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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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어쩌다 어른>에서 '행복'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연자는 각 패널들에게 행복의 정의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나답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답다'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나 다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던 계기는 수없이 많았지만 내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 가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책을 통해 내 고민의 실체가 무엇이었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들었던 유튜브 강의 속 이름 석자를 책표지에서 다시 보게 된 순간 그것은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내 자신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다는 깨달음에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밤잠을 설쳤다.


  이 책은 1강 부정(버리고), 2강 선도(이끌며), 3강 독립(홀로 서서), 4강 진인(참된 나를 만나야)을 통해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가져야 함을 말한다.  자기 운명의 통제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평생 종속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정해진 길을 따라 똑같이 배우는 정규과정의 배움을 통해서는 나 다움이 무엇인지 찾지 못한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고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지금의 세계는 그야말로 새로운 판을 짜야하는 시기이다.  각자도생 뿐만 아니라 각 나라도 자신의 이익을 최 우선으로 하며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양육강식의 소용돌이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실천적 영역이 바로 철학의 역할이라고 보고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각자 개인이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높이를 갖기 위해 철학이 꼭 필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흔히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선도한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들만 봐도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한 편의 이야기의 힘에 의해 드라마 폐인을 양성하고 국가적 신드롬을 일으키게 된다.  부자동네의 유행이 차차 가난한 동네로 흐르듯 선도력은 국가의 경제력과도 비례한다.  저자는 선도력이 지성적, 문화적, 인문적, 철학적, 예술적인 높이의 시선에서 형성되며, 우리나라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집단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 철학의 수용자의 입장에서 생산자의 입장으로 각자가 책임성 있는 '나'로 존재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제4차 산업혁명이 코 앞에 닥친 현 시대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길목에서 적용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불안한 불균형을 즐기며, 평가나 비평을 하기 전에, 새로움에 도전하고, 자신 내면의 '나 다움'을 향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때 비로소 기존 체제의 껍질을 깨고 깨어날 수 있다고 했다.  탁월함은 남보다 한 발 앞선듯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다음'이나 '너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까지 감당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독립된 주체만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연대와 연결을 이룰수 있으며, 지적인 편안함에 빠져들어 호기심과 궁금증이 없어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서문에서도 밝혔듯 이 책은 2015년 건명원에서의 철학강의를 묶은 책이다.  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이라는 이름의 '건명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게 된 동기와 배경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저자는 이미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준비단계에 들어간 듯 하다.  자신의 존재감은 항상 자신에게서만 확인된다.  가슴 뛰는 삶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자신이 그리는 인생의 그림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비단 탁월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할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되겠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갖는 비결은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유롭게 철학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꿈을 가지고 철학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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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나 영어회화 영어가 재미있어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리즈
AST Jr. English Lab 해설. Steve Brown. 조희 감수 / 사람in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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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행동으로 변하는 8가지 방법 - 온은주의 비주얼씽킹 : 입문편
온은주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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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2 - 시간.언어 편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2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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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지(의미있는곳으로) 가고 싶고, (의미 있는)무엇으로 있고 싶고, 무언가(의미 있는 것을) 말하고 싶지만, 가지도 있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 말이 아닌 말(독백)을 하는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의  한 장면이다.   크라프는 매년 자신의 생일, 과거 자신의 모습을 되감기하며 과거의 삶을 후회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만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1부<시간>편의 대담자로 등장한 소설가 윤성희 작가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삶을 이야기를 통해 재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길고 긴 인생이라는 여정 속, 스스로와의 싸움에 패배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합리화된 이야기'로 치부될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구성해 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야기는 줄거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통합성을 이루며 자기 행동에 대한 도덕성과 윤리성을 스스로에게 묻게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의해 구성되는 '자기'는 자기 자신의 시간적 통일체 안에서 형성된다.  즉 인간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적 구성을 통해 외적 시간(크로노스)을 따라 사라져버리는 삶에 어떤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자기 행동에 대한 도덕성과 윤리성을 부여하는데, 이런 내적 시간(카이로스)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정체성이 곧 '이야기 정체성'이다.      152p


