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2

일본적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일본의 시대 구분

상대上代(~794) : 아마토, 나라시대

중고中古(794~1192) : 헤이안시대

중세中世(1192~1603) : 가마쿠라시대--남북조시대--무로마치시대

근세近世(1603~1868) : 에도시대

근대近代(1868~) : 메이지시대(1866~1912)--다이쇼(1912~1926)--쇼와(1926~1989)--헤이세이(1989~)

 

2. 일본적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일본은 엄격한 의미에서 개국을 받아들인 근대 이전에는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는 왕 중심의 봉건적인 중앙집권국가 체제였던 한국, 중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구별점이 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영주나 무사가 각각의 지역을 통치하고 세금을 걷어들이는 지방분권 체제를 유지한 봉건사회였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강력한 구심점이자 내셔널리즘의 상징이 된 천황를 중앙에 세움으로써(천황제) 비로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국을 단행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각각의 나라) 유지의 반발과 통합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그들의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근대문화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민'을 이러한 민족주의에 동원한다.

물론 에도시대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이나 한국사람과는 다르다는 종족적 정체성ethmic identity은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학國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동양의식은 중국(명나라-청나라)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아비의 나라인 명나라의 뒤를 이어 오랑캐국인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호란을 통해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小중화의식은 일본에서는 에도 말기 일본중심의 국학을 꽃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계층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의식의 성립은 메이지 30년간의 정치, 행정, 교육 제도의 중앙집권화와 공업화,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수단의 발달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3.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야만'을 극복한 '문명' 국가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문명사관은 대대적인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학교를 통해 문명개화를 교육하고(이는 '순행'의 전통을 만들고 신민에게 천황을 선보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군대를 통해 천황의 국가를 결집시키며, 철도를 깔고 전신망을 구축하면서 각 지방을 중앙으로 모음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의식과 정서를 하나의 커다란 세계 속으로 통합해가는 토대를 마련한다.

1)문명개화정책

이 과정에서 근대국가의 주체인 대중이 형성되는데, 이는 개혁에 필요한 근대적 개인의 필요에 의해 추진된 신분차별 타파(사민평등사상)를 통해 얻어진다. 이와 함께 징병제를 통해 국가방위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여기서 군대는 새로운 문물(침대, 서양의 기술, 전투력)을 선전하고 익히는 학교가 된다. 또한 서양동요의 음을 따온 창가를 교과시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노래를 통한 일체감, 소속감을 부각시킨다. 각 지역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오마와리상(경찰관)을 둠으로써 지역 치안을 담당함과 동시에 그들의 소속을 중앙으로 응집시킨다(파출소제도). 그리고 긴자와 같은 서양식 거리를 조성하여 서양의 건축, 문화를 소개한다. 긴자에 시계탑을 세움으로써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부수고 정시법에 따른 표준시를 정한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시간을 관리함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력을 끌어올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다든지 매장풍습을 화장으로 바꾸고 상투를 자르는 등의 일상의 감각을 바꾸는 개혁을 통해 근대적 대중을 만들어나간다.

2) 식산흥업정책

이러한 일상적인 환경의 변화는 비일상적인 계기를 통해서 더욱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박람회이다. 이는 동물원이나 박물관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감각(기린이나 코끼리의 등장은 전화나 라디오의 등장 못지않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대중에게 진기한 것들,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통로가 된다. 이는 분명 소비하고 싶은 충동과 연결되고 황무지에 떨어진 자전거가 눈깜짝할 사이에 자동차로 둔갑할 수 있는 생산 핫라인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들의 식산흥업정책이 성공하고 '부국강병'을 외칠 수 있는 국민적 합의가 깔려 있다.

