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고르는 책 - 탐험하는 독서가를 위한 안내서
손민규 지음 / 포르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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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차 서점 MD가 전하는 책 선택의 모든 것’이라는 문구에 단박에 끌려 버렸다. 이 책에 저자 손민규 작가는 서울대 인문 대학에 진학했다가 종교학에 더욱 재미를 느껴 전공을 택했지만 뛰어난 학자가 될 자질은 없다고 판단한 뒤 서점으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그렇게 서점에서 일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로 16년째 출근 중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은 책에 대해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 줄 것인가.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게 한국 사람들이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책이 주는 즐거움을 아직 느껴보지 못해서, 막상 읽으려고 했을 때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이기도 하거든요.” (5쪽)


책 읽기가 취미이고 매년 60권 이상 꾸준히 읽다보니 실제로 주변에서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요? 라는 이야기와 동시에 책을 읽고 싶지만 무슨 책을 읽어야할지 모른다는 말을 많이 한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지만 도무지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일관된 의견이다. 덜컥 한강 작가의 책을 샀다가 너무 난해하고 우울하고 어렵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읽고 싶지만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를 때 읽는 책. 책이라는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친절한 안내서.

이 책을 읽고나서 책 읽는 세계로 빠져보자. 책에 대한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지 않음을 친해지기가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다 보면 책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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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속 아이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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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 데뷔 20주년 기념작이 나왔다. 기욤 뮈소라하면 20대에 책을 좋아하지 않던 시절에도 책을 보게 만들었던 작가였다. 페이지 터너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욤 뮈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놓을 수 없던 책이었다. 언제나 나의 예상을 어김없이 무너뜨린 기욤 뮈소. 20주년 기념작이라고 하니 궁금한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저명한 기업가 카를로 디 피에트로의 상속녀이자 종군기자로 명성을 날렸고 출판사를 설립해 경영인으로서의 훌륭한 면모도 보여준 오리아나 디 피에트로. 그녀가 괴한의 습격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여학생 두 명이 발견해 신고하지만 열흘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바로 남편인 아드리앙. 니스 경찰청 강력반 쥐스틴 팀장과 베르고미 형사는 수사에 만전을 기하지만 변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아드리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녀들을 사랑한 모범적인 가장이다. 오리아나는 누군가의 복수의 대상이 될만큼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흥미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은 역시 기욤 뮈소구나, 라는 생각. 그 시절 어설프게 추리했다가 어김없이 틀려버린 내가 여전히 어설프게 추리를 하고 어김없이 틀리고 있었다. 사실 초반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중반 넘어가면서 이렇게 쉽게 추리가 된다고? 분명 다른 뭔가가 있을거라 생각했고 마지막에 다다를때는 이젠 기욤 뮈소도 힘일 빠졌구나 했지만 이게 웬일인가, 역시 기욤 뮈소구나-라는 마음으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범인을 억지로 숨기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충분히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어디서 놓쳤던 것일까. 괜히 다시 추리를 해보면서 아쉬워했다. 언제나 이렇게 한 방 먹게 만들고 멍하게 만드는 것이 기욤 뮈소의 매력이었지. 역시는 역시였다.


이야기는 큰 원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파고든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집중해서 보게 된다. 촘촘한 틈에서 범인을 찾고 싶어서, 이야기의 비밀을 풀고 싶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되지만 추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비밀이 풀렸을때 약간은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내가 미로속에 갇힌 아이가 된 느낌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그 미로에서 빠져나온다고 해야할까.


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었다. 덕분에 자려던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 다양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미로 속 아이>는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쏙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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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2
김멜라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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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화자는 비인간이다. 그들은 바로 톡토기, 거미, 모기가 연구원인데 저술가가 되어 두 레즈비언 인간(책 속에선 두발이 엄지) 호랑과 버들을 관찰하는 이야기다. 곤충인 톡토기, 거미, 모기는 호랑과 버들을 보며 자신들의 죽음, 감정, 두려움, 행복 등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 이미 머리가 살짝 아프고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더불어 우리는 관찰하고 모험하는 우리의 본성을 발휘해 미숙하기 짝이 없는 두발이엄지들의 생태를 기록해왔다.”(12쪽) 곤충을 통해서 본 인간 아니 두발이 엄지라니, 그것도 레즈비언이라니 이런 내용을 상상해낸 작가가 놀라웠다. 곤충들은 각자 관찰 기록을 시나리오 형태로 재현하기도 하고 그냥 설명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론 시나리오 형태가 재미있었다.

번식을 할 수 없는 사랑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 버들과 호랑의 사랑은 번식할 수 없다. 번식이란 것이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일까. 곤충들이 바라본 그들은 분명 사랑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아픔을 고백한다. 무엇하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다. 계절의 변화도 곤충들의 이야기도 두발이엄지들의 이야기도 모두. 그리고 그 자체가 모두 환희로 다가온다.



