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7

1.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와 성공비결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홍길동>. 1967년 상영 나흘 만에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이후 <호피와 차돌바위>, <손오공>, <황금철인> 등이 1968년에 상영되었지만 1971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끝으로 제1차 애니메이션 역사는 끝난다. 물론 1976년 <로보트 태권 V>가 등장해 잠깐 붐이 일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본격적인 역사를 <백사전>이 등장한 1958년으로 본다면 우리도 그리 뒤지지 않은 것 아닌가?

한국 애니메이션이 중간에 단절되고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정부의 지원이 현재 애니메이션의 침체를 살릴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영상물의 침체기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독립프로덕션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죽었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본을 끌어모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자본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있다. 일본은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에 성공했다. 상황이 열악한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그들만의 노하우다.

첫째, 일본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과 뱅크 시스템을 택하였다. 이는 텔레비젼 방영분의 경우(1회 30분) 1초에 24장이라는 디즈니영화와는 달리 1초에 2~3장 정도의 그림만을 사용하는 절약형 방식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건비가 저렴한 우리나라에 동화와 채색을 하청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불어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뱅크 시스템이다. 말하자면 재활용인 셈인데 화면상 같은 장면이 나오도록 줄거리 배치를 고려하는 것이 이것에 속한다.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떨어졌느냐? 물론 정교한 장면은 포기하는 대신 다른 재미거리를 포진해놓았다.(뒷부분 작품에서 다르어질 것이다)

둘째, 애니메이션만으로는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 타입 업Type up 방식이다. 비디오, 비디오 CD, 디스크, 케이블, 지역민방 등 2차 배급망을 구축함과 동시에 TV용 제작물을 재활용해 극장판을 만들어 개봉함으로써 수익을 추가시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타이 업Tie up 방식을 채택해 제휴 업체를 확보하고 부가산업을 재창출한다는 것이다. 이는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으며 같은 작품의 애니메이션보다 한 달 정도 일찍 연재를 시작하는 잡지(<소년 점프>)와 단행본 만화의 시장을 활성화시킨다.

셋째, 세계적인 캐랙터 기업인 반다이에서 볼 수 있듯 방영된 애니메이션을 장난감을 통해 다시 선보이는 캐릭터 비즈니스를 꼽을 수 있다. 다분히 기업적 상술로 재탕되는 악폐를 낳기도 하였지만 반다이는 여전히 뻔한 스토리의 슈퍼 히어로 시리즈로 20년이 넘도록 같은 제품을 생산해내고 있다.

2. 일본 애니메이션이 발달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이면에는 위와 같은 살아남으려는 노력 이외에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뿌리를 들 수 있다. 일본인들이 무엇을 보고 재미와 오락을 느꼈는가를 알 수 있는 에도시대의 문화를 살펴보자.

우선 분라쿠를 보자. 이는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인형극이 아동물로 전락한 데 반해 유독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그들의 전통을 고수란히 이어가는 성인용 인형극이다. 분라쿠좌에서 상연하는 분라쿠는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시대물과 연애를 다루는 세와물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당시 민중들은 이러한 상연극을 통해 지방 곳곳의 숨은 이야기와 시대적인 문제들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뿐 아니라 그들을 울고 웃기는 대중물로 자리잡으면서 인형을 통한 무생물의 움직임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그들만의 특징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림을 영상으로 보는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는데 이는 두루마리 그림에 글과 그림이 함께 들어간 에마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겐지모노가타리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의 겐지모노가타리에마끼로 유통되었으니 만화의 초기 형태가 이미 상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에마끼와 더불어 본격적인 만화 그림의 원형이 되는 우키요에의 발달과 향유는 그들의 만화가 현대적인 산물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또한 고급의 문화와 대치되는 대중의 문화로 우키요에가 받아들여지고 발전한 것에서 보여지듯 우리가 흔히 저급/저질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문화 저변에는 대중의 욕구와 욕망, 그들의 이야기와 기호를 적극 수용하여 보급시킨 우키요에와 같은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 만화의 기본 바탕이 되는 대중이 선호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킬 수 있는 그들의 전통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통의 맥락 이외에도 전쟁 이후 많은 화가들이 만화의 세계(영상물도 마찬가지)에 투신하였다는 점도 그들의 만화를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육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 지금 잠깐 든 생각 :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장난감 사장이 될 테다. 똑같은 걸로 20년을 우려먹는 걸 보면 안 될 것도 없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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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8