시간은'크로노스''카이로스'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분산되는 시간, 물리적 시간인 반면 후자는 집중되는 시간, 심리적 시간을 뜻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저자는 몸은 부득이 물리적 시간을 살 수 밖에 없지만 마음은 심리적 시간 속에 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매 순간을 죽음의 문으로 향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때 인생의 덧없음,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심리적 시간 속에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이야기에 디테일을 갖는 것.  삶에 '디테일'을 갖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되는 것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윤성희 작가는  나의 시선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했다.  인간에게 기억이 단지 과거의 일들을 떠올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저도 모르게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되찾아주는 일을 한다면 크로노스 속 나의 모습을 '변환' 또는'치환'시켜주는 매개체는 분명히 '인간의 기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기억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윤성희 작가는 대담의 끝마칠 즈음 이런 얘기를 한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까닭없이 태어나지 않았다.  까닭 없이 살이 있는 것이, 까닭 없이 견디는 것은 아니다." 185p


요즘 '이야기'는 화두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교재가 만들어지고 어릴때부터 자신의 이력서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을 해야하는 시대다.  호모 사피엔스보다 신체조건이 더 뛰어났던 네안데르탈인들이 멸종했던 까닭은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1부 <시간>편에서도 이야기의 중요성을 여러번 강조했다.  2부 <언어>편에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 즉,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좀 더 생각해본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허구를 만들어 전달하는 능력 때문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문명이 나타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오직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통적으로 믿고 말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예시를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행동을 구성하고 지배하는 핵심요소다.  아직도 6~70대 어른들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많다.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 하다싶이 기록한 당시 교과서의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박근혜대통령이 국정 역사 교과서를 자신의 임기동안 추진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서 설명된다.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에서 유태인의 거주지였던 게토에 남겨진 사람들은 제이콥이 우연히 들은 아군소식에 희망을 갖게 된다.  나중에 제이콥은 사실을 말하지만 오히려 사실을 알게된 사람은 자살하게 되고, 제이콥은 자신이 하는 1그램의 거짓말이 1톤의 희망을 만들어 내는것을 경험하게 된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거짓말과 허구는 같지만 거짓말은 사실에 대한 왜곡과 기만이, 허구는 사실보다는 '믿음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가 이성을 바탕으로 사실에 입각한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이 되는 일상적 개념 체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말한다.  은유가 단지 시나 소설에 사용되는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우리의 거의 모든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근간이라는 사실이라니 스스로 깨어있지 못하면 그들이 눈에는 쉽게 조정할 수 있는 개, 돼지나 다름없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계속 지금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자본가의 프레임에 끊임없이 설득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우리의 생각이 자기 자신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213p


채팅으로 이야기만 주고 받던 남녀가 실제로 만나게 되면 왜 실망하게 되는가?  기대한 대로 이뤄진다는 '자기충족적 예언'은 '허구'지만 '거짓'은 아니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기대나 희망대로 상대를 제멋대로 상상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미남이세요"라고 말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게된다는 장 지로두의 <벨락의 아폴로>.  이 낭독공연의 긴 대화체가 왜 이 책의 12페이지나 할애하고 있었는지 나는 뒤늦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실로 깨어있으려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찰라에 머무는 '말' 대신 글쓰기를 통해 자기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작가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상식의 프레임 하나를 깨뜨린다.  추상적.논리적 사고, 시간의식,역사의식,자기의식과 같은 인간의 고등 정신기능이 아이가 자라면서 하는 '경험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더 정확히는 '글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라고.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신의 빛살로서의 언어, 즉 존재의 의미를 밝혀주는 물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포용의 언어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섣부른 판단이 상대방의 내면의 욕구를 읽는 것을 방해한다. 시작은 달랐지만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1>의 결론과 결국은 같았다.


