을 보면 꼬리를 치며 달려들었고

열두 살짜리들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뽀삐를 향해 돌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극복하려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밤마다 뽀삐의 울음소리가 이 골목 저 골목을 흔들고

며칠 뒤 떠돌이 개 뽀삐는 마을을 떠났다

 

뽀삐는 수캐였다

<뽀삐 - 전문>

 

열 두 살짜리들이 개 한 마리와 성행위를 한다는 것, 그것이 수캐이든 암케이든 독자들은 상관없다. 이런 일들이 분명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분명 열두 살짜리들도 뭔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뽀삐에게 오히려 돌팔매질 한다. 그리고 오히려 피해를 당한 쪽이 떠난다. 시에서는 어린아이와 떠돌이 개 설정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현실에서 어른들이 어린아이 하나에게 성폭행한 뒤에 자신들의 일이 탄로가 날까봐 오히려 아이에게 돌팔매질 하는 겪일 것이다. 그리고 당한 입장이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 현대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섹스는 사랑을 이루어져야하는 성행위이어야 한다. 이 시안에서의 섹스는 경악을 자아낸다. 시의 자아들은 하나같이 어린이 성폭행 피해자들이다. 더군다나 정신적 치유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족 내의 근친상간이 주를 잇는다.

시의 화자들이 대부분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단지 어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단지 어른이 아니라 천륜을 저지르는 일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현대 사회의 비일비재한 이러한 일들. 이보다 더 잔인한 정신적 상처는 없을 것이다.

황병승은 그런 일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시 안의 자아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보호하려 하고 있다. 또 시적 자아들이 어리기에 그들은 아파도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 죄를 저지르는 어른들 역시 모습만 어른일 뿐이지 그들의 정신도 성장을 멈춰 버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죄책감도 모른 채 그럼 무시무시한 죄악을 서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러한 일들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역시 자아들 본인이기 때문에 차마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시 안에서 화자가 실제 어린아이처럼 설정하여 어른과의 경계를 극명히 대비 시켜 놓아 시의 극적 효과는 독자로 하여금 그 충격을 몇 배로 수용하게 만든다. 이것이 황병승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황병승의 시집 한 권을 다 읽고 너무도 씁쓸한 기분을 맛봤다. 그 누구의 시집보다 이보다 더 참혹한 스토리들은 없을 것이다. 도무지 끔찍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트랙과 들판과 별」 은 현대 사회의 돌고 도는 가장 추한 문제점과 그 중심에 서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정신세계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제가기 다른 얼굴 여러 복합적인 자아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가 내는 목소리는 하나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어른이 되어서도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채 어른의 모습만 하고 있는 아이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주침의 발명 -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
김행숙 지음 / 케포이북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흑백 신비의 풍경 - 이성복

카프카를 사랑하는 이성복 시인은 ‘절문근사’라는 표어를 문에다 써놓고 절실하게 묻고 비근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만 절실하게 묻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묻기 보다는 타인에게 묻고 의존하는데 익숙하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는 절실하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에게는 절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도 어떠한 사물을 선택하는 것은 시인 밖의 것이지만 그것에서 오는 영감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만의 것이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느끼는 아픔과 고통도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고 견뎌내야 하는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의 문제다. 스스로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바라보고 인정하기 두려워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도와주는 이가 시인이 아닐까. 이성복 시인의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란 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내가 아픈지도 모르고 타인의 아픔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또 현대 사회가 남의 아픔을 즐기고 더 큰 아픔이 되길 상처에 소금뿌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성복 시인은 카프카의 시골의사처럼 끊임없이 치유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독자이든, 시인 자신이든 상관없이 수많은 상처를 열어보고 원인을 찾으려 한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알아차려 고쳐서 완쾌되는 일도 드물다. 특히 정신척인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병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만큼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이성복 시인은 그 병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일상에서 습관처럼 매일 반복되는 것들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라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사건이나, 누구나 썩어버린 시선으로밖에 바라볼 수없는 삶의 형태로 자리 잡는 것이다.