 

1. 영화를 통해 본 일본 대중 문화


현대 산업사회를 바꾼 발명품으로 꼽히는 키네토스코프는 1893년 커다란 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사진을 일인 가시용으로 볼 수 있었던 기계이다. 이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스크린에 영사된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는 프로젝션 시스템의 개발로 영화의 탄생과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 이후 영국, 독일 등 유럽 선진국가에서는 영화기구의 독자적인 발명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기계를 만들기보다는 외국의 신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적으로 영화의 기구를 수입하였으는 이는 1896년의 일이다. 그들이 신문에 최초로 사진을 실은 것이 1894년이니 서구의 가장 첨단의 문물을 가장 일찍 수입한 나라가 일본인 셈이다.


앞서 살펴본 만화/애니메이션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영상산업이 꽃 피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선진문물의 적극적이고 발빠른 수용도 있지만, 가부키로 대표되는 그들의 공연문화가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상 기구의 도입으로 탄력을 받은 일본은 이후 빠테사와 영화수입계약을 맺음으로써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교역의 터전을 마련한다. 이어 1903년 일본 최초의 극장인 아사쿠사 전기관을 개관함으로써 간다, 오사카에서도 속속 극장이 문을 열게 된다. 이때 영화의 해설을 돕는 '변사'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1930년대 초반 발성영화가 도래할 때까지 유지된다. 1910년에는 신파극과 가부키극을 제작하는 자체 영화사가 만들어지고 1912년 드디어 도쿄 촬영소가 생겨나면서 메이저 회사가 생기고 배우가 양성되는가 하면 서양 작품을 번안하여 새로운 영화로 상영하는 시도가 생겨난다. 이후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며 극장도 많아지고 다양한 작품이 실험된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잠시 주춤했던 영화산업은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도시의 계획과 새로운 질서에 힘입어 20년대 후반에는 일반 관객이 5배 이상 증가하는 이변을 낳기도 한다.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계급문학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서도 리얼리즘 영화가 양산되도 프르키노 단체가 등장한다.


1927년 세계 최초의 사운드 영화인 <재즈싱어>의 등장으로 일본도 1930년에 들어서는 토키영화체제로 바뀌게 된다. 배우의 연기나 목소리, 배경음악 등이 중요해짐에 따라 영화제작이 확대되고 대형 영화사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경연극 배우가 연기하던 자리를 메꿀 전문적인 배우의 등장이 시급해졌다. 그러면서 멜로영화나 소시민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소개되었고 영화는 점점 현대화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치르며 일본 사회는 천황제 파시즘이 대두되면서 전시체제로 바뀌게 된다. 다이쇼 시대에 꽃 피었던 각종 문화산업은 쇼와기에 들어서는 모든 것이 전쟁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퇴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전쟁영화인 <5인의 척후병>, <흙과 병정> 등을 보면 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사쿠라 동기생들이 '사쿠라가 지면 만나자'고 외치는 그들만의 죽음의 미학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영웅이나 검객이 등장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영화들이 만들어진다.


전후 영화는 미군정하에서 전쟁, 군국주의, 원폭, 반민주주의, 칼 등이 등장하는 영화는 검열의 대상이 된다. 검열을 피해가기 위한 예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의 첫 영화 <스카타 산시로>의 배경을 메이지시대로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천황의 패전 발표와 함께 일본사회에 불어닥친 변화는 문화 예술 사회 전반에 혼란과 갈등을 남겼지만 미군에 의해 흘러들어온 락이나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 등은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새로운 문화양식으로 표출된다. 50년대는 구로자와 아키라, 오즈 야스시로. 미조구치 겐지로 대표되는 세계 영화사에 있어 길이 남을 세 명의 거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2. 전후 일본 영화의 특징


