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일본 대중 문화 3
1. 다이쇼기를 전후로 일본인들의 생활문화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메이지시대 상류층을 중심으로 비일상적인 여가문화로 자리잡아가던 서양풍은 다이쇼기에 접어들면서 대중들의 일상으로 침투한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공간에서 근대적 소비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는데 도심과 교외 주택지를 연결하는 사철의 발달과 함께 생겨난 백화점문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근대 물리학에 주목했는가?
오랫동안 쇄국을 유지해온 일본(지역국가)이었지만 개국을 단행하면서는 서구문화의 채용을 국책사업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발맞추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 과학 및 테크놀로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일본의 독립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생긴 것이긴 하지만 그는 유럽 근대문명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불가결한 '도구'이며 그 도구에는 물질문명뿐 아니라 근데 테크놀러지를 만들어낸 근대 자연과학(물리학)이라는 학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근대 물리학에서 일본의 독립을 복돋우는 정신, 즉 '동양에 없는 것은 유형의 차원에서는 수리학이고, 무형의 차원에서는 독립심' 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초유의 베스트셀러 <학문의 장려>를 살펴보자. 그는 여기서 '신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또한 당시 일본인 3천만 명 중 글 읽는 사람은 대략 다 보았다는(70만 부)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적 스타가 된다. 그러나 이후 그의 글들을 살펴보자. <문명론 개략>에는 그는 인도인을 원숭이인 줄 알고 죽였다고 주장하는 영국인과 독일군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인도인과 같이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하루 빨리 문명을 배워 서양을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 김옥균의 쿠데타(갑신정변) 실패를 보고 <탈아론>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나쁜 친구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나쁜 친구들이란 당연 조선과 더 나아가서는 중국대륙을 뜻한다. 이후 그의 논문은 일본 정부도 곤혹스러워 할 정도의 찬신민지론으로 치닿는다. 그는 1885년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사관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한다. <조선만은 정리되어야 한다>, <조선의 형편을 다시 걱정할 필요가 있나?>, <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마지막 두 개의 논문은 일본 정부에서도 판매 금지를 시킬 정도로 그들의 식민지화 정책에 도움이 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내부의 논란을 막아보겠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일본 사회 좌파 지식인의 활동은 별도로 다음 번에). 작년에 바뀐 신화폐에서도 그가 여전히 1만엔 권 주인공이라는 것은 현재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라는 점을 다시금 시사한다.
참고>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이토 나리히코, 행복한책읽기)
3. 다이쇼 문화는 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였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다이쇼 문화는 메이지 문화에 비해 소비 중심적이고 사생활 중심적이며 향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이상주의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측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도시중간층이 주도적인 개혁 주체로 전면에 나섬으로써 그 문화를 주도했다고 본다. 청일, 러일전쟁 이후 전쟁이 싫어진 대중들의 요구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집중화를 낳았다. 이들은 문화생활을 중시하고 서양식으로 지어진 문화주택에 거주하면서 대중적, 소비적인 문화에 흡수(소비자) 내지는 소비의 재창조자(생산자)가 된다.
관동대지진이 문화에 미친 영향
그러나 이러한 도시문화는 동경의 반 이상을 폐허로 만든 1923년 관동대지진(대진재)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시계획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다. 이러한 도시계획에 의해 형성된 특징 중 하나가 도로공사로 도시는 새롭게 구획되고 정리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도시로 나고야를 꼽는다. 도시의 발달에서 중요한 것은 동경과 요코하마, 시부야와 신주쿠를 잇는 도시근교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간 사철이 급속히 놓여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철의 정거장에는 어김없이 대형 백화점이 자리를 잡게 된다.
백화점 문화의 발달
사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백화점은 당시 사회의 유행을 리드하고 대중의 생활을 규격화, 획일화하는 데 기여한다. 백화점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향해 뻗어나가던 근대 일본 문화를 새로운 모델에 대한 동경 또는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한 기호품으로 채워 넣는다. 일본의 백화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전통백화점으로 그들의 전통문화(혼수품으로 평생 입을 기모노 옷감을 해가지고 간다든지 하는)에 기반한 포목상을 중심으로 한 백화점. 둘째, 사철을 중심으로 한 쇼윈도에 진열된 물픔을 구입하는 백화점으로 나뉜다. 전통백화점은 현재에도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층의 대표적인 소비통로가 되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
또한 관동대지진의 피해는 도시의 새로운 복구와 더불어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의 필요성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해 지진 당시 라디오가 충분히 보급되었더라면 지진의 피해뿐 아니라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비롯한 대내 외국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반 대중의 마녀사냥과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각성이 그것이다. 때문에 관동대지진 이후 철도의 보급과 함께 라디오를 비롯한 출판문화, 인쇄문화가 꽃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