‘남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일 때 진정으로 나의 시선이 나에서 너로 변신할 수 있고 옆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듯 정신이 병들어 있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스스로를 절실하게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는데서 결과가 고통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한다.

 

천개의 서랍 - 황병승

모름지기 시인이란 ‘고백하는 자’이며 시는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황병승 시인의 고백이란 자신에서 한발 떨어져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 한다는 소리일까. 남의 이야기는 그 주인이 없는데서 말하면 더 재미있고 흥미롭다. 아무리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비밀이야기가 되며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까지도 즐기게 된다. 시인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남의 이야기 하듯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 같다.

황병승 시인의 목소리는 현재 사회 부작용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예전의 가난에서 오는 이야기나 내면의 성찰, 자연과 더불어 이야기하기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사춘기 시절의 아픔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이 많다. 그들의 성장통이나 성 정체성에 대해서 왜 그것들이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지를 파헤치기보다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무거운 이야기를 만화나 음악으로 가볍게 소통한다.

시의 세계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예술이라 다들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란 꼭 ‘시적이어야 한다’ 는 고정적 틀을 벗어나는 시인이 황병승 시인이 아닌가 싶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도 변했지만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적인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단지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표현하는 방식도 발전되어서 보여 지는 것뿐이라 말하고 싶다.

황병승 시인의 소재는 요즘세대들이 흥미롭게 느끼는 소재들이다. 어떻게 보면 ‘뭐, 이런 게 시 야.’ 할 정도로 만화주인공들이나 중성의 인격들이 시안에서 살아간다. 인디밴드의 음악 가사들이 시적 언어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 세계에서 그만의 케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고 고통을 호소하고 시를 즐긴다. 이렇게 시어의 소재들이 변하긴 하였지만 말하고 있는 주제는 똑같다. 어떻게 보면 그 케릭들을 내세워 그들만이 가진 아픔을 각자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한편의 스토리 라인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시 한 편당 그 주인공들을 내세우고 사건을 보여주는 식이다. 황병승 시인의 작품들은 각각 그 작품의 색깔이 다채롭고 뚜렷하다. 수많은 인물 설정, 사건들, 주제들…… 스스로 시를 재미있게 즐기는 시인이다.

 

꿈의 뿌리는 몸에 있고 몸의 뿌리는 꿈에 있다 - 이원

‘영혼이 자유롭길 소망한다.’ 이원 시인의 시세계를 접하며 느낀 점이다. 이원 시인은 영혼이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시인이라고 느꼈다.

몸속에 박힌 정신세계 속에서 어떠한 과거의 아픈 사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들여다보고 고통을 음미하여 이겨내는 일.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마음이 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 이것이 이 원 시인의 시 쓰기인 것 같다.

이원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나는 좀 더 일차원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꿈의 뿌리가 몸에 있고, 몸의 뿌리는 꿈에 있듯이 꿈꾸는 데로 몸이 움직인다면 그것이 일차원적 삶이 아닌가 한다. 사람이 하루에 6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는데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되면 그것에만 집중하여 몸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관련된 것들로 가지를 쳐나가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은 하루 종일 6만 가지의 생각과 맞물려 그 몸의 주인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몸으로 행동하여 나타내기를 주저한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하는 소리는 마음속에서 잠만 잘뿐 그 힘을 일고 많다. 시인은 그런 마음을 시를 쓰는 것으로 풀어내고 있다.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듣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마음을 믿고 힘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노력 끝에 얻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나 자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에 따라 마음은 자신을 위해서만 말할 것이다.

굳이 입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마음이 하는 대로 몸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몸의 뿌리는 꿈에 있고, 꿈의 뿌리는 몸에 있다는 말의 뜻인가 싶다.

 

진은영과 친구되기 - 진은영

진은영의 시 세계를 통해서 마주침의 발명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은영의 시는 철학적 사유가 흠씬 묻어 나온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그래서 적어도 도달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혹은 누군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 이루어지길…….’ 내 삶이 엉터리라면 나와 같은 사람은 모두 엉터리일 것이다. 이유는 단지 내가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친구에게는 엉터리가 이니기를 당부하는 메시지로 와 닿았다.