전후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1949년 사실상 미군의 검열제가 폐지되고 이후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원폭영화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소개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50년대는 전국민이 사랑을 받는 국민배우 이시하라 유지로가 등장하였고, 60년대는 단카이세대의 주도하에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순수한 극영화(ATG)와 영화사인 쇼치쿠를 중심으로 한 누벨바그가 새로운 흐름으로 실험되었다. TV의 보급으로 영화만의 특징이 더욱 고민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영화(협객영화, 로망 포르노, 샐러리맨 테마의 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70년대에는 독립영화는 많아졌지만 오일쇼크로 인해 상대적으로 영화는 침체기였으며 일본판 007이라 불리는 <남자는 괴로워>,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낚시꾼 이야기> 나 추리영화가 제작되었다. 80년대는 버블경제가 드러나면서 영화시장은 더욱 축소된다.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영화산업 또한 나름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장례식>이나 <병원> , <남극 이야기> 류의 시리즈물과 멜러, 코믹물이 생산된다. 90년대는 그야말로 마이너리티 영화(다케시 류의)와 미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같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영화, 사회성을 테마로 한 영화 등이 다채롭게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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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일본 근대문학의 흐름 1

1. 근대문학의 여명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유신에서부터 태평양전쟁(1868~1945년)의 패전까지를 가리킨다. 이는 갑오경장을 시초로 8.15 해방까지를 근대라고 보는 우리의 근대 구분과 대략 같은 궤에 있다. 메이로쿠샤(明六社, 모리 아리노리가 중심이 되어 1873년 결성된 계몽된 학술 단체.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 쓰다 마마치 등이 핵심 인물이며 서유럽 문명 도입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해나갔다.)는 근대화의 완성을 위해 계몽을 주장했고 이는 부국강병의 국가 이데올로기 구현으로 이어진다. 초기 계몽사상의 핵심은 평등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로 대변된다. 여성, 아이, 상인들 사이 형성된 세속 문학이었던 전근대 문학양식이었던 게사쿠(戯作, 장난삼아 지은 작품이라는 뜻으로 샤레본西落本, 곳케이본, 기뵤시黃表紙, 고칸合券, 요미혼, 닌조본人情本 등이 이에 속한다.)는 공리주의와 실용주의 덕목에 밀려 무용한 것으로 냉대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재빨리 부응한 게사쿠 작가로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이 있다. 게사쿠 작가로는 나가키 로분(1829~1894)이 대표적이며 그는 사양 문물을 소개한 『서양만유』, 쇠고기 요리점에서 서민들의 입을 빌어 개화기 풍속을 풍자한 『책상다리 냄비』와 같은 글을 썼으며 이후 케사쿠 작가들은 신문의 연재를 맡기도 하였다.

『메이지 문학사』를 쓴 나카무라 미츠오는 "메이지라고 하는 시대는 서양의 영향으로 일본사회 전체가 엄청나게 바뀐 시대"라고 하였는데 문화 면에서 이를 반영하는 것이 번역물이다. 입신출세 청년의 이야기인 새무얼 스마일스 『자조론』(1871), 피터 팔리 『서양야화』(1874), 기조 『유럽 문명사』(1874) 등은 근대국가와 문명의 성립과정, 그리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며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번역된 문학작품으로는 에드워드 리튼의 『어네스트 맬트라버스』(1878),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1878), 『달나라 여행』(1878),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872),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880), 알렉상드르 뒤마의 『바스티유 탈취』(1882), 『어떤 의사의 회상』(1882), 폴 베르니에의 『허무당 퇴치기당』(1882), 디즈레 일리의 『크닝스비』(1884) 등이 있다. 이는 과학에 기초한 문명의 경이, 강점, 서양 법률 과제, 생활상 등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소설을 여성이나 아이들, 상인들의 오락거리로 생각하던 당시 문인,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20년을 근대 이식 과도기라고 하는데 이때 문학의 양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정치소설의 등장이다. 1880년대는 자유당, 입헌재헌당이 창립되고 정치활동의 연장선으로 정치소설이 쓰여졌다. 대표적인 것이 민권운동의 승리 과정을 다룬 『설중매』(1886)이며 스에히로 데츠초는 속편 『화간앵』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개진당으로 대표되는 당시 국권운동의 연장으로 야노 류케이의 『경국미당』(1883~1884)이 있다. 그리스 약소국인 테베가 스파르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국권회복'을 역설하는 정치 슬로건이 된다. 도카이 산시는 『기인이 기우』(1885~1897)에서 강대국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다. 셋째는 부국강병을 내세운 '계몽'이다. 이는 당시 여권신장과 맞물려 있으며 사카자키 시란의 『미인국』(1889)을 탄생시키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주류는 역시 정치소설이며 정치소설의 효시라 평가받는 도다 긴도의 『정해파란』(1880) 이후 10년 동안 약 220편의 정치소설이 출간되었음은 이를 반영한다.

