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연수의「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은 ‘실낱같지만 확실한 무엇’ 인 단 한 장의 사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검은 반원의 양옆으로는 'Pier……s1895'가 쓰인 사진 한 장으로 이야기가 팽팽히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이 사진 한 장이 독자들을 향해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끔 활짝 펼쳐진다. 그렇다고 이 사진 한 장으로 보물을 찾는다거나 어떠한 인물을 찾는 식의 내용 아니다. 그것은 고난에 찬 한국현대사의 모든 격동기를 온몸으로 지나온 한 남자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그 사진을 얻게 된 시대부터 1990대까지의 크고 작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적 사건까지를 펼쳐 보여준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세태소설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 폭력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의해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무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영향력을 아주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의 주인이자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기미년 만세 행렬’ 속에서 태워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4·19, 5·16 등 한국 현대사의 최중심지를 관통해온 삶을 적은 203행의 서사시를 자손에게 남겼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드러내는 것을 모두 태워버리고 이 사진하나만 간신이 주인공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사진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돼 남양군도의 어느 열대 섬까지 내려갔던 할아버지가 일본군이 패전한 뒤 미군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가져온 것이다. 그 사진은 추측하건데, 전쟁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줄 수 있는 환각과 같은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당시의 상황이 꿈이길 바라고 그 사진에서 받는 위안이 현실이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희망과 같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살아온 한국사는 그 시절을 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라면 똑같은 삶을 관통해온 것이다. 역사는 한 개인에게만 특별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역사가 만들고 있는 특별한 사건 중심에 누가 어떠한 특별한 일을 겪었느냐가 차별화되어 기록에 남는 것이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삶이란 것은 무엇일까. 이 사진과 같이 그 사람이 사진을 얻게 된 상황을 되돌아 짚어보는 것일 것이다. 그 사진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왜’를 찾아가 보면 한 개인이라는 중심을 기준으로 라디오 수신기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이라는 전파를 타고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나, 사건 등과 연관 있는 사람들까지 넓게 퍼져가는 것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모든 사회의 사건 속에 우리는 각자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 우리 후손들이 알고 있는,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남긴 누구나 알고 있는 한국사와 달리 그 중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은 이들이 겪은 역사의 모습은 어떠한가. 단지 그들이 특별히 죄를 짓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월적인 존재로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 우월적인 존재란 소설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1979년에 일어난 광주 민중 항쟁을 예를 들어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은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해 죽음을 당한다. 같은 시간 서울에 있는 대학생은 한가로이 커피를 즐기며 노닥거렸다는 것이다. 1968년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고등학생이었던 정민의 삼촌이 ‘내셔널지오그래피’ 라는 잡지를 들고 서있다. 마침 그 장소에서 수류탄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 정민의 삼촌은 당황하여 뛰었고, 청원경관이 부르는 소리에 서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흠씬 몰매를 맞게 된다. 같은 시기인 1968년 5월 3일 오후 네 시 사십오분, 프랑스 공화국 보안 경찰대는 소르본 대학 광장으로 출동해 거기 모인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는 1894년과 1871년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바로 전날, 한국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기동타격대를 증설했다. 하루를 차이로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파리에서의 사건이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다지 그 시기에는 그런 놀란 만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그 폭력이라는 것이 권력에 의해 일어난 일이고 그러한 권력이 훼손될 때 폭력은 권력을 강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빈번히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건들은 비단 우리나라만 겪는 불행한 사태가 아닌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나라에서고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누구나 그 시기를 살고 있던 사람이 겪은 일이지만, 그러한 사건의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가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게 겪는 역사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이렇듯 아무 힘없이 사회의 권력에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죄감과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만들어 우수한 인재이든, 평범했던 사람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삶 자체를 무너지게 만든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용산주민 철거 참사사건’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사건을 겪고 살고 있다. 하지만 단지 우리가 그 철거 주민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당사자들이 당한 권력의 폭력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듯 겪는 것이다.

사회는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이며 그런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같은 사회, 사건 안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현재는 1990년대이다. 이 시기의 우리또래 운동권 대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목숨을 걸고 몸으로 시위하던 때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가 대학생활의 안락함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윗세대들의 피가 섞인 투쟁이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만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그들이 바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쓸려 보냈다면 지금 우리가 즐기는 학교생활도 결코 없으리라.

그 당시의 운동권 대학생이 자신들의 뜻을 위해 방북을 하려 독일로 가는 것에서 그것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기에 한창 공부를 하고 꿈을 펼칠 시기인 학생들이 그런 신념을 품을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은 투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 최루탄이 정신없이 터지는 길에 서 있었을 뿐이다.

2010년을 앞둔 이 시점,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을 보면, ‘세상이 정말 좋아졌구나! 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북한 밀입국을 위해 독일까지 갔다. 지금의 생각으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의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모습을 작가는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불과 20년 전전에는 ‘이러했었다.’ 고 말이다.