‘돌이 아니라, 쏟아지는 별들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일까?/ 친구, 정말 끝까지 가보자.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나는 여기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 쏟아지는 별들에게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이란 그럴 수 만 있다면 정말 죽을 만큼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행복을 위해 친구와 나란히 갈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일 것이다. 함께 부딪히며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친구이기에 가능 할 것이다.

진은영 시인은 모든 것을 마주친다. 시인과 시인 사물과 사물, 모든 미래로의 길들까지도 부딪쳐 마주침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간다.

시 또한 전혀 없는 것을 창조해내기가 아닌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모든 것에서 갖고 있는 것들을 서로 마주치게 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표현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은 창조자가 아닌 발명가이다. 언어의 발명가.

 

빛의 소묘 - 박형준

인가의 삶이란 빛에 반짝이여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보들레르의 시에서처럼 천년보다 많은 추억을 갖고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그 추억 하나하나가 빛에 의해서 반짝이는 삶을 살았던 것이 인간일 것이다. 그 기억을 되돌아보고 그 세계에 빠져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동물은 인간뿐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쩌면 축복받은 동물일라 하겠다.

어느 한 사물을 통해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해 언어로 표현하는 일, 그래서 창작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까.

빛의 소묘란 기억이 한순간 반짝이며 떠오를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나만의 빛깔을 입혀 그려내는 일이 인 것 같다.

퇴색된 추억의 부족한 부분을 기억해내어 아름답거나 오히려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내는 작업이다.

책에 실린 시 중에서 ‘바닷물이 수챗구멍으로 역류하곤 했다’에서 시인의 과거 추억 속으로 우린 같이 역류하여 들어가 본다.

‘연어처럼 싱싱한 종아리를 걷고/ 무릎까지 올라온 바닷물을 따라/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장마철 집안에 물이 역류하여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때 했을까. 그냥 빗물도 아닌 바닷물의 검은 악취 속에서 어린 아이들이 종아리를 걷고 물을 퍼내는 장면이 생생하면서도 연어 같다는 비유가 삶의 처절함보다는 아름답기 그지없게 묘사 되었다.

‘다락방 같은 마루문을 열고/ 소녀들이 오줌을 누고/ 눈부신 엉덩이가 철철 소리내며/ 먼 바다로 통신을 하였다/ ’ 다락방만한 마루에서 문을 열고 볼일을 보는 소녀를 엉겹결에 보게 된 소년의 모습. 그 소년은 보려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본의 아니게 목격한 소녀의 오줌 누는 모습을 엉덩이가 눈부시게 철철 소리가 난다고 표현했다. 마치 신윤복의 그림 ‘단오’ 풍경을 묘사한 것같이 생생하다고 느꼈다. 신윤복의 ‘단오’에서 스님과 동자승이 여인들이 목욕을 모습을 훔쳐보는 장면이 겹쳐진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남자아이는 이성이라하기엔 어린 계집아이가 눈부시게 그려진다. 단지 그려지는 것만이 아닌 청각까지도 울려댄다. 오줌이 쏟아져 먼 바다로 휩쓸려 흘러들어가는 소리가 난다.

박형준 시인의 시는 기억이 기억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시와 삶, 그 하나에 이르는 길 - 김명인

김명인 시인이 ‘나를 그토록 지속적으로 긴장하게 만든 대상은 시’ 뿐이었다고 한다.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그 감동의 자리는 불가해한 시쓰기의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자리, 그 고통은 삶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막막한 느낌들과 통하는 것, 시를 선택한 것까지 포함해서 회오의 순간들도 함께 경험하는 것을 김행숙은 저녁때까지 걸어갈 용기라고 했다.

시는 시인이 살아가는 인생에서 생기는 모든 종류의 결핍을 메우려 함일 것이다.

