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침의 발명 - 김행숙이 만난 시인들
김행숙 지음 / 케포이북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흑백 신비의 풍경 - 이성복

카프카를 사랑하는 이성복 시인은 ‘절문근사’라는 표어를 문에다 써놓고 절실하게 묻고 비근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만 절실하게 묻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묻기 보다는 타인에게 묻고 의존하는데 익숙하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는 절실하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에게는 절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도 어떠한 사물을 선택하는 것은 시인 밖의 것이지만 그것에서 오는 영감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만의 것이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느끼는 아픔과 고통도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고 견뎌내야 하는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의 문제다. 스스로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바라보고 인정하기 두려워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도와주는 이가 시인이 아닐까. 이성복 시인의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란 말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내가 아픈지도 모르고 타인의 아픔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또 현대 사회가 남의 아픔을 즐기고 더 큰 아픔이 되길 상처에 소금뿌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성복 시인은 카프카의 시골의사처럼 끊임없이 치유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독자이든, 시인 자신이든 상관없이 수많은 상처를 열어보고 원인을 찾으려 한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알아차려 고쳐서 완쾌되는 일도 드물다. 특히 정신척인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병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만큼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이성복 시인은 그 병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일상에서 습관처럼 매일 반복되는 것들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라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사건이나, 누구나 썩어버린 시선으로밖에 바라볼 수없는 삶의 형태로 자리 잡는 것이다.

‘남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일 때 진정으로 나의 시선이 나에서 너로 변신할 수 있고 옆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듯 정신이 병들어 있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스스로를 절실하게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는데서 결과가 고통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한다.

 

천개의 서랍 - 황병승

모름지기 시인이란 ‘고백하는 자’이며 시는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황병승 시인의 고백이란 자신에서 한발 떨어져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 한다는 소리일까. 남의 이야기는 그 주인이 없는데서 말하면 더 재미있고 흥미롭다. 아무리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비밀이야기가 되며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까지도 즐기게 된다. 시인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남의 이야기 하듯 말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 같다.

황병승 시인의 목소리는 현재 사회 부작용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예전의 가난에서 오는 이야기나 내면의 성찰, 자연과 더불어 이야기하기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사춘기 시절의 아픔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이 많다. 그들의 성장통이나 성 정체성에 대해서 왜 그것들이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지를 파헤치기보다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무거운 이야기를 만화나 음악으로 가볍게 소통한다.

시의 세계도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예술이라 다들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란 꼭 ‘시적이어야 한다’ 는 고정적 틀을 벗어나는 시인이 황병승 시인이 아닌가 싶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도 변했지만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적인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단지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표현하는 방식도 발전되어서 보여 지는 것뿐이라 말하고 싶다.

황병승 시인의 소재는 요즘세대들이 흥미롭게 느끼는 소재들이다. 어떻게 보면 ‘뭐, 이런 게 시 야.’ 할 정도로 만화주인공들이나 중성의 인격들이 시안에서 살아간다. 인디밴드의 음악 가사들이 시적 언어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 세계에서 그만의 케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고 고통을 호소하고 시를 즐긴다. 이렇게 시어의 소재들이 변하긴 하였지만 말하고 있는 주제는 똑같다. 어떻게 보면 그 케릭들을 내세워 그들만이 가진 아픔을 각자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한편의 스토리 라인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시 한 편당 그 주인공들을 내세우고 사건을 보여주는 식이다. 황병승 시인의 작품들은 각각 그 작품의 색깔이 다채롭고 뚜렷하다. 수많은 인물 설정, 사건들, 주제들…… 스스로 시를 재미있게 즐기는 시인이다.

 

꿈의 뿌리는 몸에 있고 몸의 뿌리는 꿈에 있다 - 이원

‘영혼이 자유롭길 소망한다.’ 이원 시인의 시세계를 접하며 느낀 점이다. 이원 시인은 영혼이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시인이라고 느꼈다.

몸속에 박힌 정신세계 속에서 어떠한 과거의 아픈 사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들여다보고 고통을 음미하여 이겨내는 일.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마음이 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 이것이 이 원 시인의 시 쓰기인 것 같다.