1890년대의 특징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정치소설뿐만이 아니라 순수문학의 번역이 활발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호프만, 빅토르 위고, 알프레드 테니슨, 알퐁스 도데, 레오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투르게네프와 같은 세계문학 전집에 속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번역되었다. 이는 지식인, 엘리트층의 소설 창작 의욕을 자극하고 통속적이라고 던져놓았던 소설의 주제에 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20년간을 흔히 "화혼한재和魂漢才에서 화혼양재和魂洋才의 문화 이데올로기로 궤도 수정하는 과도기"라고 하는데 고바야시 히데오는 좀더 정확히 말해 "일본의 근대화는 서양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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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내오랜꿈 > 서구의 철학으로 그려내는 일본의 '얼굴'
유머로서의 유물론 문화과학 이론신서 3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이경훈 옮김 / 문화과학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유머적인 정신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밖에 발견되지 않는 천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 결핍되어 있다. (프로이트, <유머>, 132쪽)

ⓒ2003 문화과학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세계 문학계가 알아주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다. 스스로 '비평가'라고 불리길 자청했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단순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가, 평론가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가 이 책의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스스로 비평가이기를 자청하는 것은 기존의 문예비평의 전통, 곧 비평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고 동시대의 문학(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전통을 잃어버리고 '동업자비평' 수준으로 전락한 현실에 맞서고 저항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 문학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마련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최근에 소개되고 있는 그의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번역서는 '덧붙이는 글' 참조).

이를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는 문화일보를 통해 "가라타니의 저술활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적인 학문풍토와 상당히 다른 세계다. 그는 작은 주제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일본적인 아카데미즘과는 반대로 넓고 큰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는 서구적인 아카데미즘의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문학이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건축, 마르크시즘 등 폭넓은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개방시켜왔다"고 하면서 이런 가라타니의 세계성과 열린 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게 된 이유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천황제에 반대하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에 속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은 이런 가라타니 고진이 1969년부터 작업해온 것들을 모아서 엮은 '평론'집이다. 그 대부분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잡지에 실린 원고들이라고 한다. 평론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공간, 두 개의 19세기', '비데카르트적 코기토',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과 문학, 건축을 오가는 '메타담론'에 가까운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각 글마다 따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는데, 그건 전적으로 필자의 일본 문학에 대한 무지 탓이다.

일본 문학이나 문화에 생경한 필자에게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가들이 나열되는 문학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푸코와 일본', '라이프니쯔 증후군'과 같이 어느 정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글부터 읽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문학보다는 철학에 익숙한 필자의 취향 탓일 것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이건 쓸데없는 선입견에 따른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글이나 단순히 철학이나 문학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영역을 횡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가라타니의 방법론은 어찌 보면 푸코의 '고고학'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푸코가 광기나 성, 권력 등 서구 근대사회의 메타담론에 입각해서 고고학적 계보학을 형성하고 있다면, 고진은 근대국가의 성립,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근대의 형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문학담론의 형성으로써 일본 근대의 기원을 파헤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에서 도입한 이러한 방법론을 이용해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서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원용, '에크리튀르'(Ecruture:문자/글말)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고 이를 메이지(明治)시대의 언문일치 연구를 통해서 다시 데리다를 뒤집어 버린다.

