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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산다
가쿠타 미츠요 지음, 김현화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3월
평점 :
그것은 난데없이 찾아온다. p.33
나의 인생 드라마 중에 <섹스 앤 더 시티>가 있다. 시즌 6이 될 때까지 녹화해서 보고 케이블 방송에서 재방영 할 때마다 봤던. 노골적인 성적인 표현과는 별개로 각자 다른 네 명의 여성이 겪는 삶의 에피소드는 나이가 들어서 보니 더욱 공감이 되었다. '그것은 난데없이 찾아온다'라는 부분에서 불현듯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네 명의 여성 캐릭터 중에서 가장 성에 개방적이고 솔직한 사만다. 매사 긍정적이고 당당한 그녀가 캐리를 조용히 화장실로 불러 털어놓았던 고민은 바로 은밀한 부분에 새치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 당시 사만다는 연하의 스미스를 사귀고 있었던 터라 자신의 나이가 드러나는 일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결국 스미스에게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염색을 시도하고, 염색 후 색이 광대머리 색깔처럼 붉게 나와 광대를 싫어하던 캐리가 경악했던 장면이다. 그래, 그것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난데없이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었지. 그것은 중년의 시작. 중년이 되어서야 '젊음'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젊음이 어떤 것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열정적이고 바쁘게 흘러가던 시간이 바로 그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 <무심하게 산다>는 중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가쿠타 미쓰요의 솔직한 일상생활 속에서 되짚어 생각해 보는 책이다.
만 40세가 되면 나오는 국가 건강검진표. 만 40세는 만 66세와 함께 생애전환기로 분류되어 학교 가기 전에 아이들이 건강검진을 받듯 어른들도 건강검진을 받도록 하고 있다. 삼십 대 중반부터 나이를 셈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건강검진표를 받고서야 내 나이를 인지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건강검진을 갔다 저자가 당했던(?) 유방촬영 기계의 공포를 맛보았다. 사실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삼십 대 후반이었는데 외형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작년부터였다. 손목과 손가락 마디에 결절이 생기고 오른쪽 손목은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으로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방문했을 때는 눈물이 났다. 찬물 샤워에 내복이라는 것은 원래 입어 본 적이 없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처음 느껴보는 추위는 공포스러웠다. 해가 바뀔수록 추위를 느끼는 통점은 더 예민해졌다. 그래서 한 여름 더위가 아니면 내복을 꼭 챙겨 입게 되었고, 촌스럽게 생각했던 꽃무늬 스카프는 두 개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저녁은 꼭 탈이 난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변화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몸에 큰 병이 생긴 것은 아닐까 매일 검색창과 지식인을 섭렵하고 병원에도 다녀왔지만 특별한 증세는 없다고 했다. 생애전환기가 40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서야 산술평균의 위대함을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어른들께 나의 고통을 호소하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신다. 그렇다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 앞에서도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누가 나의 나이 듦을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서글픔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무심한 표정으로 고양이가 다가와 다리 옆에 자리를 잡고 빵을 굽는 자세로 앉는다. 털의 따뜻한 기운이 종아리 언저리부터 햇살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가슴까지 따뜻해진다. 자꾸 넘어지는 가쿠타 미쓰요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양이처럼 무심한 듯 내게 위로를 던지고 있었다. 위장조영술 할 때 먹는 바륨의 정체에 대해 매년 연구하고 싶다는 그녀의 유쾌한 발상과 긍정적인 사고를 마주하는 순간 귀찮고 두렵던 건강검진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즐거운 일처럼 다가온다.
결점을 없애려 들기보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p. 70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적인 말처럼 갈팡질팡하다가 흘려버린 순간들, 내가 써보지도 못하고 줄어드는 것은 시간뿐만 아니라 돈도 마찬가지다. 쓰지 않고 은행에 넣어두면 실질가치는 점점 하락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탐하는 노인들을 특이한 사람들로 분류하고 격멸하면서 나이가 들면 저절로 온화해지고 두루 지혜가 생기는 줄 알았다. 막연하게 경험의 연륜과 지혜가 강물처럼 흘러 상식적이고 박식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볼 때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책도 많이 읽고 이젠 좀 변해야 하는데 10년 전 일기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얼굴 말고 다른 곳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부분에서 나이 듦에 대한 그녀만의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불편한 무지 외반증을 없애고 싶은 그녀의 바람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무엇을 더하기 보다 불필요한 것을 빼는 것이었다. 나이 듦에 대한 삶의 무게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 그녀를 만난 후 조금은 홀가분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