삶에 있어서 끝은 죽음인 것처럼 되돌아가는 반환점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녁때까지 걸어가는 용기처럼 시쓰기도 되돌아갈 여력을 남기지 않고 쓰는 것이다. 중도에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삶도 중간에 멈쳐 서지 않으므로. 중도에 포기하는 삶도 있겠지만 그런 삶에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고자 쓰는 것이 시일 것이다. 그리고 삶이 끝나는 죽음까지도 이겨내려 용기 내어 써내려 가는 것이 시이니까.

김명인 시인은 외로움을 ‘삶에서 시간의 마모를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하고 한다. 그럼 감내가 공간의 고절감이나 시간의 막막함을 견딜 수 있게 하고 고독과 허무를 미적 깊이로 전환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외로움 속에서 시인은 홀로 견뎌내며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한 가지 커더란 생각이 파문이 일며 그 파문의 진동은 외로움을 즐기는 원천이 될 것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사람에게 있어 제일 큰 두려움이라 생각된다. 그것을 이겨내어 즐길 수 없다면 진정한 시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눈물’ 에 대한 이야기기 흥미로웠다. ‘잘 우는 사람/ 안 우는 사람/ 못 우는 사람’ 이라기보다 현대의 사람들은 ‘울 줄 아는 사람과 울 줄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싶다. 울길 울어도 진실로 우는 것인지 남에게 보여주려 우는 것인지. 그것을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예전엔 보여 지는 울음을 울었기에, 울 줄 모르는 사람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히려 예전보다 잘 울지 않는다. 진정 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나서부턴 희한하게도 내 자신의 일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 대신 시를 읽거나 책을 읽다가, 연극을 한편 보고나서 흐르는 눈물의 횟수가 더 잦아졌다. 이것이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투명한 것이라 하는데, 단단한 눈물, 침묵과 대등한 눈물, 그런 울음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시 쓰기 인 것 같다.



*

 

60억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것과 같이 시의 세계도 우주만큼 무한하다고 느꼈다. 우주의 세계 같은 시의 세계에서 이제 겨우 갓 태어난 아기처럼 울음을 배웠을 뿐인데도 아니, 울음조차 제대로 낼지 못하겠지만 시는 너무나 매력 있고 재미있다.