언어에서 문자를 배제한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가라타니는 근대 민족의 형성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근대의 민족은 각각 '세계 제국' 안에서 분절화되어 출현한다. 그것을 정치적인 국가의 측면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에 의해, 아니면 '미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64쪽)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 야콥슨, 데리다는 물론 우리에게 생소한 토키에다와 같은 일본 언어학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지만 결론은 (일본)언어(≒문학)를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분리해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일본만의 고유한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라타니의 인식은 "푸코와 일본"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관해 책을 썼던 (…) 하이데거로부터 코제브, 바르트,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 그들에겐 일본이란 서양 외부의,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where)이며, 그곳에 그들의 '서구' 비판이 투사되고 있다. 그 '일본'이 그들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본인으로서도 '일본'은 중국이나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친 표상이며, 그 경우의 '중국'과 '서양'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비판하는 일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푸코와 일본", 107~108쪽)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들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의 기존의 사고틀에 맞추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가하지만 원래 '인식'이란 것의 속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문화의 비교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나라의 문화나 현실이 아니라 거꾸로 그 안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과도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서구 철학이나 사상을 구부러뜨리고 일본의 문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일본의 근대, 동양의 근대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의 것, 일본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드러내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히로키는 이 작업을 바로 오늘의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흔적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바다 건너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것이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짤막한 글 "유머로서의 유물론"을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유머'란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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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omadia >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트랜스크리틱] 비판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프롤레타리아는 천 개의 가면을 쓴다. 그렇다고 가면 뒤에 어떤 본질이 숨어 있는 것도, 목소리 뒤에 어떤 실체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초재적인 주체성으로부터 또는 어떤 일자로부터 이데아를 분유(methexis)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계의 표면을 횡단하고, 접속하며, 분산하며, 수렴한다. 이들은 계열이며, 양태고, 적합 관념들(adequate ideas)이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혁명적 열정을 표현한다.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71년 빠리 꼬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들의 가면은 전문노동자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대중노동자의 가면을 더 선호했다. 1968년과 1977년-79년 동안 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하나의 고원(plateaux)으로 삼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라고 외쳤다. 이때 이들은 다중이었고, 또는 사회적 노동자였다. 그리고 1994년 멕시코 라칸돈 정글에서 봉기한 싸빠띠스따들과 시애틀을 가득 매운 반세계화 시위대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 노동자로서, 다중으로서, 그리고 검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대륙간 회의를 통해 서로 악수하는 전개체적 특이성 자체가  된다. 전세계적, 세계사적 투쟁 순환의 역동적 힘(puissance)이 된다.

 

그렇다고 고진이 이런 가면 쓴, 스스로 변용(affectio)하는 분자들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파악 불가능한 미분화의 지대, 그 어두운 지대(zone obscure)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고진에게 이 질문은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호일 뿐인가? 그런데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괴암적인 공산당, 또는 사회당의 재현 시스템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상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진 또한 그것을 잘 안다.

 