이원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나는 좀 더 일차원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꿈의 뿌리가 몸에 있고, 몸의 뿌리는 꿈에 있듯이 꿈꾸는 데로 몸이 움직인다면 그것이 일차원적 삶이 아닌가 한다. 사람이 하루에 6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는데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되면 그것에만 집중하여 몸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관련된 것들로 가지를 쳐나가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은 하루 종일 6만 가지의 생각과 맞물려 그 몸의 주인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몸으로 행동하여 나타내기를 주저한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하는 소리는 마음속에서 잠만 잘뿐 그 힘을 일고 많다. 시인은 그런 마음을 시를 쓰는 것으로 풀어내고 있다.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듣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마음을 믿고 힘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노력 끝에 얻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나 자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에 따라 마음은 자신을 위해서만 말할 것이다.

굳이 입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마음이 하는 대로 몸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몸의 뿌리는 꿈에 있고, 꿈의 뿌리는 몸에 있다는 말의 뜻인가 싶다.

 

진은영과 친구되기 - 진은영

진은영의 시 세계를 통해서 마주침의 발명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은영의 시는 철학적 사유가 흠씬 묻어 나온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그래서 적어도 도달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혹은 누군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 이루어지길…….’ 내 삶이 엉터리라면 나와 같은 사람은 모두 엉터리일 것이다. 이유는 단지 내가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친구에게는 엉터리가 이니기를 당부하는 메시지로 와 닿았다.

‘돌이 아니라, 쏟아지는 별들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일까?/ 친구, 정말 끝까지 가보자.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나는 여기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 쏟아지는 별들에게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이란 그럴 수 만 있다면 정말 죽을 만큼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행복을 위해 친구와 나란히 갈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일 것이다. 함께 부딪히며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친구이기에 가능 할 것이다.

진은영 시인은 모든 것을 마주친다. 시인과 시인 사물과 사물, 모든 미래로의 길들까지도 부딪쳐 마주침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간다.

시 또한 전혀 없는 것을 창조해내기가 아닌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모든 것에서 갖고 있는 것들을 서로 마주치게 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표현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은 창조자가 아닌 발명가이다. 언어의 발명가.

 

빛의 소묘 - 박형준

인가의 삶이란 빛에 반짝이여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보들레르의 시에서처럼 천년보다 많은 추억을 갖고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그 추억 하나하나가 빛에 의해서 반짝이는 삶을 살았던 것이 인간일 것이다. 그 기억을 되돌아보고 그 세계에 빠져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동물은 인간뿐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쩌면 축복받은 동물일라 하겠다.

어느 한 사물을 통해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해 언어로 표현하는 일, 그래서 창작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까.

빛의 소묘란 기억이 한순간 반짝이며 떠오를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나만의 빛깔을 입혀 그려내는 일이 인 것 같다.

퇴색된 추억의 부족한 부분을 기억해내어 아름답거나 오히려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내는 작업이다.

책에 실린 시 중에서 ‘바닷물이 수챗구멍으로 역류하곤 했다’에서 시인의 과거 추억 속으로 우린 같이 역류하여 들어가 본다.

‘연어처럼 싱싱한 종아리를 걷고/ 무릎까지 올라온 바닷물을 따라/ 더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장마철 집안에 물이 역류하여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때 했을까. 그냥 빗물도 아닌 바닷물의 검은 악취 속에서 어린 아이들이 종아리를 걷고 물을 퍼내는 장면이 생생하면서도 연어 같다는 비유가 삶의 처절함보다는 아름답기 그지없게 묘사 되었다.

‘다락방 같은 마루문을 열고/ 소녀들이 오줌을 누고/ 눈부신 엉덩이가 철철 소리내며/ 먼 바다로 통신을 하였다/ ’ 다락방만한 마루에서 문을 열고 볼일을 보는 소녀를 엉겹결에 보게 된 소년의 모습. 그 소년은 보려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본의 아니게 목격한 소녀의 오줌 누는 모습을 엉덩이가 눈부시게 철철 소리가 난다고 표현했다. 마치 신윤복의 그림 ‘단오’ 풍경을 묘사한 것같이 생생하다고 느꼈다. 신윤복의 ‘단오’에서 스님과 동자승이 여인들이 목욕을 모습을 훔쳐보는 장면이 겹쳐진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남자아이는 이성이라하기엔 어린 계집아이가 눈부시게 그려진다. 단지 그려지는 것만이 아닌 청각까지도 울려댄다. 오줌이 쏟아져 먼 바다로 휩쓸려 흘러들어가는 소리가 난다.

