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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생각 수업
강욱 지음, 채원경 그림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연암 박지원 선생님의 작품들은 그저 시험문제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재미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허생전'이니 '양반전'이니 하는 소설도 의무감으로 훑었을뿐 저에게 깊은 생각의 여지를 주지는 못했죠. 대학시절 잠깐 본 '열하일기' 또한 지성인이면 누구나 보는 책이라기에 읽는 흉내만 내었습니다.
과거의 인물이 쓴 글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얄팍한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 이 책.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의 생각수업>. 조선후기 양반으로 태어나 양반의 권리를 누렸지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연암 박지원. 그의 학식으로 보자면 일찌감치 벼슬길에 오를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오십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올랐고, 그나마도 말단직책이었죠. 그러니 그동안 그의 살림이 얼마나 곤궁했을지 또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연암선생님의 부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허생전'에서 허생이 매일 무위도식하며 글이나 읽고, 허생의 부인은 곤궁한 살림을 꾸리느라 힘들어 하는데, 아마도 '허생전'은 연암 선생님의 생활을 빗대어 쓴 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에는 연암 선생님이 남긴 글들이 거의 다 나옵니다.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허생전','양반전' 뿐만아니라 지인들의 책에 써 준 서문도 나오고, 그의 누이가 죽었을때 묘비에 썼던 묘지명까지.. 그의 발자취가 모두 담겨있어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연암 선생님의 생애가 한눈에 보이게 됩니다.
연암 선생님의 글을 보면 그의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편견이 없었고, 중용의 자세를 유지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능양시집> 서문의 일부분을 보면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저 까마귀를 보자. 검기로 말하자면 그 날개보다 더 까만 것이 없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까만 까마귀라도 언뜻 보면 엷은 노란빛이 감돌고 다시 보면 또 연한 녹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햇빛이 비치면 자줏빛으로 번뜩거리다가 또 눈이 아물거리면서는 비취빛으로도 변한다. 그렇다면 까마귀를 '푸른 까마귀'라고 해도 좋고 '붉은 까마귀'라고 해도 좋다. 이런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일정한 빛깔이 없는 법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눈에 비친 것을 보이는 그대로 판단하지 않고 '저것은 이러저러한 빛이다'라고 미리 단정 짓곤 한다. 또 눈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야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심지어는 눈으로 보지도 않은 채 마음속으로 미리 단정 짓곤 한다. -<능양시집> 서문 중-
까마귀 한마리를 두고 이처럼 철학적인 생각을 펼칠 수 있을까요? 까마귀는 검다고 단정지어 말하지 말고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라는 연암 선생님의 말씀은 몇백년이 지난 오늘 들어도 새롭고 훌륭한 말씀입니다.
<능양시집>의 서문 뿐만아니라 이 책을 읽는 내내 연암 선생님의 독특하고 재미있는 글들을 접할 수 있어서 제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최근들어 연암 선생님의 글들이 책으로 많이 출간되는것 같습니다. 그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연암 선생님의 말씀들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지요. 좋은 책은 시대를 아우른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