🔖 50쪽
겨울엔 이불을 덮어주고 봄에는 생리통을 앓는 배를 만져주고 여름엔 벽에 달라붙은 모기를 잡아주었어(이미 피를 빨렸는데도!)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선 얼만큼의 애정이 필요할까?


🔖 115쪽
그런데 비생식 암컷 엄지는 무엇을 위하여 함께하는가. 번식을 향한 유전자 메커니즘이 아닌 그 무엇이, 그들의 관계를 추동하고 지탱하는가.


🔖 116쪽
고작, 겨우, 단, 이렇게 인간의 언어는 우리의 시간을 재단하고 비교하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탓하게 만든다. 덧없다거나 허무하다거나 잔혹하다는 말로 우리의 삶을 못 박아 고정해놓고 우리가 누렸던 꽃가루와 나무진, 과일즙의 기쁨을 얄팍하게 증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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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시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3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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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서동시집>은 괴테가 쓴 열 두개의 시편과 함께 시집에 실리지 않았던 ‘유고 중에서’가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 괴테가 직접 쓴 ‘서동시집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주석과 해설’까지 포함되어 있다.

시라고 하면 무조건 어렵다, 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이 책은 주석과 해설까지 있다고 해서 기대하면서 읽었다. 역시 주석과 해설까지 있으니 읽는데 훨씬 더 잘 이해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물론 시는 여전히 어렵긴 하지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내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기억되는 작가이다. 하나 더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괴테 전문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님. 여주에 여백서원, 괴테의 집을 세워 10년째 괴테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이 분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괴테의 책 전집을 다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서동시집>을 먼저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괴테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어릴 때부터 어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인상적이었던건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 각종 문학서적을 다 읽어다고 한다.

원래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고 후에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음에도 문학에 더 열정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어 아픔을 겪은 후 이 경험을 책으로 쓴 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책으로 유명작가가 되고 후에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많은 책을 많은 책을 남긴 괴테.

괴테의 책이라고 하면 사랑, 사색, 명상 등이 많이 생각나는데 <서동시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기본이요, 명상, 잠언 등 평소 괴테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책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동시집>은 서방 시인이 쓴 동방의 시이다. 괴테 노년기의 결정체, 아름다운 사랑 시, 노시인이 그린 삶의 예찬. 이것이 서동시집을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일 것이다. 특히 “인정하라! 동방의 시인들이 우리 서양의 시인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98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가장 인상적인 시편은 동방의 풍물과 자연을 노래한 ‘가인 시편’ 페르시아 시인 하피스에 대한 감동을 고백한 ‘하피스 시편’ 줄라이카와 하템을 앞세워 마리아네와 자신의 사랑을 노래한 ‘줄라이카 시편’ 종교적 성찰이 가득한 ‘잠언 시편’ 이었다. 특히 ‘잠언 시편’이 가장 좋았다.


49쪽
사랑이라는 책

책 중에서 가장 이상한 책은
사랑의 책이라.
내 그 책 꼼꼼히 읽어 보았더니
기쁨일랑 몇 쪽 안 되고,
책 전체가 고통이로다.
이별이 한 장을 다 채우고
재회는 - 짤막하게 한 단락뿐인데,


이 부분을 보고 빵 터졌는데 내가 사랑에 대한 책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읽고 보는 것은 이별에 대한 장면을 보기 위함이다. 재회나 기쁨보다 이별과 슬픔 같은 것들. 근데 그것을 이상한 책이라고 표현하다니 너무 재미있다.

근데 이상하지만 우린 자꾸 읽고 보고 있지 않는가.


125쪽

줄라이카
태양이 떠올라요! 장관이에요!
초승달이 태양을 껴안고 있고요.
누가이 둘을 결합시킬 수 있었을까요?
이 수수께끼, 어떻게 설명하죠? 어떻게?

하템
술탄은 그렇게 할 수 있었지요.
그분이 지상 최고의 한 쌍을 혼인시켰다오.
충성스러운 부하들 중 가장 용감한 자들,
선택된 자들을 기리기 위해서지요.

또한 그게 우리 행복의 모습이 아니겠소!
나는 거기서 나와 그대를 다시 본다오.
사랑하는 이여, 그대는 나를 그대의 태양이라 불러 주오.
감미로운 달이여, 얼른 나와 나를 안아 주오.


그래도 역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쓸 수 있는가. 사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부터 괴테의 사랑에 대해 알 수 있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사람이 사랑이 있다면 힘들 일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는 법이다.


