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omadia >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트랜스크리틱] 비판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프롤레타리아는 천 개의 가면을 쓴다. 그렇다고 가면 뒤에 어떤 본질이 숨어 있는 것도, 목소리 뒤에 어떤 실체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초재적인 주체성으로부터 또는 어떤 일자로부터 이데아를 분유(methexis)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계의 표면을 횡단하고, 접속하며, 분산하며, 수렴한다. 이들은 계열이며, 양태고, 적합 관념들(adequate ideas)이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혁명적 열정을 표현한다.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71년 빠리 꼬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들의 가면은 전문노동자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대중노동자의 가면을 더 선호했다. 1968년과 1977년-79년 동안 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하나의 고원(plateaux)으로 삼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라고 외쳤다. 이때 이들은 다중이었고, 또는 사회적 노동자였다. 그리고 1994년 멕시코 라칸돈 정글에서 봉기한 싸빠띠스따들과 시애틀을 가득 매운 반세계화 시위대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전지구적 노동자로서, 다중으로서, 그리고 검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대륙간 회의를 통해 서로 악수하는 전개체적 특이성 자체가  된다. 전세계적, 세계사적 투쟁 순환의 역동적 힘(puissance)이 된다.

 

그렇다고 고진이 이런 가면 쓴, 스스로 변용(affectio)하는 분자들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파악 불가능한 미분화의 지대, 그 어두운 지대(zone obscure)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고진에게 이 질문은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호일 뿐인가? 그런데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괴암적인 공산당, 또는 사회당의 재현 시스템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상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진 또한 그것을 잘 안다.

 

이쯤 해서 그는 맑스의 유명한 정식을 가지고 올 것이다. G-W-G'(상품-화폐-상품). 중요한 지점은 <이전>의 지점이 아니다. <이후>의 지점이다. 즉 노동자는 W-G'의 지점에 일정한 파열구를 형성할 수 있다. 즉 이때 노동자는 곧 소비자고, 일종의 <노동자=소비자>라는 새로운 투쟁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 노동자는 스스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자이며 여기에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있다는 것. 고진이 실천적(그의 표현대로라면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불매운동>이 투쟁수단이 된다. 고진에 의하면 이 운동은 언제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과 더불어 <새로운 시스템>, 세미라티스(Semilatice)형 생산-소비 공동체가 조력해야 한다. 새로운 화폐(LETS), 다시 말해 지역간 유통과 교환에서 어떠한 실재적인 잉여도 표장하지 않는 순전한 가치 상징물로서의 화폐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실제로 고진은 이러한 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다.

 