물론 이러한 일말의 개혁 단행 조치에 맞선 지방 유지들의 반발과 혼란스러워하는 지역민들의 소외 문제는 당연히 있어왔다. 특히 개혁의 첫 단계에서 실시된 판적봉환(구영주들로 하여금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납하도록 하고, 구영주를 구영지의 지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함)과 폐번치현(번을 폐하고 현을 놓음 : 임명한 지사들을 면직시켜 도쿄로 소환하고, 정부가 임명한 부지사, 현령을 파견하여 새로운 행정구역 단위인 부나 현을 다스리게 한 제도)은 사실상 봉건적인 지방 분권 체제를 종식하는 제도로 그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반발을 잠식시키는 가장 주된 힘은 문명개화정책과 맞물려 돌아간 식산흥업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전신(우정국:우체국)과 철도

하지만 박람회는 아무리 사람을 많이 동원한다 해도 일부층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는 바, 국민의 체험을 공통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학교와 군대이다. 그들은 수학여행, 운동회, 소풍의 전통을 여기서 새로 새웠으며 이를 통해 집단적인 일본인 의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우편제도를 알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가교로 사용하는데, 이는 수학여행이나 군대에서 고향으로 보내는 엽서(이후 인쇄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한다)를 무료로 함으로써 엽서에 그려진 천황과 서양문물을 고스란히 지방 곳곳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또 엽서를 보내는 사람의 눈에 보인(수학여행과 소풍)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동경 등을 전국적으로 배달하게 된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 이전에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중 확보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근대 천황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첫번째 질문, '천황은 왜 중요한가?'에 대해 전국민이 '만세일계'를 외칠 수 있는 일체성을 은연중에 주입시키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한들, 지방 곳곳까지 그러한 것을 국가가 심어줄 수는 없는 법. 국가는 여기서 지방과 중앙을 잇는 철도사업을 진행해 지방의 노동력을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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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이쇼기를 전후로 일본인들의 생활문화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메이지시대 상류층을 중심으로 비일상적인 여가문화로 자리잡아가던 서양풍은 다이쇼기에 접어들면서 대중들의 일상으로 침투한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공간에서 근대적 소비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는데 도심과 교외 주택지를 연결하는 사철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백화점문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근대 물리학에 주목했는가?

오랫동안 쇄국을 유지해온 일본(지역국가)이었지만 개국을 단행하면서는 서구문화의 채용을 국책사업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발맞추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 과학 및 테크놀로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일본의 독립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생긴 것이긴 하지만 그는 유럽 근대문명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불가결한 '도구'이며 그 도구에는 물질문명뿐 아니라 근데 테크놀러지를 만들어낸 근대 자연과학(물리학)이라는 학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근대 물리학에서 일본의 독립을 복돋우는 정신, 즉 '동양에 없는 것은 유형의 차원에서는 수리학이고, 무형의 차원에서는 독립심' 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초유의 베스트셀러 <학문의 장려>를 살펴보자. 그는 여기서 '신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또한 당시 일본인 3천만 명 중 글 읽는 사람은 대략 다 보았다는(70만 부)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적 스타가 된다. 그러나 이후 그의 글들을 살펴보자. <문명론 개략>에는 그는 인도인을 원숭이인 줄 알고 죽였다고 주장하는 영국인과 독일군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인도인과 같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하루 빨리 문명을 배워 서양을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 김옥균의 쿠데타(갑신정변) 실패를 보고 <탈아론>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나쁜 친구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쁜 친구들이란 당연 조선과 더 나아가서는 중국대륙을 뜻한다. 이후 그의 논문은 일본 정부도 곤혹스러워 할 정도의 찬신민지론으로 치닿는다. 그는 1885년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사관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한다. <조선만은 정리되어야 한다>, <조선의 형편을 다시 걱정할 필요가 있나?>, <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마지막 두 개의 논문은 일본 정부에서도 판매 금지를 시킬 정도로 그들의 식민지화 정책에 도움이 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내부의 논란을 막아보겠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일본 사회 좌파 지식인의 활동은 별도로 다음 번에). 작년에 바뀐 신화폐에서도 그가 여전히 1만엔 권 주인공이라는 것은 현재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라는 점을 다시금 시사한다.

참고>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이토 나리히코, 행복한책읽기)

 

3. 다이쇼 문화는 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였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다이쇼 문화는 메이지 문화에 비해 소비 중심적이고 사생활 중심적이며 향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주의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측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도시중간층이 주도적인 개혁 주체로 전면에 나섬으로써 그 문화를 주도했다고 본다. 청일, 러일전쟁 이후 전쟁이 싫어진 대중들의 요구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집중화를 낳았다. 이들은 문화생활을 중시하고 서양식으로 지어진 문화주택에 거주하면서 대중적, 소비적인 문화에 흡수(소비자) 내지는 소비의 재창조자(생산자)가 된다.