한국이란 세계에서 떠나 독일이란 먼 나라까지 가서 만나게 된 사람역시 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죽은 삶을 살았던 이길용이란 사람이다.

그는 1984년 서울의 공사판을 떠돌며 일용노동자로 생활하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광주 무등산에서 야바위꾼을 만나 돈을 다 잃고 한기복이란 사람을 만난다. 한기복은 광주 민중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광주에온 교왕 바오로 2세를 죽이겠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주 도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그 사건으로 이길용은 23일 동안 치안본부 대공 실에서 죽음과 같은 고문을 당하고 수사관들에게 쇠뇌를 당해 강시우란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대학 구내 서점에 취직하여 운동권학생들에게는 한기복의 분신자살한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전태일 같은 영웅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것 역시 이길용이 일부러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이 아니다.

강시우는 한 학생이 분실 자살하는 광경을 사진촬영하게 되고, 일본에서 놀러왔던 일본 유학생 레이가 그 장소에서 그것을 목격하다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려 그 둘이 만나게 되는 인연이 발생한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국에 온 레이를 우연히 또다시 만나게 된다. 레이의 할아버지와 강시우의 할아버지의 고향이 군산인 것을 알게 되자 함께 그곳을 여행을 간다. 1910년대 기간지 간척사업으로 한국에 왔던 레이의 할아버지가 군산에서의 배운 노랫가락에서 공통점을 찾아 그 둘은 이미 그들의 할아버지 때에 이미 만났을 거라는 추측도 하게 되고 결국 그 둘은 연인 사이가 되어 함께 독일로 간다.

강시우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히로뽕 만드는 일을 이어서 하다 죽기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또 하나의 입체 누드 사진.

그 사진 하나로 이길용의 할아버지세대 당시 일본의 사회모습까지 그려낸다. 태평양전쟁의 후유증으로 ‘히로뽕’이라는 마약이 나라전반에 뿌려져 있었던 일본사회를 보여준다.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군산에서 간척지 사업을 벌이려 할 때 그럼 이길용의 할아버지도 그곳에 있었다는 말인가. 소설이 독자에게 조금 억측을 만들어내는 면도 있다.

유태인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스실로 가는 동족들에게 기타를 쳤던 ‘칼 하프너’ 그는 죽음과도 같았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헬무트 베르크’란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한다. 사회의 부조리는 이렇듯 개인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죽이고 싶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1984년에 백남준이 전 세계를 위성으로 연결해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비디오아트를 선보였고, 1986년에는 챌린저 호 폭파장면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날부터 역사는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한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주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섭동이란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전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조우라 하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속도가 변하게 된다.’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소설세계는 이 섭동과 같은 구조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과 그의 할아버지, 정민과 정민의 삼촌, 이길용과 레이와 그들의 할아버지 등등 모든 연결고리가 그렇게 섭동의 원리로 걸려 있는 것이다.

결국, 이길용과 주인공은 사진의 한 귀퉁이에 적힌 Pier……s 1895의 근원을 찾게 된다.

1985년 피에르 루이스는 앙드레 지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친구였으며, 폴발레리를 데뷔시킨 사람으로 「빌리티스의 노래」라는 산문집을 쓴 작가였다. 후에 사진작가 데이비드 해밀턴이 만든「빌리티스의 노래」란 동성애드 코드의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그 사진은 그것들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핼무트 베르크가 말한 트라벤 이란 사람이 쓴 “뭔가를 찾아 나선 힘든 여행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보물. 그게 진정한 보물이다. 그걸 찾기엔 내 삶은 너무 짧게 느껴지리니” 란 말처럼 인생의 참된 진리는 결승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그 순간이 인생의 진리 속에 놓여 있다는 말일 것이다. 
  

작가 김연수는 소설 내내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칼 세이건 이 우주에서 또 다른 칼 세이건 을 만나듯 김연수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우리 모두는 또 하나의 김연수로서 만나게 된 것이다.

김연수가 「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희망적 메시지’를 이야기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랑하며 살자’라는 식의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자는 것일 것이다.

누구나, 어디서든,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모든 일을 바로보고 바로 알아야 힘 있는 목소리를 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사회구조로 인한 개인들의 삶이 이렇듯 무참히 짓밟히는 시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그러한 시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적하여 우리에게 고하고 있다.

두 눈의 거리만큼 떨어진 한 쌍의 조리개로 찍은 두 장의 누드사진. 우리가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모습일 것이다. 현실은 두 장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두 장을 겹쳐지도록 만들면 정확하게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처럼 현실도 멀찌감치 바라보는 흐릿한 모습이지만 그 현실의 문제 속에는 엄청난 사실이 또 하나 있는 것. 우리는 돋보기를 들이대어 이 사실을 보아야 한다.

「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은 ‘반석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 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라고 세상의 중심에서 힘차게 외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