우주 같은 감동도 준다. 시를 읽다 어쩔 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 행복해 한다. 단지 시 한편으로 가슴이 뛸 수 있다 게 이렇게 위대한 일이고 행복한 경험이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남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다. 시를 공부함으로써 시안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는데 요새 사람들과는 시에 대해 이야기 할 상대를 찾기가 힘들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이야기 할 때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각박한 삶에 대한 일반화된 주제가 주가 때문이다. 하물며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난다 치더라도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기도 막막하다. 혹시나 외계인 취급할까봐서이다. 그만큼 요새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아니, 시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그러니 걱정이다. 앞으로 더 외로워 질 것 같다. 공자의 말과는 달리 시를 배움으로서 남들과 이야기하기 힘들어지고 외로움에 더 깊이 빠져 버릴 것 같다. 이것도 내가 앞으로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이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연수의「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은 ‘실낱같지만 확실한 무엇’ 인 단 한 장의 사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검은 반원의 양옆으로는 'Pier……s1895'가 쓰인 사진 한 장으로 이야기가 팽팽히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이 사진 한 장이 독자들을 향해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끔 활짝 펼쳐진다. 그렇다고 이 사진 한 장으로 보물을 찾는다거나 어떠한 인물을 찾는 식의 내용 아니다. 그것은 고난에 찬 한국현대사의 모든 격동기를 온몸으로 지나온 한 남자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그 사진을 얻게 된 시대부터 1990대까지의 크고 작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적 사건까지를 펼쳐 보여준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세태소설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 폭력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의해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무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영향력을 아주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의 주인이자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기미년 만세 행렬’ 속에서 태워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4·19, 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삶을 적은 203행의 서사시를 자손에게 남겼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드러내는 것을 모두 태워버리고 이 사진하나만 간신이 주인공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사진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돼 남양군도의 어느 열대 섬까지 내려갔던 할아버지가 일본군이 패전한 뒤 미군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가져온 것이다. 그 사진은 추측하건데, 전쟁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줄 수 있는 환각과 같은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당시의 상황이 꿈이길 바라고 그 사진에서 받는 위안이 현실이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희망과 같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살아온 한국사는 그 시절을 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라면 똑같은 삶을 관통해온 것이다. 역사는 한 개인에게만 특별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역사가 만들고 있는 특별한 사건 중심에 누가 어떠한 특별한 일을 겪었느냐가 차별화되어 기록에 남는 것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삶이란 것은 무엇일까. 이 사진과 같이 그 사람이 사진을 얻게 된 상황을 되돌아 짚어보는 것일 것이다. 그 사진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왜’를 찾아가 보면 한 개인이라는 중심을 기준으로 라디오 수신기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이라는 전파를 타고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나, 사건 등과 연관 있는 사람들까지 넓게 퍼져가는 것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모든 사회의 사건 속에 우리는 각자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 우리 후손들이 알고 있는,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남긴 누구나 알고 있는 한국사와 달리 그 중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은 이들이 겪은 역사의 모습은 어떠한가. 단지 그들이 특별히 죄를 짓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월적인 존재로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 우월적인 존재란 소설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1979년에 일어난 광주 민중 항쟁을 예를 들어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은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해 죽음을 당한다. 같은 시간 서울에 있는 대학생은 한가로이 커피를 즐기며 노닥거렸다는 것이다. 1968년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고등학생이었던 정민의 삼촌이 ‘내셔널지오그래피’ 라는 잡지를 들고 서있다. 마침 그 장소에서 수류탄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 정민의 삼촌은 당황하여 뛰었고, 청원경관이 부르는 소리에 서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흠씬 몰매를 맞게 된다. 같은 시기인 1968년 5월 3일 오후 네 시 사십오분, 프랑스 공화국 보안 경찰대는 소르본 대학 광장으로 출동해 거기 모인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는 1894년과 1871년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바로 전날, 한국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기동타격대를 증설했다. 하루를 차이로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파리에서의 사건이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다지 그 시기에는 그런 놀란 만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그 폭력이라는 것이 권력에 의해 일어난 일이고 그러한 권력이 훼손될 때 폭력은 권력을 강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빈번히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건들은 비단 우리나라만 겪는 불행한 사태가 아닌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나라에서고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누구나 그 시기를 살고 있던 사람이 겪은 일이지만, 그러한 사건의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가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게 겪는 역사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이렇듯 아무 힘없이 사회의 권력에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죄감과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만들어 우수한 인재이든, 평범했던 사람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삶 자체를 무너지게 만든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용산주민 철거 참사사건’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사건을 겪고 살고 있다. 하지만 단지 우리가 그 철거 주민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당사자들이 당한 권력의 폭력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듯 겪는 것이다.

사회는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이며 그런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같은 사회, 사건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현재는 1990년대이다. 이 시기의 우리또래 운동권 대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목숨을 걸고 몸으로 시위하던 때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가 대학생활의 안락함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윗세대들의 피가 섞인 투쟁이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만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그들이 바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쓸려 보냈다면 지금 우리가 즐기는 학교생활도 결코 없으리라.

그 당시의 운동권 대학생이 자신들의 뜻을 위해 방북을 하려 독일로 가는 것에서 그것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기에 한창 공부를 하고 꿈을 펼칠 시기인 학생들이 그런 신념을 품을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은 투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 최루탄이 정신없이 터지는 길에 서 있었을 뿐이다.

2010년을 앞둔 이 시점,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을 보면, ‘세상이 정말 좋아졌구나! 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북한 밀입국을 위해 독일까지 갔다. 지금의 생각으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의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모습을 작가는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불과 20년 전전에는 ‘이러했었다.’ 고 말이다.