박형준 시인의 시는 기억이 기억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시와 삶, 그 하나에 이르는 길 - 김명인

김명인 시인이 ‘나를 그토록 지속적으로 긴장하게 만든 대상은 시’ 뿐이었다고 한다.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그 감동의 자리는 불가해한 시쓰기의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자리, 그 고통은 삶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막막한 느낌들과 통하는 것, 시를 선택한 것까지 포함해서 회오의 순간들도 함께 경험하는 것을 김행숙은 저녁때까지 걸어갈 용기라고 했다.

시는 시인이 살아가는 인생에서 생기는 모든 종류의 결핍을 메우려 함일 것이다.

삶에 있어서 끝은 죽음인 것처럼 되돌아가는 반환점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녁때까지 걸어가는 용기처럼 시쓰기도 되돌아갈 여력을 남기지 않고 쓰는 것이다. 중도에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삶도 중간에 멈쳐 서지 않으므로. 중도에 포기하는 삶도 있겠지만 그런 삶에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고자 쓰는 것이 시일 것이다. 그리고 삶이 끝나는 죽음까지도 이겨내려 용기 내어 써내려 가는 것이 시이니까.

김명인 시인은 외로움을 ‘삶에서 시간의 마모를 허락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하고 한다. 그럼 감내가 공간의 고절감이나 시간의 막막함을 견딜 수 있게 하고 고독과 허무를 미적 깊이로 전환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외로움 속에서 시인은 홀로 견뎌내며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한 가지 커더란 생각이 파문이 일며 그 파문의 진동은 외로움을 즐기는 원천이 될 것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사람에게 있어 제일 큰 두려움이라 생각된다. 그것을 이겨내어 즐길 수 없다면 진정한 시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눈물’ 에 대한 이야기기 흥미로웠다. ‘잘 우는 사람/ 안 우는 사람/ 못 우는 사람’ 이라기보다 현대의 사람들은 ‘울 줄 아는 사람과 울 줄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싶다. 울길 울어도 진실로 우는 것인지 남에게 보여주려 우는 것인지. 그것을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예전엔 보여 지는 울음을 울었기에, 울 줄 모르는 사람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히려 예전보다 잘 울지 않는다. 진정 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나서부턴 희한하게도 내 자신의 일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 대신 시를 읽거나 책을 읽다가, 연극을 한편 보고나서 흐르는 눈물의 횟수가 더 잦아졌다. 이것이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투명한 것이라 하는데, 단단한 눈물, 침묵과 대등한 눈물, 그런 울음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시 쓰기 인 것 같다.



*

 

60억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것과 같이 시의 세계도 우주만큼 무한하다고 느꼈다. 우주의 세계 같은 시의 세계에서 이제 겨우 갓 태어난 아기처럼 울음을 배웠을 뿐인데도 아니, 울음조차 제대로 낼지 못하겠지만 시는 너무나 매력 있고 재미있다.

우주 같은 감동도 준다. 시를 읽다 어쩔 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 행복해 한다. 단지 시 한편으로 가슴이 뛸 수 있다 게 이렇게 위대한 일이고 행복한 경험이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남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다. 시를 공부함으로써 시안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는데 요새 사람들과는 시에 대해 이야기 할 상대를 찾기가 힘들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이야기 할 때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각박한 삶에 대한 일반화된 주제가 주가 때문이다. 하물며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난다 치더라도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기도 막막하다. 혹시나 외계인 취급할까봐서이다. 그만큼 요새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아니, 시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그러니 걱정이다. 앞으로 더 외로워 질 것 같다. 공자의 말과는 달리 시를 배움으로서 남들과 이야기하기 힘들어지고 외로움에 더 깊이 빠져 버릴 것 같다. 이것도 내가 앞으로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이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