이쯤 해서 그는 맑스의 유명한 정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G-W-G'(상품-화폐-상품). 중요한 지점은 <이전>의 지점이 아니다. <이후>의 지점이다. 즉 노동자는 W-G'의 지점에 일정한 파열구를 형성할 수 있다. 즉 이때 노동자는 곧 소비자고, 일종의 <노동자=소비자>라는 새로운 투쟁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 노동자는 스스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자이며 여기에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있다는 것. 고진이 실천적(그의 표현대로라면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불매운동>이 투쟁수단이 된다. 고진에 의하면 이 운동은 언제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과 더불어 <새로운 시스템>, 세미라티스(Semilatice)형 생산-소비 공동체가 조력해야 한다. 새로운 화폐(LETS), 다시 말해 지역간 유통과 교환에서 어떠한 실재적인 잉여도 표장하지 않는 순전한 가치 상징물로서의 화폐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실제로 고진은 이러한 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문제는 고진이 <소비자=노동자> 운동에 방점을 두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 운동의 가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고진의 비판(비평), 트랜스크리틱 자체에 놓여 있다. 불매운동과 지역화페 운동으로 대항운동을 조직하자는 것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러나, 고진은 코뮤니즘 운동이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 생성된다는 맑스의 냉정한 통찰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쓴 후 이렇게 말한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힘 자체는 자본주의에서 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운동에 부수되는 것이고, 자본주의 자체가 낳는 대항운동으로 존재한다>(367). 고진에게 <그러한 의미>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본주의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그것에 부수되며 결과로서만, 수동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진에 대해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을 반응적(reactif)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 순환 동안 프롤레타리아가 맡아 왔던 능동적 역할들과 창조적 탈주들은 어떻게 되는가? 물론 미시적인 측면의 반동과 더 큰 측면들에서의 배신행위들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이 그랬고, 동독이 그랬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프롤레타리아 역능의 탓인가? 고진조차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지점에서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은 자본주의 암적 유기체의 자장 안에서 지난한 생존을 영위해야만 한다. 어떤 ‘출구’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진의 실천이 완전히 자본에의 포섭 아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가능성이 짙을 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트랜스크리틱. 고진은 말한다. <내가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마르크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즉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와 마르크스에 공통된 ‘비판’(비평)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 일반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유물론에 결여된 주체적․윤리적 계기를 찾아내고자 했다. 사실 칸트는 결코 부르주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러한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15-16). 고진의 언급은 매우 가공할 만한(?) 것처럼 보인다. 칸트와 맑스 ‘사이’에 고진은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칸트가 부르주아 철학자가 아닌 이유는 주로 그의 ‘영구평화론’이 도덕적 정언명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와 목적의 왕국이고 책임 있는 도덕적 주체들이 최고선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곳, 이념들의 고향 ... 등등. 이 왕국에서 맑스와 칸트는 화해한다. 고진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째서? 대답은 맑스와 칸트가 유사한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진도 그러려고 한다. 트랜스크리틱. 맑스는 리카도와 베일리 사이에 있었으며 헤겔과 포이어바흐를 횡단했고, 칸트는 <독단적인 합리론에 대해 경험론으로 맞서고, 독단적인 경험론에 대해 합리론으로 맞서는 일을 반복했다>(30). 따라서 고진은 맑스와 칸트 사이에 있으며, 잰걸음으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트랜스포지션(transposition)말이다. 초월적 통각은 화폐와 더불어 이동을 행한다.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화폐가 눈부신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진의 맑스주의에서 화페는 기본적으로 잉여가치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가치의 실현은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종합은 유통 국면에서 실현된다. 잉여가치가 유통 국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고진의 이론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매우 멀리 나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단순히 노동자를 일하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노동자 자신이 사는 데서 발생하는 차액에서 얻어진다>(38).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고진이 맑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잉여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생산부부문을 고의적으로 탈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는 것으로 고려될 뿐이다. 고진에게 잉여가치의 최종심급은 화폐의 유통과 소비에 있다. 이로써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의 이론적(계급적) 계보가 드러난다. <상인자본이 공간적인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면, 산업자본은 기술혁신에 의해 끊임없이 시간적으로 다른 가치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잉여가치를 얻는다>(39). 결국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의 부등가 교환과 기술혁신이라는 두 가지 차이의 체계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짐짓 구좌파들의 무지를 꾸짖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서는 가치 체계들 사이의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찾는 대신 그것을 생산과정의 ‘착취’에서만 찾아내는 사고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39).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잉여가치를 칸트의 초월철학에서 찾는 것보다 더 위대하게 난해한, ‘사이’의 사유과정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트랜스크리틱 말이다. 이럴 경우 최근의 신좌파들은 분명히 옛동지들의 명예를 위해 싸울 것 같다. 맑스가 블랑키를 위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상인자본의 잉여가치는 애초에 프롤레타리아와는 상관 없으며, 블랑키는 동일한 전선의 다른 계열에 속하는 공명(resonance)의 한 항(term)이기 때문이다.

 

고진이 이렇게까지 나아가는 데에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 속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산-소비 공동체 운동이 충분히 실효를 가질 수 있으며, 전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기쁜 촉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어째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론의 ‘사이’ 운동과 사유의 ‘잰걸음’에 대해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고진은 이 책을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대상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칸트일 수도 있으며, 죽은 브레즈네프나 헤겔, 키에르케고르 ... 등등 이 책에 매우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산노동’인 다중(multitude)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따라 건설된 코뮤니즘의 왕국에 한 무더기의 이신론자들이 회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내걸든 말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투쟁 순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트랜스크리틱은 그 누구의 (심지어 부르주아의) 무기도 아니며, 왼쪽으로는 맑스와 한 꾸러미의 계열을, 오른쪽으로는 칸트와 또 다른 한 꾸러미의 계열을 배치해 놓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공명도 산출하지 못한다. 상인자본 또는 쁘띠들. 고진의 <가능한 코뮤니즘>은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도대체 거기에는 저들 한가한 대학 교수들 외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트랜스크리틱을 위해 그의 비판서 한 줄의 인용이라도 허용할지 의문이라고 한다 해도 괜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코뮤니즘은 가능한(possible) 것이 아니라 잠재적(virtual)이며, 현실적(actual)일 뿐이다. 칸트가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동일하다. 고진의 로도스는 신화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중에 고진의 것은 없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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