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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평점 :
초경과 함께 피임 수술이 법적으로 정해진 도시. 섹스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원시시대 유물처럼 받아들여지고, 모든 사람들은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들을 생산한다. 아빠, 엄마의 육체적 관계로 태어난 아마네는 그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그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것만이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원했던 '비정상'의 남편과 이혼 후, 배우자를 찾는 조건부 단체 미팅에 참석해 '정상'남편과 결혼한다.
육체적 사랑은 가족이 아닌 애인관계에만 허용되고 섹스까지 가는 경우는 희박하다. 결혼은 남편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계약이고, 부부는 아이를 양육하는데 따른 책임을 질 뿐이다. 그녀가 가진 태생의 불완전함은 완전한 아이의 탄생으로 갈무리될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 사랑을 갈망하도록 프로그래밍한 엄마의 저주는 끊임없이 아마네를 괴롭힌다.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마네는 가족이 주는 안락함 속에 일시적으로 안주한다. 그러나 정의 내릴 수 없는 가족의 의미와 캐릭터에서 얻는 대리만족의 혼돈은 계속된다. 그들은 지극히 '정상'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실험 도시 지바로 도피한다.
엉덩이 사이에 튀어나온 꼬리뼈처럼 진화의 흔적으로만 성욕이 존재하는 도시. 사랑의 도피처, 실험도시 지바는 공동 출산과 공동육아를 실험하는 곳이다. 모든 사람에게 임신과 출산의 의무가 부여된 에덴동산과 같은 도시. 그곳에서는 남자도 인공 자궁 시술을 할 수 있어 출산에 대한 의무가 있다. 실험 도시에서 태어난 아가는 모두의 아가가 되어 모든 엄마에게 보살핌을 받는다. 사랑이 없는 도시 지바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가족과 사랑을 찾게 되었을까.
저자는 <편의점 인간>에서 그랬듯 독자를 정상과 비정상의 낭떠러지에 가차 없이 몰아세운다. 가족과는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농담처럼 하던 얘기가 기정사실화되고, 밖에서 만나는 애인과의 섹스는 합법화된다면? 남녀 구분 없이 출산과 부양의 의무를 갖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책임과 의무를 위한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면? 당신에게, 또는 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비혼과 딩크족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소멸 세계>가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의 의미를 재정의 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렀음을 얘기한다.
엄마가 되고서야 모성애가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네의 엄마가 육체적 결합으로 만든 아이가 정상이라고 세뇌시켰던 것과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무의식에 심어진 것이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집착했던 이유가 과연 세상을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본능'이었을까? 본능이라고 착각한 무의식은 지금도 항변하고 있다. 네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정상이 아닐 수 있음을. 소멸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관계뿐만이 아니다. 개개인들의 특질을 갖고 태어난 인간만이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이고 광기 어린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