 

관동대지진이 문화에 미친 영향

그러나 이러한 도시문화는 동경의 반 이상을 폐허로 만든 1923년 관동대지진(대진재)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시계획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다. 이러한 도시계획에 의해 형성된 특징 중 하나가 도로공사로 도시는 새롭게 구획되고 정리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도시로 나고야를 꼽는다. 도시의 발달에서 중요한 것은 동경과 요코하마, 시부야와 신주쿠를 잇는 도시근교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간 사철이 급속히 놓여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철의 정거장에는 어김없이 대형 백화점이 자리를 잡게 된다.

 

백화점 문화의 발달

사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백화점은 당시 사회의 유행을 리드하고 대중의 생활을 규격화, 획일화하는 데 기여한다. 백화점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향해 뻗어나가던 근대 일본 문화를 새로운 모델에 대한 동경 또는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한 기호품으로 채워 넣는다. 일본의 백화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전통백화점으로 그들의 전통문화(혼수품으로 평생 입을 기모노 옷감을 해가지고 간다든지 하는)에 기반한 포목상을 중심으로 한 백화점. 둘째, 사철을 중심으로 한 쇼윈도에 진열된 물픔을 구입하는 백화점으로 나뉜다. 전통백화점은 현재에도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층의 대표적인 소비통로가 되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

또한 관동대지진의 피해는 도시의 새로운 복구와 더불어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해 지진 당시 라디오가 충분히 보급되었더라면 지진의 피해뿐 아니라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비롯한 대내 외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반 대중의 마녀사냥과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각성이 그것이다. 때문에 관동대지진 이후 철도의 보급과 함께 라디오를 비롯한 출판문화, 인쇄문화가 꽃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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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와 시대의 전시 총동원 체제의 시대적 배경

국가가 인간의 근로를 관리했던 시스템인 총동원 체제에 의해 운영되던 쇼와 시대는 본격적인 전쟁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태평양전쟁과 전시 총동원 체제는 전시법, 전시체제라는 시대적 비극을 낳았으며 대중문화가 꽃피었다고 평가되는 다이쇼 시대와는 반대로 대중문화의 침체를 낳는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당시 산적해 있는 문제 중 시급한 것으로 정치적 이슈가 된 것은 역시 여성의 참정권과 식민지 국민의 참정권, 국민의 보험과 보건교육, 노후 계획과 연결된 연금과 같은 민주복지사회의 요소들이다. 전쟁기에 이러한 것이 왜 필요했으며 왜 각료의 정권다툼에 끊임없이 주요한 이슈가 되었는가?

이는 전쟁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 복지제도를 구현함으로써 천황의 이름만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할 수 없다는 정치, 사회적 요구이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나가서 싸우는 국가방위의 역할을 국민들에게 부가시키고 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복지제도의 구현이 시대적 요구 사항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일본은 그들의 적인 미국, 중국과 전쟁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세계공항에 부딪친 세계적 정세는 일본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자원이 없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공격, 보다 많은 식민지 구축을 주 무기로 한 '파시즘'체제로 국가를 정비한다.

 

2. 평화헌법 제9조로 촉발된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

그들이 말하는 전후戰後란 제국헌법에 의해 운영되던 당시 사회를 '평화헌법'으로 재편성하고 새헌법에 맞는 전전과는 다른 시대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특히 평화헌법의 헌법 제9조는 주권이 천황에게서 국민에게로 옮겨졌다는 것과 전쟁포기와 비무장화로 상비군을 폐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전쟁 책임에 대해 천황에게 면책을 주고 대신 신의 권자에서 천황을 끌어내리게(천황제를 명맥만이라도 유지시키는) 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천황제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우익화와 전쟁 가해국이면서도 피해국이라는 피해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게 되는 첫번째 요인이 되고 있다.

