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 혁명.이데올로기 편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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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뒷 이야기가 궁금해 그대로 사왔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가 철학카페와의 첫 만남이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나같은 사람들이 많았었는지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로 철학카페는 시리즈의 물꼬를 튼다.  철학보다는 문학이 우리에게는 가깝고 쉽게 다가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학 속에 녹아있는 "일상이 곧 철학이었네" 라는 생각과 철학이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어렵지도 멀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문학 속에서 철학을 음미하던 그 때는 그래도 '웰빙'을 이야기하던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대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만든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전 국민이 촛불을 들고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작은 촛불은 조용한 혁명이 되어 새 시대의 여명을 밝히고 있다.  지금 우리가 '혁명'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다.



책의 1부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현 세대에게 '혁명'이란 단어는 생소하게 다가온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총학생회에서 깃발을 들고 거리 행진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같은 느낌이다.  산업화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아버지 세대와 이제 먹고 살만해져 아이들 공부에 매진했던 어머니 세대를 보고 자란 우리는 큰 부족함 없이 자란 세대다.  우리에게 혁명은 여전히 남의 일이며,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대이기도 하다.  수년간 우파 정권에 휘둘린 언론들의 각인 덕북에 혁명이라는 단어는 좌파, 종북, 빨갱이를 떠올리게 한다.  현 정부에서 만든 국정교과서에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따옴표가 사라지고 보통명사화 되어 있다고 한다.  정부는 왜 혁명을 도외시하고 거리감을 갖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을까?  특정 지역 대학 졸업자였던 아버지는 이념 서적 읽는 것을 지나치게 경계했다.  민주화 운동을 몸으로 겪은 아버지 세대에게 혁명의 과정은 결과와 상관없이 비참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젊은 세대는 전쟁이나 혁명을 몸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라 머리로 읽은 세대다.  우리가 알고 있던 혁명에 대한 '앎'이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축제는 싸구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상으로 돌아간 그다음 날이다.  그때에도 변화가 있을까?  나는 여러분이 오늘을 회상하며 '그래, 우리는 젊었지. 아름다운 날이었어'라고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기본적인 메세지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임을 기억하라.  25p


혁명은 폭주하는 한 시대의 과오를 우선 멈추고자 하는 비상 브레이크다.  브레이크란 본디 '어디로 가자'는 긍정의 길이나 첨가의 방식이 아니고, '어디로는 가지 말자'는 부정의 길이자 제거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60p


저자는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안티고네'를 등장시킨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죽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여 매장을 금지한 크레온의 섭정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매장을 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왜 안티고네인가?  작가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크레온이 경제성을 제일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의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하는 정부의 법. 제도. 관행을 뜻한다면, 안티고네는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이 정당한 실정법 위에 자연법을 따르려는 시민을 뜻한다고 말한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직접 행동을 하는 시민, 즉 촛불로 저항하는 '안티고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현대 과학 기술의 특성이라고 규정한 '몰아세움'과 '닦달'이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민낯이라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코너를 독차지하는 자기계발 서적 열풍도 같은 범주에서 바라보았다.  자기 가능성의 범위를 넘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자신에게 스스로 강요하는 모습은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위험성은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크레온의 명령에 따르던 시대보다 더욱 심각하고 위협적이다.  낮에는 금욕주의적 '생산자'로 밤에는 쾌락주의적 '소비자'로 지치도록 봉사해야하는 2중의 자기 몰아세움과 자기 닦달로 코너에 몰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또 다른 세월호에 갖혀있으면서도 자기계발이라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으니 '나는' 괜찮다 자위하는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정말 괜찮은걸까.


