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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평점 :
<가을이 오면 그녀는>
가을이 오길 기다리는 그녀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치료법도 없는 알레르기를 앓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하나뿐인 엄마에게서 날 때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녀와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그리 흔치만은 않지만 대부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각기 다른 환경과 각기 다른 상처를 갖고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녀는 그 상처를 스스로 이겨낼 방법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뿐인 엄마에게 조차도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녀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등록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전문대에 입학한다. 학교에서도 그녀는 존재감이 없다. 종강 무렵에서야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로 겨우 존재가 드러난다. 그 덕택으로 인해 여름방학동안 출판사에서 셰익스피어를 아동용 만화로 개작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 일거리마저 곧 잘리게 된다. 이유는 그녀가 개작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재미도 없고, 주제 파악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처음 읽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읽는 내내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에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에게는 황금덩어리를 비단주머니에 넣어주고,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에게는 녹인 황금을 목구멍에 부어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를 자신의 엄마를 대입 시킨다. 항상 남을 시선만 의식하며 살아온 우아로 치장한 엄마에게 하나뿐인 딸인 그녀의 외모란 결코 남에게 자랑은커녕 보이고 싶지 않은,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찾아온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그녀에게 커피 물을 끓이라 시키고, 엄마는 우아한 자태로 그 끓인 물을 커피 잔에 들이붓는 모습을 떠올린다.
설상가상으로 원래 받기로 한 액수보다 훨씬 못 미치는 돈을 집으로 돌아가는 시장통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잃어버리게 된다. 다리까지 다친 대다가, 지갑까지 잃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주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도와 병원까지 데려가 준다. 그리고 지갑을 되찾아 집로 찾아온다.
그녀는 스물일곱 해 인생에 처음으로 남자와 정답게 앉아 그 남자가 해준 김치복음밥을 나눠먹는다. 그리고 엄마에게 자랑이라면 자랑을 앞세워 그와 함께 엄마를 찾아간다.
그녀의 엄마는 갖고 있던 유산도 전부 날리고 도망 다니다 교회에 딸린 곁방에서 교회 일을 도우며 살고 있다. 엄마는 그녀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별 볼일 없는 전문대학에 들어간 것이 남 보기에 창피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야기 내내 불안불안하던 그녀의 갈등은 이마에 난 알레르기 발진처럼 그 시점에서 터져버린다.
그녀가 데리고 온 남자 앞에서 엄마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하여 폭발시킨다. 그리고 돌아가는 전철에서 우연히 지나치는 취객과 부딪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그녀의 남자에게도 끓고 남은 분을 퍼부어 버린다.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린다. 남자가 떠나고 마지막 전철도 떠나보낸 그녀에게 남은 것은 증오와 또다시 생긴 상처뿐이다. 그리고 알레르기가 가라앉는 가을의 계절이다.
그녀는 떠난 남자를, 끓어진 막차를, 등록도 못한 가을학기를, 그녀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을 여대생 기숙사 입주권을, 상상의 전령사가 보내올 또다른 가공할 소식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그것들을 기다린다.
그녀의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녀는 햇배추로 끓인 된장국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반찬을 가리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미끌미끌한 미역이나 미역초무침은 증오가 투사된 음식이다. 생일 때나 어머니가 해산할 때 먹는 그것들은 그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고 그의 모성에 대한 불신과 증오인 것이다. 미역의 미끈거리고 천덩거리는 느낌 그대로를 어머니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자학적인 증세로 극심한 알레르기를 앓고 있으면서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 무렵이면 무작정 시장통을 헤매인다. 끼니로는 시원한 냉면을 먹거나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는게 아니라, 더운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컵라면이나 천 원짜리 김밥, 싸구려 튀김 같은 것을 먹는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런 알레르기가 있다면 한 낮의 햇빛을 피하는 것은 물론 하다못해 바르는 약이라도 찾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증세가 더 악화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엄마의 변덕스럽고 무자비하게, 또 집요하게 우아로 치장한 잘못된 모성으로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다.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삶도 모자라 딸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다.
엄마는 과연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가 수백, 수천 번 곱씹게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그녀의 엄마조차도 남을 의식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아니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항상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 이야기 안에서는 전혀 엄마다운 모성을 읽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녀가 데리고 온 남자 앞에서 조차 딸을 위하는 척, 철저하게 가식적인 행동뿐이다.
엄마 역시 사랑에 어두운 사람인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그녀를 갖자마자 남편을 읽고 남겨진 유산도 날리고 얼마 안남은 돈조차 납골당 분양사업마저 실패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믿음을 주면서 키우지는 못하는 것이다.
하나뿐인 자식에게 해 준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자기 자신의 신세도 추스르지 못하는데 딸을 진정 사랑으로 키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직장도 그만두고 별 볼일 없는 전문대에 들어간 것을 남 보기에 창피하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에게 사랑으로 찾아온 남자 역시 불안과 불신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미 놓쳐버린 과거를 미련하고 집요하게 후회할 할 뿐이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가 나쁜 전령에게 주는 끓는 황금액을 스스로 들이 붓고 있다. 그녀에게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간에 상관없이 끓는 황금액을 들이부어 표출되지 못하는 분노와 증오를 삭힐 뿐이다. 그녀의 상처는 알레르기가 극성이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바람에 식어 점점 더 딴딴히 굳어버릴 것이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이것뿐이 없을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렇지 않다, 라는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녀와 똑같은 삶을 살진 않지만, 때에 따라서 사소하지만 스스로를 자학하는 일이나 자신의 실수로 생기는 분노를 경험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때마다 끓는 왕금액을 스스로에게 들이 부어 상처를 굳혀버리기보다는 황금액이 굳어져 황금덩어리를 자신에게 선물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작으나마 힘을 얻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