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그림자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1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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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먼 옛날은 지구의 탄생을 포함하기는 하나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엄마의 뱃속에 있기 전부터 있었을 것 같은 개체도 똑같이 그러하다. 수십억 년이 흐른 후에서야 생명체가 등장했으나 그 또한 알 길이 없다. 개체들의 결합에 수정은 어둠을 걷어내는 일이었으나 그 또한 알 길이 없다. 그저 아득히 먼 옛날은 지구의 수십억 년과 개체의 자궁 속에서의 한 달과 그저 다를 바가 없다. 생명체가 진화를 거쳐 그저 움직이는 동물들이 번성했을 때나 양수 속에서 꿈틀거리며 듣기만 하는 감각체는 그저 같을 뿐이다.

양수 안의 개체가 아득함을 느끼는 시점은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이 호모라는 틀로 지상에 출현했을 시점과 올곧이 같다. 이미지는 저녁의 어둠이 내린 오솔길과 같고 새벽의 날 밝기 전의 짙은 안개와도 같은 것, 이미지가 세상의 혼돈을 휘젓고 다닐 때는 이미 열 달이 되었고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서 홀연히 세상을 휘젓고 다닐 때와 다를 바가 없다. 시간은 이렇듯 뒤섞이며 도처에 존재했으며 사간의 역행과 순행은 이렇듯 동질성의 선상에 존재한다.

울부짖으며 세상의 공기를 흡입했을 때도 이미지만이 존재했고 언어가 글이 되어 남지 않았던 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망각도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온갖 추측은 혼미를 일으키며 그저 세상에 주저앉았으니 그가 본 세상과 호모 사피엔스가 본 세상은 아주 조금 언어를 통해 알려졌을 뿐이다. 글이 써진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아니 적어도 그것이 현재의 시점에서 파헤쳐 졌을 때 과거는 어렴풋이 되살아났고 글쓰기는 대화와 무관해진 낯선 언어로서 존재를-위한-언어가 되어 버린 언어일 뿐이다. 신화가 세상의 판을 오랫동안 뒤흔들었으며 실재계는 결코 현상계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이 없는 한 개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왔을 때도 한참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을 뿐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떠도는 그림자들은 시간을 들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망각과 기억의 오래된 조각들을 현재로 끌어내는 힘겹고, 생각으로 하고, 몸을 굽히고, 언어 자체는 사용하지 않고, 언어로 하는 작업이다. 언어 뒤편에 존재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자연 언어에 반하는 것으로서 동시대의 왕국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왕국이다.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면서 현재에 제 얼굴을 들이미는 게 그에게는 과거이다. 그럴지라도 과거는 경련의 떨림이나 어둠 속에서는 소망으로 넘쳐나므로 어둠은 살짝 빛이 보이는 길이며 가시지 않은 어둠 속의 안개이며 휘몰아치는 바람이다.

신화의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글이 용솟음쳤을지라도 실재와 인식이 다름일 뿐 이미지는 어디에도 어느 때에도 존재해 왔고 예술만이 그 존재성을 보편화시키려 하였을 그 시기는 영원성이 위협받는 파열에 살고 있을 뿐이다. 누가 감성을 논하리오? 누가 감성을 표현하지 않았는가? 다만 이미지가 올곧이 묘사되지 않을 뿐 역사 속의 인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체도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의 속성을 모를 뿐이다.

현재와 과거, 아득히 먼 과거를 넘나들며 작가는 시간의 영원성과 시간의 멈춤과 시간의 뒤섞임을 얘기한다. 이미지는 언어에 앞서며 그 왕국이야말로 실재하는 왕국이며 기억과 망각이 뒤섞여 버린 시간의 혼돈은 언어일 뿐이다. 저녁이 어둠이 내린 길, 어슴푸레 다가오는 동트기 전의 짙은 안개, 휘몰아치는 바람은 시간을 혼돈 속에 몰아넣으며 우리 안에 있다고 작가는 뒤섞여 버린 인류의 연대기를, 혼돈 속의 개체의 일생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지식이 방대하고 이를 신비로 담아냈으며 이는 동서양을 아우른다. 인도, 중국과 일본의 작가도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이들은 고대와 중세적 사람들인 것에 또한 놀랍다. 작가의 화두는 단연 어둠이다. 그래서 빛이 난다. 바로 아우라인 듯싶다.

, 아득한 혼돈 속에서 어둠이 존재하매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은 우리를 감싸 안으며 시간을 흔들어대고 언어로서의 설명 불가해한 이미지를 그래도 언어로 가까이 가고자 하는 작가의 여행은 현재에 있음이라!