패전을 공표(1945)하고 미군정체제에 돌입한 일본은 미국의 소비, 대중문화의 유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평화헌법에 기초한 비무장화는 그들이 전시 총동원 체제하에서 갖춰놓은 군수, 공업 라인을 공업, 산업화로 돌릴 수 있는 핫라인으로 적극 이용된다. 또한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촉발된 사회 분위기는 한국전쟁특수를 맞아 전국민이 생산 라인에 돌입하는 적극적인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후 문화를 리드하는 것이 재벌의 해체를 통해 얻어낸 '기업'과 '관료'가 되면서 일본을 제조업의 왕국으로 바꾸어놓는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형태를 보면 그들의 복지정책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특징인  '종신고용제' '연공서열' '기업에 대한 애사심 강조' 등은 민주적인 분위와 맞물려 기업별 자치 노조를 결성하거나 고도성장기의 정치적 판도(자민당과 사회장의 대결)에도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전쟁특수와 맞물린 일본의 고도성장기 정책

여기서 잠깐, 한국전쟁은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터진 것임을 짚고 넘어가자. 한국전쟁으로 일본 사회에 징병제에 대한 부활 논의가 제기되는 가운데 한 발 앞서 미군정은 당시 냉전체제에 대한 위기감으로 일본 통치 방법을 민주화, 비무장화에서 부국화, 재무장화로 바꾸게 된다. 이러한 역코스는 평화헌법의 기조를 제안한 맥아더를 중심으로 표면화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자위대'이다. 자위대는 모병제로 월급을 받는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로 미군의 주문하에 한국전쟁으로 집중되는 냉전 위협으로부터 일본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지켜내기 위한 정책의 집행이었다. 미국은 냉전체제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해 민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평화헌법의 내용을 깨뜨린 것이다. (이것이 일본 사회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나중에)

이러한 전쟁특수와 비무장화로 상대적으로 산업화에 집중된 정책으로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한다. 먹는 것에서 출발, 전쟁 전 수준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한 전후 1940년대로부터 일본은 1950, 1960년대에는 이케다내각의  '국민소득 배증계획'에 따라 '소비혁명' 내구소배재의 보급에 주력하게 된다. 당시는 일본 경제에 있어 가장 경기가 좋다는 뜻의 '진무경기' 시기로 올림픽으로 호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량소비시대로 가는 기반이 형성된다.

 

>>이쉬, 한 나라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무에 이리 거쳐야 할 것이 많단 말인가. 또 이름은 얼마나 헥깔리고. 머리 터지겠다. 정치권으로 넘어가면 헥헥 그게 그거 같고 이렇게라도 정리를 안 하면 돌아가시겠다. 푹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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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청년문화의 변화

1. 일본은 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자행하였는가?

현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패전'이다. 현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청년문화 또한 이러한 패전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하나, 태평양전쟁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점이 일본의 청년문화의 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은 제공권 장악이 승패를 좌우하는 전쟁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투기 생산력이 전쟁의 키 포인트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 전쟁 초기 군의 입장을 들어보자.

 "일본이 연간 2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쟁 참모의 보고에 대해 일본군 수뇌부는 "일본은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생산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일본이 무리를 해서라도 2만 대 생산능력을 갖춘다면 미국은 10만 대 생산체제를 만들 것이다"라고 일축한다. 일본은 처음부터 전쟁에 질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전포고를 단행하였다. (도대체 왜? 이것은 앞서 말한 일본의 문명개화론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부국을 꿈꾸는 그들의 식민사관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장비와 화력면의 열세를 병사 개개인의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밀어붙였다. 2000발의 실탄을 장전한 미전투기에 맞선 일본의 전투기에는 고작 70발이 장전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그들이 광기의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기도 한다. 지는 전쟁에서 그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정신일도 하사불성' '소수 정예주의' '엘리트주의'가 강조된 정신무장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무장을 가장 확실히 세뇌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지하드, 즉 성전聖戰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전쟁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신을 위한 전쟁'으로 바뀌게 된다.