문제는 고진이 <소비자=노동자> 운동에 방점을 두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 운동의 가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고진의 비판(비평), 트랜스크리틱 자체에 놓여 있다. 불매운동과 지역화페 운동으로 대항운동을 조직하자는 것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러나, 고진은 코뮤니즘 운동이 자본주의적 조건 아래에서 생성된다는 맑스의 냉정한 통찰에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쓴 후 이렇게 말한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힘 자체는 자본주의에서 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운동에 부수되는 것이고, 자본주의 자체가 낳는 대항운동으로 존재한다>(367). 고진에게 <그러한 의미>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본주의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그것에 부수되며 결과로서만, 수동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진에 대해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을 반응적(reactif)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 순환 동안 프롤레타리아가 맡아 왔던 능동적 역할들과 창조적 탈주들은 어떻게 되는가? 물론 미시적인 측면의 반동과 더 큰 측면들에서의 배신행위들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이 그랬고, 동독이 그랬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프롤레타리아 역능의 탓인가? 고진조차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지점에서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은 자본주의 암적 유기체의 자장 안에서 지난한 생존을 영위해야만 한다. 어떤 ‘출구’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진의 실천이 완전히 자본에의 포섭 아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가능성이 짙을 뿐이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트랜스크리틱. 고진은 말한다. <내가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마르크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즉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와 마르크스에 공통된 ‘비판’(비평)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 일반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유물론에 결여된 주체적․윤리적 계기를 찾아내고자 했다. 사실 칸트는 결코 부르주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러한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15-16). 고진의 언급은 매우 가공할 만한(?) 것처럼 보인다. 칸트와 맑스 ‘사이’에 고진은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칸트가 부르주아 철학자가 아닌 이유는 주로 그의 ‘영구평화론’이 도덕적 정언명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와 목적의 왕국이고 책임 있는 도덕적 주체들이 최고선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곳, 이념들의 고향 ... 등등. 이 왕국에서 맑스와 칸트는 화해한다. 고진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째서? 대답은 맑스와 칸트가 유사한 방법론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진도 그러려고 한다. 트랜스크리틱. 맑스는 리카도와 베일리 사이에 있었으며 헤겔과 포이어바흐를 횡단했고, 칸트는 <독단적인 합리론에 대해 경험론으로 맞서고, 독단적인 경험론에 대해 합리론으로 맞서는 일을 반복했다>(30). 따라서 고진은 맑스와 칸트 사이에 있으며, 잰걸음으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트랜스포지션(transposition)말이다. 초월적 통각은 화폐와 더불어 이동을 행한다.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화폐가 눈부신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진의 맑스주의에서 화페는 기본적으로 잉여가치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가치의 실현은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종합은 유통 국면에서 실현된다. 잉여가치가 유통 국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고진의 이론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매우 멀리 나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단순히 노동자를 일하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노동자 자신이 사는 데서 발생하는 차액에서 얻어진다>(38).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고진이 맑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잉여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생산부부문을 고의적으로 탈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는 것으로 고려될 뿐이다. 고진에게 잉여가치의 최종심급은 화폐의 유통과 소비에 있다. 이로써 고진의 <소비자=노동자> 주체성의 이론적(계급적) 계보가 드러난다. <상인자본이 공간적인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면, 산업자본은 기술혁신에 의해 끊임없이 시간적으로 다른 가치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잉여가치를 얻는다>(39). 결국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의 부등가 교환과 기술혁신이라는 두 가지 차이의 체계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짐짓 구좌파들의 무지를 꾸짖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서는 가치 체계들 사이의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찾는 대신 그것을 생산과정의 ‘착취’에서만 찾아내는 사고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39).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잉여가치를 칸트의 초월철학에서 찾는 것보다 더 위대하게 난해한, ‘사이’의 사유과정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트랜스크리틱 말이다. 이럴 경우 최근의 신좌파들은 분명히 옛동지들의 명예를 위해 싸울 것 같다. 맑스가 블랑키를 위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상인자본의 잉여가치는 애초에 프롤레타리아와는 상관 없으며, 블랑키는 동일한 전선의 다른 계열에 속하는 공명(resonance)의 한 항(term)이기 때문이다.

 

고진이 이렇게까지 나아가는 데에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 속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산-소비 공동체 운동이 충분히 실효를 가질 수 있으며, 전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기쁜 촉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어째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론의 ‘사이’ 운동과 사유의 ‘잰걸음’에 대해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고진은 이 책을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대상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칸트일 수도 있으며, 죽은 브레즈네프나 헤겔, 키에르케고르 ... 등등 이 책에 매우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산노동’인 다중(multitude)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따라 건설된 코뮤니즘의 왕국에 한 무더기의 이신론자들이 회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내걸든 말든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투쟁 순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트랜스크리틱은 그 누구의 (심지어 부르주아의) 무기도 아니며, 왼쪽으로는 맑스와 한 꾸러미의 계열을, 오른쪽으로는 칸트와 또 다른 한 꾸러미의 계열을 배치해 놓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공명도 산출하지 못한다. 상인자본 또는 쁘띠들. 고진의 <가능한 코뮤니즘>은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도대체 거기에는 저들 한가한 대학 교수들 외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가 트랜스크리틱을 위해 그의 비판서 한 줄의 인용이라도 허용할지 의문이라고 한다 해도 괜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코뮤니즘은 가능한(possible) 것이 아니라 잠재적(virtual)이며, 현실적(actual)일 뿐이다. 칸트가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동일하다. 고진의 로도스는 신화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가면들 중에 고진의 것은 없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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