한국이란 세계에서 떠나 독일이란 먼 나라까지 가서 만나게 된 사람역시 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죽은 삶을 살았던 이길용이란 사람이다.

그는 1984년 서울의 공사판을 떠돌며 일용노동자로 생활하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광주 무등산에서 야바위꾼을 만나 돈을 다 잃고 한기복이란 사람을 만난다. 한기복은 광주 민중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광주에온 교왕 바오로 2세를 죽이겠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주 도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그 사건으로 이길용은 23일 동안 치안본부 대공 실에서 죽음과 같은 고문을 당하고 수사관들에게 쇠뇌를 당해 강시우란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대학 구내 서점에 취직하여 운동권학생들에게는 한기복의 분신자살한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전태일 같은 영웅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것 역시 이길용이 일부러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이 아니다.

강시우는 한 학생이 분실 자살하는 광경을 사진촬영하게 되고, 일본에서 놀러왔던 일본 유학생 레이가 그 장소에서 그것을 목격하다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려 그 둘이 만나게 되는 인연이 발생한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국에 온 레이를 우연히 또다시 만나게 된다. 레이의 할아버지와 강시우의 할아버지의 고향이 군산인 것을 알게 되자 함께 그곳을 여행을 간다. 1910년대 기간지 간척사업으로 한국에 왔던 레이의 할아버지가 군산에서의 배운 노랫가락에서 공통점을 찾아 그 둘은 이미 그들의 할아버지 때에 이미 만났을 거라는 추측도 하게 되고 결국 그 둘은 연인 사이가 되어 함께 독일로 간다.

강시우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히로뽕 만드는 일을 이어서 하다 죽기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또 하나의 입체 누드 사진.

그 사진 하나로 이길용의 할아버지세대 당시 일본의 사회모습까지 그려낸다. 태평양전쟁의 후유증으로 ‘히로뽕’이라는 마약이 나라전반에 뿌려져 있었던 일본사회를 보여준다.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군산에서 간척지 사업을 벌이려 할 때 그럼 이길용의 할아버지도 그곳에 있었다는 말인가. 소설이 독자에게 조금 억측을 만들어내는 면도 있다.

유태인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스실로 가는 동족들에게 기타를 쳤던 ‘칼 하프너’ 그는 죽음과도 같았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헬무트 베르크’란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한다. 사회의 부조리는 이렇듯 개인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죽이고 싶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1984년에 백남준이 전 세계를 위성으로 연결해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비디오아트를 선보였고, 1986년에는 챌린저 호 폭파장면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날부터 역사는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한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주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섭동이란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전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조우라 하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속도가 변하게 된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소설세계는 이 섭동과 같은 구조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과 그의 할아버지, 정민과 정민의 삼촌, 이길용과 레이와 그들의 할아버지 등등 모든 연결고리가 그렇게 섭동의 원리로 걸려 있는 것이다.

결국, 이길용과 주인공은 사진의 한 귀퉁이에 적힌 Pier……s 1895의 근원을 찾게 된다.

1985년 피에르 루이스는 앙드레 지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친구였으며, 폴발레리를 데뷔시킨 사람으로 「빌리티스의 노래」라는 산문집을 쓴 작가였다. 후에 사진작가 데이비드 해밀턴이 만든「빌리티스의 노래」란 동성애드 코드의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 사진은 그것들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핼무트 베르크가 말한 트라벤 이란 사람이 쓴 “뭔가를 찾아 나선 힘든 여행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보물. 그게 진정한 보물이다. 그걸 찾기엔 내 삶은 너무 짧게 느껴지리니” 란 말처럼 인생의 참된 진리는 결승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그 순간이 인생의 진리 속에 놓여 있다는 말일 것이다. 
  

작가 김연수는 소설 내내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칼 세이건 이 우주에서 또 다른 칼 세이건 을 만나듯 김연수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우리 모두는 또 하나의 김연수로서 만나게 된 것이다.

김연수가 「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희망적 메시지’를 이야기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랑하며 살자’라는 식의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자는 것일 것이다.