포옹은 존재론적 행동이다.  우리가 타인을 안아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잠시나마 그와 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낙원추방의 원체험, 곧 죽을 것 같은 실존적 분리감에서 구원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태에서 분리된 뒤부터 안고 있는 버림받은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죽을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을 뜻한다. 310p


2016년 6월 영국의 EU 탈퇴 선언(브렉시트)과 트럼프의 당선은 '닦달'과 '몰아세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일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촌 사람들은 공유와 나눔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것으로는 올바른 해법에 도달하지 못 할 것이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새해가 멀지 않았다.  나를 돌아보기에 이처럼 적합한 때가 또 있을까.  올해의 책을 이미 투표했지만 이 책이 후보로 나온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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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 혁명.이데올로기 편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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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뒷 이야기가 궁금해 그대로 사왔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가 철학카페와의 첫 만남이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나같은 사람들이 많았었는지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로 철학카페는 시리즈의 물꼬를 튼다.  철학보다는 문학이 우리에게는 가깝고 쉽게 다가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학 속에 녹아있는 "일상이 곧 철학이었네" 라는 생각과 철학이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어렵지도 멀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문학 속에서 철학을 음미하던 그 때는 그래도 '웰빙'을 이야기하던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대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만든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전 국민이 촛불을 들고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작은 촛불은 조용한 혁명이 되어 새 시대의 여명을 밝히고 있다.  지금 우리가 '혁명'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다.



책의 1부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현 세대에게 '혁명'이란 단어는 생소하게 다가온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총학생회에서 깃발을 들고 거리 행진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같은 느낌이다.  산업화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아버지 세대와 이제 먹고 살만해져 아이들 공부에 매진했던 어머니 세대를 보고 자란 우리는 큰 부족함 없이 자란 세대다.  우리에게 혁명은 여전히 남의 일이며,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대이기도 하다.  수년간 우파 정권에 휘둘린 언론들의 각인 덕북에 혁명이라는 단어는 좌파, 종북, 빨갱이를 떠올리게 한다.  현 정부에서 만든 국정교과서에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따옴표가 사라지고 보통명사화 되어 있다고 한다.  정부는 왜 혁명을 도외시하고 거리감을 갖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을까?  특정 지역 대학 졸업자였던 아버지는 이념 서적 읽는 것을 지나치게 경계했다.  민주화 운동을 몸으로 겪은 아버지 세대에게 혁명의 과정은 결과와 상관없이 비참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젊은 세대는 전쟁이나 혁명을 몸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라 머리로 읽은 세대다.  우리가 알고 있던 혁명에 대한 '앎'이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축제는 싸구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상으로 돌아간 그다음 날이다.  그때에도 변화가 있을까?  나는 여러분이 오늘을 회상하며 '그래, 우리는 젊었지. 아름다운 날이었어'라고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기본적인 메세지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임을 기억하라.  25p


혁명은 폭주하는 한 시대의 과오를 우선 멈추고자 하는 비상 브레이크다.  브레이크란 본디 '어디로 가자'는 긍정의 길이나 첨가의 방식이 아니고, '어디로는 가지 말자'는 부정의 길이자 제거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60p


저자는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안티고네'를 등장시킨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죽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여 매장을 금지한 크레온의 섭정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매장을 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왜 안티고네인가?  작가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크레온이 경제성을 제일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의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하는 정부의 법. 제도. 관행을 뜻한다면, 안티고네는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이 정당한 실정법 위에 자연법을 따르려는 시민을 뜻한다고 말한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직접 행동을 하는 시민, 즉 촛불로 저항하는 '안티고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현대 과학 기술의 특성이라고 규정한 '몰아세움'과 '닦달'이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민낯이라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코너를 독차지하는 자기계발 서적 열풍도 같은 범주에서 바라보았다.  자기 가능성의 범위를 넘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자신에게 스스로 강요하는 모습은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위험성은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크레온의 명령에 따르던 시대보다 더욱 심각하고 위협적이다.  낮에는 금욕주의적 '생산자'로 밤에는 쾌락주의적 '소비자'로 지치도록 봉사해야하는 2중의 자기 몰아세움과 자기 닦달로 코너에 몰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또 다른 세월호에 갖혀있으면서도 자기계발이라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으니 '나는' 괜찮다 자위하는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정말 괜찮은걸까.