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중세까지는 지식인에게, 근대초기에는 행동하는 민중에게 또는 특출난 개인에게 의지했다면 지금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행복과 쾌락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프레임 속에 갖혀 노예를 자처할 것인가.  현 시대의 정부는 자본주의의 경비회사를 자처하며 개인에게는 열정부족, 능력부족, 각자도생을 강조하며 자신들은 슬그머니 콘트롤 타워의 위치에서 발을 빼는 중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보며 형식적 민주주의는 가장 쉽게 독재와 실정으로 전락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실망했다.  하지만 운명이란 "피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라고 했다.  저자가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유 또한 피하지 않고 명예심과 선의지와 비타협성을 견지하며 저항하자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발달은 개인간의 거리를 좁혀놓았다.  얄팍한 지식 범위내에서 키보드 댓글 놀이를 하던 세대들이 '직접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잘못된 길을 가는 국회의원에게는 18원의 후원금으로 유감을 전달할 수 있으며, 국회의원에게 문자나 카톡으로 내 의견을 보낼수 있다.  국회 청문회에서 증인들의 위증을 가려내는 자료를 실시간으로 찾은 것도 한낱 개인이었다.  나는 역사의 바람 속에 희망의 대답을 듣는 중이다. 



2부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다.  이데올로기는 간단하게는 '관념형태', '의식형태'를 말하지만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이념 또는 사상이라는 의미를,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허위의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혁명에서 안티고네를 이야기했다면 <한낮의 어둠>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서 생겨나는 이념 또는 사상이라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한다.  집단과 이념의 폭력을 고발한 <한낮의 어둠>은 혁명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했던 이들이 왜 서로 죽이는 적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아주 단순한 이야기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영수씨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도 비슷한 맥락의 소설이라 뒤에 대담자로 등장한다.  왜 그들은 동지에서 적이 되었을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면 목적이 정당할수록 한계는 사라지고 목적과 수단 사이에 '순환적 폐쇄성'이 자리잡는다.  여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견해는 묵살되고 단지 목적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이성에 의해 구축된 모든 근대적 질서와 제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기존 규칙, 협약, 전통은 모두 폭력으로 규정했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합당한 것인까?   집단의 이성으로만 이루어진 나침반은 뒤틀린 경로로 배를 이끌지만, 전체성을 부정해 공동체의 결합과 연대를 부정하게 되면 우리는 함께 배를 만들수 없다.  그리고 자기계발과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설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시위나 혁명을 실행하기 위한 기반인  이념도, 주체도, 공통성도 상실해버릴 위기에 놓여있다.  합리적인것 같으면서도 비합리적이며, 정당한것 같아도 부당하며, 고결한것 같지만 비열하고, 현명한 것 같지만 우둔한 이것은 이데올로기다.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라는 수단을 목적으로 만들면서 1퍼센트의 사람들에게만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하고 나머지는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중에게 주지시켰다.  강제성과 자발성의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자기가 자기를 강제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저마다 각자의 생활을 영유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소비는 곧 행복"이라는 공식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는 옷과 같은 획일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우리는 다시 바틀비의 입장으로 돌아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고 자본주의를 거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몇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호르크 하어머의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통해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방법과 둘째 마사 누스바움이  제시한 인간의 합리성은 이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도 나온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라 보았다.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것은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성과 감정의 문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포용의 문제로 보았다. 


솔직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법은 실망스러웠다.  철학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일까.  과연 선의지라는 감정과 윤리, 포용으로 험난한 자본주의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대담자였던 김연수 작가도 저자와 생각을 같이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이분법적으로 깔끔하게 사는 게 아니라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그 찝찝함을 참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 옆에 다른 사람이 살게끔 놓아두는 것, 이게 사실은 윤리의 시작이자 사랑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우리는 독립투쟁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상대 진영을 용서하고 포용했던 전례가 있었고 그 결과 여전히 이념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며 연일 '사이다' 발언을 하는 대선 후보가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jtbc<썰전>에서 작가 유시민의 법에 대한 해석을 보며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작가인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법률전문가인 전원책 변호사가 법리적인 실정법의 해석에만 치우치는 반면 그는 법리적인 해석보다는 시대의 요구와 합리적인 생각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부정의 길뿐 아니라 긍정의 길도 가는 혁명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지 않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부르짖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속에서 차오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시대의 요구에 나만의 방식으로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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