누구나, 어디서든,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모든 일을 바로보고 바로 알아야 힘 있는 목소리를 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사회구조로 인한 개인들의 삶이 이렇듯 무참히 짓밟히는 시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그러한 시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적하여 우리에게 고하고 있다.

두 눈의 거리만큼 떨어진 한 쌍의 조리개로 찍은 두 장의 누드사진. 우리가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모습일 것이다. 현실은 두 장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두 장을 겹쳐지도록 만들면 정확하게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처럼 현실도 멀찌감치 바라보는 흐릿한 모습이지만 그 현실의 문제 속에는 엄청난 사실이 또 하나 있는 것. 우리는 돋보기를 들이대어 이 사실을 보아야 한다.

「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은 ‘반석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 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라고 세상의 중심에서 힘차게 외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을이 오면 그녀는>

 
가을이 오길 기다리는 그녀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치료법도 없는 알레르기를 앓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하나뿐인 엄마에게서 날 때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녀와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그리 흔치만은 않지만 대부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각기 다른 환경과 각기 다른 상처를 갖고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녀는 그 상처를 스스로 이겨낼 방법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뿐인 엄마에게 조차도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녀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등록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전문대에 입학한다. 학교에서도 그녀는 존재감이 없다. 종강 무렵에서야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로 겨우 존재가 드러난다. 그 덕택으로 인해 여름방학동안 출판사에서 셰익스피어를 아동용 만화로 개작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 일거리마저 곧 잘리게 된다. 이유는 그녀가 개작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재미도 없고, 주제 파악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처음 읽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읽는 내내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에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에게는 황금덩어리를 비단주머니에 넣어주고,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에게는 녹인 황금을 목구멍에 부어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를 자신의 엄마를 대입 시킨다. 항상 남을 시선만 의식하며 살아온 우아로 치장한 엄마에게 하나뿐인 딸인 그녀의 외모란 결코 남에게 자랑은커녕 보이고 싶지 않은,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찾아온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그녀에게 커피 물을 끓이라 시키고, 엄마는 우아한 자태로 그 끓인 물을 커피 잔에 들이붓는 모습을 떠올린다.

설상가상으로 원래 받기로 한 액수보다 훨씬 못 미치는 돈을 집으로 돌아가는 시장통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잃어버리게 된다. 다리까지 다친 대다가, 지갑까지 잃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주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도와 병원까지 데려가 준다. 그리고 지갑을 되찾아 집로 찾아온다.

그녀는 스물일곱 해 인생에 처음으로 남자와 정답게 앉아 그 남자가 해준 김치복음밥을 나눠먹는다. 그리고 엄마에게 자랑이라면 자랑을 앞세워 그와 함께 엄마를 찾아간다.

그녀의 엄마는 갖고 있던 유산도 전부 날리고 도망 다니다 교회에 딸린 곁방에서 교회 일을 도우며 살고 있다. 엄마는 그녀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별 볼일 없는 전문대학에 들어간 것이 남 보기에 창피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야기 내내 불안불안하던 그녀의 갈등은 이마에 난 알레르기 발진처럼 그 시점에서 터져버린다.

그녀가 데리고 온 남자 앞에서 엄마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하여 폭발시킨다. 그리고 돌아가는 전철에서 우연히 지나치는 취객과 부딪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그녀의 남자에게도 끓고 남은 분을 퍼부어 버린다.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린다. 남자가 떠나고 마지막 전철도 떠나보낸 그녀에게 남은 것은 증오와 또다시 생긴 상처뿐이다. 그리고 알레르기가 가라앉는 가을의 계절이다.

그녀는 떠난 남자를, 끓어진 막차를, 등록도 못한 가을학기를, 그녀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을 여대생 기숙사 입주권을, 상상의 전령사가 보내올 또다른 가공할 소식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그것들을 기다린다.

