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2
일본적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일본의 시대 구분
상대上代(~794) : 아마토, 나라시대
중고中古(794~1192) : 헤이안시대
중세中世(1192~1603) : 가마쿠라시대--남북조시대--무로마치시대
근세近世(1603~1868) : 에도시대
근대近代(1868~) : 메이지시대(1866~1912)--다이쇼(1912~1926)--쇼와(1926~1989)--헤이세이(1989~)
2. 일본적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일본은 엄격한 의미에서 개국을 받아들인 근대 이전에는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는 왕 중심의 봉건적인 중앙집권국가 체제였던 한국, 중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구별점이 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영주나 무사가 각각의 지역을 통치하고 세금을 걷어들이는 지방분권 체제를 유지한 봉건사회였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강력한 구심점이자 내셔널리즘의 상징이 된 천황를 중앙에 세움으로써(천황제) 비로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국을 단행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각각의 나라) 유지의 반발과 통합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그들의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근대문화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민'을 이러한 민족주의에 동원한다.
물론 에도시대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이나 한국사람과는 다르다는 종족적 정체성ethmic identity은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학國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동양의식은 중국(명나라-청나라)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아비의 나라인 명나라의 뒤를 이어 오랑캐국인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호란을 통해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小중화의식은 일본에서는 에도 말기 일본중심의 국학을 꽃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계층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의식의 성립은 메이지 30년간의 정치, 행정, 교육 제도의 중앙집권화와 공업화,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수단의 발달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3.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야만'을 극복한 '문명' 국가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문명사관은 대대적인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학교를 통해 문명개화를 교육하고(이는 '순행'의 전통을 만들고 신민에게 천황을 선보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군대를 통해 천황의 국가를 결집시키며, 철도를 깔고 전신망을 구축하면서 각 지방을 중앙으로 모음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의식과 정서를 하나의 커다란 세계 속으로 통합해가는 토대를 마련한다.
1)문명개화정책
이 과정에서 근대국가의 주체인 대중이 형성되는데, 이는 개혁에 필요한 근대적 개인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신분차별 타파(사민평등사상)를 통해 얻어진다. 이와 함께 징병제를 통해 국가방위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여기서 군대는 새로운 문물(침대, 서양의 기술, 전투력)을 선전하고 익히는 학교가 된다. 또한 서양동요의 음을 따온 창가를 교과시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노래를 통한 일체감, 소속감을 부각시킨다. 각 지역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오마와리상(경찰관)을 둠으로써 지역 치안을 담당함과 동시에 그들의 소속을 중앙으로 응집시킨다(파출소제도). 그리고 긴자와 같은 서양식 거리를 조성하여 서양의 건축, 문화를 소개한다. 긴자에 시계탑을 세움으로써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부수고 정시법에 따른 표준시를 정한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시간을 관리함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끌어올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다든지 매장풍습을 화장으로 바꾸고 상투를 자르는 등의 일상의 감각을 바꾸는 개혁을 통해 근대적 대중을 만들어나간다.
2) 식산흥업정책
이러한 일상적인 환경의 변화는 비일상적인 계기를 통해서 더욱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박람회이다. 이는 동물원이나 박물관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각(기린이나 코끼리의 등장은 전화나 라디오의 등장 못지않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대중에게 진기한 것들,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통로가 된다. 이는 분명 소비하고 싶은 충동과 연결되고 황무지에 떨어진 자전거가 눈깜짝할 사이에 자동차로 둔갑할 수 있는 생산 핫라인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들의 식산흥업정책이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외칠 수 있는 국민적 합의가 깔려 있다.
물론 이러한 일말의 개혁 단행 조치에 맞선 지방 유지들의 반발과 혼란스러워하는 지역민들의 소외 문제는 당연히 있어왔다. 특히 개혁의 첫 단계에서 실시된 판적봉환(구영주들로 하여금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납하도록 하고, 구영주를 구영지의 지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함)과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놓음 : 임명한 지사들을 면직시켜 도쿄로 소환하고, 정부가 임명한 부지사, 현령을 파견하여 새로운 행정구역 단위인 부나 현을 다스리게 한 제도)은 사실상 봉건적인 지방 분권 체제를 종식하는 제도로 그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반발을 잠식시키는 가장 주된 힘은 문명개화정책과 맞물려 돌아간 식산흥업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전신(우정국:우체국)과 철도
하지만 박람회는 아무리 사람을 많이 동원한다 해도 일부층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는 바, 국민의 체험을 공통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학교와 군대이다. 그들은 수학여행, 운동회, 소풍의 전통을 여기서 새로 새웠으며 이를 통해 집단적인 일본인 의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우편제도를 알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가교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학여행이나 군대에서 고향으로 보내는 엽서(이후 인쇄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한다)를 무료로 함으로써 엽서에 그려진 천황과 서양문물을 고스란히 지방 곳곳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또 엽서를 보내는 사람의 눈에 보인(수학여행과 소풍)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동경 등을 전국적으로 배달하게 된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 이전에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중 확보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근대 천황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첫번째 질문, '천황은 왜 중요한가?'에 대해 전국민이 '만세일계'를 외칠 수 있는 일체성을 은연중에 주입시키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한들, 지방 곳곳까지 그러한 것을 국가가 심어줄 수는 없는 법. 국가는 여기서 지방과 중앙을 잇는 철도사업을 진행해 지방의 노동력을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끌어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