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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 각본
셀린 송 지음, 황석희.조은정.임지윤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평점 :
각본집, 대본집을 좋아한다. 먼저 읽고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나 연극을 먼저 보고 각본집이나 대본집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활자와 영상은 어떻게 만나든 만나기만 하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다.
이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을 받고나서 영화를 먼저 볼까, 각본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이번엔 영화를 먼저 선택했다.
사실 영화를 보고 살짝 놀랐다. 내가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연’에 대한 이야기라길래 남자와 여자, 해성과 노라가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헤어진 뒤 어른이 되어 다시만나 사랑을 나누거나 혹은 헤어지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랑이야기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나의 상상력은 여기까지였다.
해성(유태오)과 나영(훗날 노라, 그레타 리)는 12살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지만 나영이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다. 12년 후 이젠 노라가 된 나영이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가 우연히 SNS에서 해성을 찾게되고 해성 역시 노라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연락이 닿은 두 사람. 하지만 뉴욕과 서울을 너무 멀다.
이후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현실과 노라의 선택으로 둘은 다시 연락이 끊긴다. 다시 12년 후 해성은 용기를 내 노라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 두 사람. 결국 두 사람은 만난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로가 갖고 있는 감정들을 확인한다. 이것이 곧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다시 만났으니 이어질거라는 생각과 다시 만났으니 서로의 현실을 깨닫고 절절하게 헤어진다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패스트 라이브즈> 이전의 삶, 전생이라는 의미다. 과연 해성과 노라의 전생은 어떤 삶이었을까. 그들의 인연은 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일까. 해성과 로라는 인연이 끊이질 듯 하지만 결국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상황을 보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마주한다. 만약, 이라는 가정들 속에서 현재의 우리들을 되돌아 본다.
결국 그들이 인연이 이어진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모두 인연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 나와 결혼한 남편 등 모두 인연이라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감독이자 각본을 쓴 셀린 송. 영화 속 로라처럼 극작가였다. 실제 이민을 갔던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패스트 라이브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첫 영화로 만들었다. 감독의 아버지는 우리가 너무자 잘 알고있는 영화 <넘버 3>의 감독 송능한이다.
자신의 경험이 많이 담겨서 그럴까, <패스트 라이브즈> 속 인물, 배경, 상황 등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가령 이런 것들, 이민을 간 노라가 아이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라든가, 노라가 뉴욕에서 고군분투 하는 모습, 로라가 영주권 떄문에 빨리 결혼하는 모습 등. 이민을 경험한 사람이 쓴 이야기 같은 현실감이 있다.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결국 우리는 과거의 사랑을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인연은 거기까지였다고 단정짓곤 하는데 과연 그것은 인연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인 것일까, 우리가 의도적으로 인연을 거기까지 만드는 것일까.
문득 남편과 한 번 헤어졌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남편이 다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아니, 남편이 연락을 했어도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면? 이것은 우리가 만든 인연일까 아니면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 인걸까.
“전생에 우린 누구였을까”
전생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로 여기서 끝, 이란 마음으로 살아가는데 가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이나 일들 앞에선 어쩌면 전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 전생뿐이겠는가, 다음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지금뿐이야, 지금이 전부야,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만약 노라가 자신의 일에 대한 욕심을 덜 냈다면, 해성이 중국이 아니라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면, 해성이 24년만에 로라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로 노라를 찾아갔다면 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그것은 인연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들이 선택한 것일까.
재미있는건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역할을 유태오가 했다는 것, 그리고 태오가 한국말로 하는걸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말 자막이 절실했다. 그리고 그레타 리 연기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녀의 얼굴이 너무 좋았다. 별말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한 느낌. 그리고 이민 간 한국 여성의 역할에 찰떡이기도 했다.
재회 후 태오가 떠나는 길을 노라가 배웅하면서 둘은 말없이 마주본다. 그리고 한 번 꼬옥 껴안고 태오는 택시를 탄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노라의 표정은 정말 울컥했다. 어린시절과 교차되고 나영아, 라고 부르는 해성의 모습 그리고 다음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걸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음생에 대해 말하며 그때보자,고 말하며 떠나는 태오를 바라보는 노라는 아쉬웠을까, 후련했을까. 이제야 비로소 보내주는 느낌. 그리고 다음생에 무엇이 되었든 만나든 만나지않든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 이것은 비단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닐테다. 노라의 어린서절부터 이민을 오고 적응하고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어떤 마음이겠지.
노라의 남편이 태오를 배웅하고 오는 노라를 문 앞에서 기다린다. 우는 노라를 말없이 안아준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없던 일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잘 보내주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맞이할 것이다. 인연은 어쩌면 꼭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랑만이 인연이라 생각했던 이루어져야만 인연이라 생각했던 나의 얄팍한 생각이 조금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