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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개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하얀 표지에, 로맹 가리의 오묘한 사진이 멋진 <흰 개>.
이 정도의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저자의 사진이라면 표지 선정에 있어서 무슨 고민이 있을까.
<새는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 나는 사실 그런 책 이름만 들어 봤을 뿐 읽어볼 엄두도 나질 않았었고, 단지 표지에 낚여서 이 책을 구입했을 뿐이다. 냉정하면서도 왠지 강단있을 것 같은 외모의 작가가 풍기는 아우라가 남달랐기 때문에.
무모했지. 무모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신경쇄약에 걸린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미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비로소 사회가 움직이는 격동의 시기, 미국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을 향해 침잠해간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두려움, 거기서 오는 폭력은 흑인들의 유전자에 거대한 분노를 심고, 백인은 그 분노를 한 번 더 두려워하고 또 한번의 폭력으로 악화시킨다.
그 어쩔 수 없는 무한의 지옥에서 흑인의 인권을 지키겠다며 나서는 소수의 백인들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이용당하고 멸시당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다가 망가져 버린다. 로맹가리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면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비웃고 비난하면서도 절대 눈 돌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이 모든 것이 그 사회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마저도 비겁하고 추잡스러운 더러운 현실도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지점이 나에겐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근원적인 이유를 건드린답시고 주장하는 이 사회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가 바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한테 "그래서 포기하자고? 사회를 바꿔? 어떻게?" 라는 질문이 왔을 때 기껏해야 "...잘." 같은 멍청한 대답이나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맹 가리의 이 신랄한 지적마저도 당시의 미국사회에서는 무능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만큼 절망적인 악화일로의 사회.
모든 희망을 접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바로 '흰 개' 바트카이다. 충직한 회색 셰퍼드인 개. 인간과 개가 교감할 수 있다는 증거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던 개는 사실 심하게 망가진 존재다.
흑인만을 물어 뜯도록 훈련된 백인들의 개.
로맹 가리는 이 슬픈 운명이자 과거의 더러움을 대표하는 바트카의 훈련된 인격을 제거해주고 싶어한다.
스스로 그런 권리가 있는지 의심하면서도, 잔인한 행동이라고 스스로를 자학하면서도 바트카를 보통의 개로 바꿔 놓는다면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바트카를 흑인 조련사 키스에게 맡긴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그 과정이나 결말은 밝히지 않겠다.
책 자체의 분량은 많지 않으나 시종일관 답답한 사회분위기와 여유롭게 대처하는 듯 하나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지식인인 로맹 가리의 말과 행동이 읽는 이들을 힘들게 한다. 또 바트카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반면에 인간들의 이야기는 다소 재미없는 것도 사실.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을 재미 위주로 평가한다는 것 또한 격이 떨어지는 거지만, 소설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이상 어떠한 평가의 잣대로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바이고.
읽기 시작하면서 읽고 난 후까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표지가 근사해서 읽었지만, 읽고 나서 본 그의 인상은 많이 달랐다. 불안정하고 애써 침착한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맹 가리의 <흰 개>. 잊지 못할 독서 경험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우리의 경우로 가져다 생각할 경우 비약과 억측이 뒤섞여 못생긴 꼴이 될 것만 같아 시도하진 않으련다.
그저 꼭 한 번 읽어볼만 한 책임에는 틀림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