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중세까지는 지식인에게, 근대초기에는 행동하는 민중에게 또는 특출난 개인에게 의지했다면 지금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행복과 쾌락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프레임 속에 갖혀 노예를 자처할 것인가.  현 시대의 정부는 자본주의의 경비회사를 자처하며 개인에게는 열정부족, 능력부족, 각자도생을 강조하며 자신들은 슬그머니 콘트롤 타워의 위치에서 발을 빼는 중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보며 형식적 민주주의는 가장 쉽게 독재와 실정으로 전락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실망했다.  하지만 운명이란 "피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라고 했다.  저자가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유 또한 피하지 않고 명예심과 선의지와 비타협성을 견지하며 저항하자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발달은 개인간의 거리를 좁혀놓았다.  얄팍한 지식 범위내에서 키보드 댓글 놀이를 하던 세대들이 '직접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잘못된 길을 가는 국회의원에게는 18원의 후원금으로 유감을 전달할 수 있으며, 국회의원에게 문자나 카톡으로 내 의견을 보낼수 있다.  국회 청문회에서 증인들의 위증을 가려내는 자료를 실시간으로 찾은 것도 한낱 개인이었다.  나는 역사의 바람 속에 희망의 대답을 듣는 중이다. 



2부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다.  이데올로기는 간단하게는 '관념형태', '의식형태'를 말하지만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이념 또는 사상이라는 의미를,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허위의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혁명에서 안티고네를 이야기했다면 <한낮의 어둠>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서 생겨나는 이념 또는 사상이라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한다.  집단과 이념의 폭력을 고발한 <한낮의 어둠>은 혁명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했던 이들이 왜 서로 죽이는 적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아주 단순한 이야기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영수씨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도 비슷한 맥락의 소설이라 뒤에 대담자로 등장한다.  왜 그들은 동지에서 적이 되었을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면 목적이 정당할수록 한계는 사라지고 목적과 수단 사이에 '순환적 폐쇄성'이 자리잡는다.  여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견해는 묵살되고 단지 목적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이성에 의해 구축된 모든 근대적 질서와 제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기존 규칙, 협약, 전통은 모두 폭력으로 규정했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합당한 것인까?   집단의 이성으로만 이루어진 나침반은 뒤틀린 경로로 배를 이끌지만, 전체성을 부정해 공동체의 결합과 연대를 부정하게 되면 우리는 함께 배를 만들수 없다.  그리고 자기계발과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설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시위나 혁명을 실행하기 위한 기반인  이념도, 주체도, 공통성도 상실해버릴 위기에 놓여있다.  합리적인것 같으면서도 비합리적이며, 정당한것 같아도 부당하며, 고결한것 같지만 비열하고, 현명한 것 같지만 우둔한 이것은 이데올로기다.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라는 수단을 목적으로 만들면서 1퍼센트의 사람들에게만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하고 나머지는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중에게 주지시켰다.  강제성과 자발성의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자기가 자기를 강제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저마다 각자의 생활을 영유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소비는 곧 행복"이라는 공식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는 옷과 같은 획일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우리는 다시 바틀비의 입장으로 돌아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고 자본주의를 거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몇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호르크 하어머의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통해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방법과 둘째 마사 누스바움이  제시한 인간의 합리성은 이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도 나온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라 보았다.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것은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성과 감정의 문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포용의 문제로 보았다. 


솔직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법은 실망스러웠다.  철학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일까.  과연 선의지라는 감정과 윤리, 포용으로 험난한 자본주의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대담자였던 김연수 작가도 저자와 생각을 같이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이분법적으로 깔끔하게 사는 게 아니라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그 찝찝함을 참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 옆에 다른 사람이 살게끔 놓아두는 것, 이게 사실은 윤리의 시작이자 사랑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우리는 독립투쟁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상대 진영을 용서하고 포용했던 전례가 있었고 그 결과 여전히 이념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며 연일 '사이다' 발언을 하는 대선 후보가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jtbc<썰전>에서 작가 유시민의 법에 대한 해석을 보며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작가인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법률전문가인 전원책 변호사가 법리적인 실정법의 해석에만 치우치는 반면 그는 법리적인 해석보다는 시대의 요구와 합리적인 생각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부정의 길뿐 아니라 긍정의 길도 가는 혁명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지 않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부르짖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속에서 차오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시대의 요구에 나만의 방식으로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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