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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에마 호턴 지음, 장선하 옮김 / 청미래 / 2022년 8월
평점 :
"남극 연구기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남극 극지 관측소에서 1년 동안 의사로 근무하게 된 '케이트'. 어떤 '사고' 이후 트라우마를 포함한 몇몇 문제들을 가지게 된 그녀에게 폐쇄된 공간에서 열두 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은 마냥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적응해 간다. 하지만 자신의 전임 의사가 사고로 사망한 것과 그 사건을 둘러싸고 직원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에 의문을 품고 몰래 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얼마 후 기지 내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실 나는 영미 스릴러에 다소 취약한 편인데, 보통 적지 않은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중간 즈음에나 가야 누군가 죽을까 말까(?)이고, 그 전에는 등장인물과 이들이 처한 상황,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어지는, 체감상 초반 설정에 공을 들이는 느낌이랄까. 그러다보니 책에 흥미를 가지는 데까지 오래 걸리고, 흥미를 가진 시점부터는 남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게 늘 아쉽다. 그런데 [다크]는 '남극'이라는 특수한 배경 설정 자체도 흥미로운데, 초반부터도 무언가 삐걱삐걱 등장인물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류, 서로 친밀한 듯 보이면서도 은근하게 풍기는 '무언가'가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남극 기지에 가보지 않았어도 실제로 그럴 것처럼 느껴지는 생생한 묘사, 과거에 벌어진 사망 사건과 이미 미묘한 관계를 가진 열두 명의 사람들 속에 갑자기 툭 던져진, 심지어 과거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로 약물 중독에 가까운 수준이 된 주인공 케이트까지. 당장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곧 일어날 듯,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초반부터 책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사실 영미 스릴러나 추리소설에서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 자체는 그렇게 독특한 설정은 아니지만, 그런 주인공들이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직업과도 무관한- 자신의 능력치를 발휘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에 비해 [다크]의 주인공 케이트는 초반부터 대부분의 일들이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자신의 전임 의사가 사망한 사건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하지만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고, 간신히 한 발 나아갔다 싶으면 두 발 물러나야 하는 일이 생긴다. 심지어 그녀의 실수로 인해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보며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낯선 곳에, 그것도 이미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뒤늦게 합류했고, 사건을 조사해 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과거의 사고로 인해 트라우마까지 있는 그녀가 완벽하게 조사를 해나간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극과 기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만큼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현실적이라 답답함이 점점 강한 몰입으로 바뀌는 게 이 소설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 않은데, 일단 이 소설에서 '살인 사건'과 이를 해결해 나가는, 추리소설적인 재미가 크지는 않다. 초반에 몇몇 인물들의 행동에 품었던 의문은 소설이 전개되며 하나씩 해소가 되었던 반면 사건이 해결되면서 드러나는 특정 인물의 급격한 변모는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에 그 사람이 가진 동기가 누군가를 죽이고 현재 이런 상황을 만들 만큼 강한 것이었을까..도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다크]에서 살인사건은 독자의 관심을 유지시키는 역할, 긴장감을 조성하는 역할에 충실한 정도이고, 실제로는 고립된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행동과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걸 감안하면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마냥 아쉽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하면 '남극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혹해서 읽었는데, 막상 살인사건은 크게 흥미롭지 않았는데도 책이 재미있었다'라고 할까. 남극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머무는 무려 열 명이 넘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입체감 있게 보여주고, 특유의 분위기와 미묘한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조성한 데다 끝까지 끌고 가는 작가의 능력이 참으로 탁월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실제 작가의 경험이 아닌 데도 이만큼 남극에서의 생활을 실감 나게 묘사한 것도 놀랍고. [다크]의 마지막장을 넘긴 후에 남은 '생생한 묘사를 더 즐길 수 없는 아쉬움'은 아마도 작가의 또 다른 책이 출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질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