그녀의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녀는 햇배추로 끓인 된장국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반찬을 가리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미끌미끌한 미역이나 미역초무침은 증오가 투사된 음식이다. 생일 때나 어머니가 해산할 때 먹는 그것들은 그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고 그의 모성에 대한 불신과 증오인 것이다. 미역의 미끈거리고 천덩거리는 느낌 그대로를 어머니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자학적인 증세로 극심한 알레르기를 앓고 있으면서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 무렵이면 무작정 시장통을 헤매인다. 끼니로는 시원한 냉면을 먹거나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는게 아니라, 더운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컵라면이나 천 원짜리 김밥, 싸구려 튀김 같은 것을 먹는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런 알레르기가 있다면 한 낮의 햇빛을 피하는 것은 물론 하다못해 바르는 약이라도 찾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증세가 더 악화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엄마의 변덕스럽고 무자비하게, 또 집요하게 우아로 치장한 잘못된 모성으로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다.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삶도 모자라 딸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다.

엄마는 과연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가 수백, 수천 번 곱씹게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그녀의 엄마조차도 남을 의식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아니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항상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 이야기 안에서는 전혀 엄마다운 모성을 읽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녀가 데리고 온 남자 앞에서 조차 딸을 위하는 척, 철저하게 가식적인 행동뿐이다.

엄마 역시 사랑에 어두운 사람인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를 갖자마자 남편을 읽고 남겨진 유산도 날리고 얼마 안남은 돈조차 납골당 분양사업마저 실패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믿음을 주면서 키우지는 못하는 것이다.

하나뿐인 자식에게 해 준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자기 자신의 신세도 추스르지 못하는데 딸을 진정 사랑으로 키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직장도 그만두고 별 볼일 없는 전문대에 들어간 것을 남 보기에 창피하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에게 사랑으로 찾아온 남자 역시 불안과 불신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미 놓쳐버린 과거를 미련하고 집요하게 후회할 할 뿐이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가 나쁜 전령에게 주는 끓는 황금액을 스스로 들이 붓고 있다. 그녀에게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간에 상관없이 끓는 황금액을 들이부어 표출되지 못하는 분노와 증오를 삭힐 뿐이다. 그녀의 상처는 알레르기가 극성이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바람에 식어 점점 더 딴딴히 굳어버릴 것이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이것뿐이 없을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렇지 않다, 라는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녀와 똑같은 삶을 살진 않지만, 때에 따라서 사소하지만 스스로를 자학하는 일이나 자신의 실수로 생기는 분노를 경험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때마다 끓는 왕금액을 스스로에게 들이 부어 상처를 굳혀버리기보다는 황금액이 굳어져 황금덩어리를 자신에게 선물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작으나마 힘을 얻을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통합형 논술 내비게이션 (위너스초이스)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효순 엮음 / 위너스초이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고양이로소이다. 제목처럼 주인공은 고양이다. 작가는 주인공인 고양이의 시선으로 지식계층과 물질적인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 주인공인 고양이 역시 지식게층에 속한 작가 자신임을 뜻하며 자기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독자들에게 말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물밀듯이 무분별하게 상업위주로의 일본 문학서적이 수입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일본 문학에 대해서 우리나라 독자들의 그리 많은 정보를 얻기는  그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고전에 대한 이러한 중편 문학은 우리보다 선진국인 과거의 일본의 시대를  이해를 하는데 매우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책은 논술위주로 작가의 소개서 부터 주제에 관한 설명도 별도로 나뉘어져 있어 일본 고전에 대한 이해를 더욱 쉽게 해주고 있다. 

 고양이로소이다는 주인공인 고양이가 배고픔에 떨다 어느 중학교 선생집에 들어가 살게되면서 그 집주인과 주변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한다. 그러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어느새 고양이 자신도 사람처럼 의인화 되어 나중에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실정까지 가게된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 낸 쾌락의 도구인 맥주라는 알콜을 먹고 취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책의 제목과 같이 작가 나쓰메 소시키는 고양이와 같은 날카로운 비유로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하며, 해학적으로 웃음을 주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