2. 패전과 천황의 항복 선언이 일본 청년문화에 미친 영향

태양족

항복 선언과 더불어 천황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신 10대였던 청년들의 반응은 대체로 불쾌함이었다. 그들의 불쾌함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원폭피해 소년이 주인공인 당시 유행하던 소년만화 <맨발의 겐>이 있다. 성인들의 다양한 반응과는 다르게 청년들은  '귀축미영 타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선생들이 하루아침에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가르치겠다고 돌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죽창을 들고 미군과 싸우겠다'던 어른들 또한 금새 미군을 환호하며 반기는 자세로 돌아섰다. 이전의 가치관과 교육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상황에서 그들은 반항과 일탈을 꿈꾼다. 이는 폭주하는 젊은이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대히트를 기록한  <태양의 계절>을 통해 '태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단카이세대-원시신인류-신인류

넓은 의미에서 전후 베이비 붐에 의해 1945년에서 1954년 사이에 태어난 약 2천만 명을 지칭하는 단카이세대는 어른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부정을 배경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간다. 이 단카이세대는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보다는 농촌 지역에서 더 많은 출생률을 보이는데 이후 이들이 성장하여 1970년대에는 도시로 상경하게 되면서 도시는 이들에 의해 본격적인 젊은이 문화(소비, 저항, 감성)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화를 위한 학원투쟁과 사회적 이슈였던 안보투쟁은 원시신인류라는 새로운 물결을 형성하기도 한다. 단카이세대의 상경에는 도시 제조업 회사의 적극적인 알선도 한몫하게 되는데 회사는 한 지역의 청년들을 집단 취직시키고 상경 열차편을 마련해주어 같은 날, 같은 열차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한 회사에서 평생 일을 하게 됨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연대의식을 강조, 조장할 수 있는 새로운 풍토를 만들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연대와 동질성을 강조한 단카이세대의 뒤를 이어 1970년대 태어난 이들은 이후 세대보다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신인류라는 조어를 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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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타쿠는 왜 생겨났는가?

80년대 일본 문화는 70년대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펼친 오타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원래 '당신/댁'이라는 의미의 오타쿠는 가타카나로 쓰이고 서양에 소개되면서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국제어가 되었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광적인 팬이나 마니아를 넘어선 비평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좋아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여러 의미로 재배열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다. 때문에 이 오타쿠의 존재는 일본 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독특한 문화로 평가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래사회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생비자(prosumer)가 등장할 것'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예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일본의 오타쿠에서 그 전조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일본에서 이러한 오타쿠가 생겨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들의 전통과 관계가 있다. 첫째 그들의 장인정신은 익히 알고 있듯이 에도 시대 상인과 수공업자의 학문이었던 심학心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술을 하는 것도 道라고 생각한 이들은 물건을 잘 만들지 못하면 인격이 낮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어내려는 그들만의 장인정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것이 현대로 오면 '무언가 정통하여야 한다'는 通( つ)정신으로 확장되어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오타쿠가 영상 문화에 끼친 영향

오타쿠 문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텔레비젼을 통해 방영된 <우주전함 야마토>다. 야마토가  <마징가 Z>를 비롯한 이전의 다른 애니매이션과 구별되는 점은 오타쿠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물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준 데 있다. 야마토는 당시 기존의 어린이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26회를 끝으로 중도 하차했다. 하지만 그 반향은 애니메이션의 주대상이 어린이들뿐 아니라 성인들까지도 포섭할 수 있다는 데로 꽂혔다. 야마토는 실재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전함으로 장대한 SF적 설정과 배경을 기반으로 매회마다 수수께끼를 끼워넣어 최종회에서 그 실마리가 풀리는 대하 스토리로 짜여져 있다. 이는 30분짜리 1회 방영분에 영웅이 악을 물리치는 완결형 드라마 형식으로 짜여져 있던 이전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과감히 깬 것이다. 때문에 텔레비젼에서는 중도 하차하기는  했지만 이후 야마토에 대한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애니매이션의 주대상층의 연령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1970년대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영 컬처 전환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크리에이터의 산실이 된 오타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작품을 내놓았는데 <신세기 에반게리온>(30만 명), <원령공주>(1,200만 명)의 예를 보면,오타쿠 시장의 파워와 수용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상대적으로 많은  <원령공주>의 관객수가 많은 이유  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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