477쪽
나의 의도는 유쾌한 방식으로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 페르시아적인 것과 독일적인 것을 서로 연결하고 양쪽의 풍속과 사고방식을 서로 겹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괴테의 열린 마음과 화합하려는 모습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서로 더 가지려고 애쓰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는 우리들을. 어쩌면 괴테의 이런 태도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괴테의 글을 연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괴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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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 각본
셀린 송 지음, 황석희.조은정.임지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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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집, 대본집을 좋아한다. 먼저 읽고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나 연극을 먼저 보고 각본집이나 대본집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활자와 영상은 어떻게 만나든 만나기만 하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다.

이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을 받고나서 영화를 먼저 볼까, 각본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이번엔 영화를 먼저 선택했다.

사실 영화를 보고 살짝 놀랐다. 내가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연’에 대한 이야기라길래 남자와 여자, 해성과 노라가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헤어진 뒤 어른이 되어 다시만나 사랑을 나누거나 혹은 헤어지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랑이야기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나의 상상력은 여기까지였다.

해성(유태오)과 나영(훗날 노라, 그레타 리)는 12살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지만 나영이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다. 12년 후 이젠 노라가 된 나영이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가 우연히 SNS에서 해성을 찾게되고 해성 역시 노라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연락이 닿은 두 사람. 하지만 뉴욕과 서울을 너무 멀다.

이후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현실과 노라의 선택으로 둘은 다시 연락이 끊긴다. 다시 12년 후 해성은 용기를 내 노라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 두 사람. 결국 두 사람은 만난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로가 갖고 있는 감정들을 확인한다. 이것이 곧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다시 만났으니 이어질거라는 생각과 다시 만났으니 서로의 현실을 깨닫고 절절하게 헤어진다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패스트 라이브즈> 이전의 삶, 전생이라는 의미다. 과연 해성과 노라의 전생은 어떤 삶이었을까. 그들의 인연은 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일까. 해성과 로라는 인연이 끊이질 듯 하지만 결국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상황을 보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마주한다. 만약, 이라는 가정들 속에서 현재의 우리들을 되돌아 본다.

결국 그들이 인연이 이어진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모두 인연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 나와 결혼한 남편 등 모두 인연이라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감독이자 각본을 쓴 셀린 송. 영화 속 로라처럼 극작가였다. 실제 이민을 갔던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패스트 라이브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첫 영화로 만들었다. 감독의 아버지는 우리가 너무자 잘 알고있는 영화 <넘버 3>의 감독 송능한이다.

자신의 경험이 많이 담겨서 그럴까, <패스트 라이브즈> 속 인물, 배경, 상황 등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가령 이런 것들, 이민을 간 노라가 아이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라든가, 노라가 뉴욕에서 고군분투 하는 모습, 로라가 영주권 떄문에 빨리 결혼하는 모습 등. 이민을 경험한 사람이 쓴 이야기 같은 현실감이 있다.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결국 우리는 과거의 사랑을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인연은 거기까지였다고 단정짓곤 하는데 과연 그것은 인연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인 것일까, 우리가 의도적으로 인연을 거기까지 만드는 것일까.

문득 남편과 한 번 헤어졌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남편이 다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아니, 남편이 연락을 했어도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면? 이것은 우리가 만든 인연일까 아니면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 인걸까.

“전생에 우린 누구였을까”
전생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로 여기서 끝, 이란 마음으로 살아가는데 가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이나 일들 앞에선 어쩌면 전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 전생뿐이겠는가, 다음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지금뿐이야, 지금이 전부야,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만약 노라가 자신의 일에 대한 욕심을 덜 냈다면, 해성이 중국이 아니라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면, 해성이 24년만에 로라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로 노라를 찾아갔다면 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그것은 인연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들이 선택한 것일까.

재미있는건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역할을 유태오가 했다는 것, 그리고 태오가 한국말로 하는걸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말 자막이 절실했다. 그리고 그레타 리 연기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녀의 얼굴이 너무 좋았다. 별말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한 느낌. 그리고 이민 간 한국 여성의 역할에 찰떡이기도 했다.

재회 후 태오가 떠나는 길을 노라가 배웅하면서 둘은 말없이 마주본다. 그리고 한 번 꼬옥 껴안고 태오는 택시를 탄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노라의 표정은 정말 울컥했다. 어린시절과 교차되고 나영아, 라고 부르는 해성의 모습 그리고 다음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걸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음생에 대해 말하며 그때보자,고 말하며 떠나는 태오를 바라보는 노라는 아쉬웠을까, 후련했을까. 이제야 비로소 보내주는 느낌. 그리고 다음생에 무엇이 되었든 만나든 만나지않든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 이것은 비단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닐테다. 노라의 어린서절부터 이민을 오고 적응하고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어떤 마음이겠지.

노라의 남편이 태오를 배웅하고 오는 노라를 문 앞에서 기다린다. 우는 노라를 말없이 안아준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없던 일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잘 보내주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맞이할 것이다. 인연은 어쩌면 꼭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랑만이 인연이라 생각했던 이루어져야만 인연이라 생각했던 나의 얄팍한 생각이 조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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