나 꿈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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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사 - 고대 로마에서 G2 시대까지 제국은 어떻게 세계를 상상해왔는가
제인 버뱅크.프레더릭 쿠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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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항해의 막이 올랐으나 정작 제국을 정점으로 찍기 위한 대항해 시대의 서막은 에스파냐 제국(합스부르크)에서 비롯되었다. 아니 이의 시작은 결국 제국의 팽창에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었다. 동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및 중아시아를 세력권에 두었던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쪽으로 진격 못하는 에스파냐 제국에게는 서쪽 바다를 향한 대항해를 향한 기폭제가 되어 버렸다. 카를대제(5)와 쉘레이만은 유럽을 양분하며 제국의 기치를 들어 올렸고 이들 모두 비록 상이한 종교 하의 통치였으나 물론 제국 로마를 닮으려 한 것은 1400년 제국을 지속시킨 로마의 위엄에 덧붙여 그토록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그 비결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었다. 16세기 유럽의 분포였다.

1400년 제국은 제국이 들어서기까지 수백 년이 결렸고 서로마가 망한 다음에도 동로마는 천년을 더 버텼다. 잠시라도 동로마는 옛날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에 버금가는 제국의 영토를 가지기도 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굳건히 버티면서 서서히 작아진 끝에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진이 만들어낸 제국은 이미 로마가 제국을 선언하기 200년 전에 오늘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와 맘먹을 만큼의 영토를 바탕으로 왕조가 바뀌는 일은 있어도 그 제국은 그대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로마는 망한 반면에 중국은 비록 왕조가 바뀌었지만 그대로 유지되는 까닭을 세계 제국사는 지형의 영향을 주된 이유로 뽑고 있는 듯하다. 로마는 5세기 아틸라의 공격에 허약했었고 급기야 11세기 몽골 제국에 유럽을 내주게 되는데 이는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들의 통치는 70여 년에 결친 짧은 기간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남겨놓은 많은 유산이 오늘날 동서양의 교류와 정복이라는 차원에서 제국이 물려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합스부르크도 오스만도 그렇다.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에 이어 영국으로 이어진 제국의 권력은 식민지를 만들므로 이루어졌고 경쟁화는 다른 국가가 식민지에서의 자원을 차지 못하는데서 격화되었다. 유럽의 나라들이 돌아가며 제국을 형성케 한데는 새로운 권력 레퍼토리를 창출하는데 있었고 이는 물론 선박, 군비 혁신이 주를 이루었고 그 경쟁은 제국의 쇠망과 탄생을 가능케 하였는데 물론 중국 같은 제국은 그럴 필요 없이 방대한 땅을 다스리는 거대하게 갇힌 세계에 처해 있었고 역설적으로 본래 제국이 아니었던 유럽의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창출해 내었던 혁신이 중국의 발목을 잡은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16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의 재국은 권력을 행사하는 공간의 규모가 글로벌 해졌고 다면적 전환을 통해 정치가 재편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은 신, 구체제에 대한 반전이라고 해석되며 소위 자본주의라는 근대적 틀의 혁명은 단연코 영국이 시발점이다. 이 제국은 혁명적이라 할 만큼 세상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는데 산업혁명이야말로 모든 것을 근대화시킨 결정적 한방이었다. 이 와중에 미국이라는 제국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제국은 아메리카에서도 생겨났다.

독일과 일본이 제국의 반열에 나란히 오르는 것은 1, 2차 대전을 통해 확인되었는데 이 둘 공통점으로 민족을 들고 나온 제국이라는데 있어서와 짧은 기간 동안의 점령이라는 침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물론 1945년 이후의 세계는 신질서로 재편된다. 적어도 민족들은 발전했으며 수많은 신생국이 적어도 같은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세계는 재편된 것이 20세기 후반이다.

그렇다면 과연 제국은 종언을 고한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들은 소위 민족 국가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제국은 또다시 만들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 제국의 형태가 오히려 민족국가의 지속의 불확실성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물론 제국의 그늘에서 경쟁을 상실한 민족 국가들은 핍박을 받겠지만 제국은 그 형태를 달리할 뿐이지 인류사에서 영원하다. 다만 기존 제국의 권력에의 오만을 벗어나 통합과 상호 존중을 인정하는 또 다른 정치체제를 저자들은 상상하고 있다. 이렇게 될지는 부정적일지라도...

제국과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와의 차이를 설명하고 제국들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학구적으로 파헤친 수준 높은 저작이다. 오늘날 민족을 외치며 나라를 국한시키는 나라는 어차피 제국을 이룰 수 없으며 제국은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나타난다는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 책 세계제국사는 흥미 유발의 역사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제국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지적 스릴을 맛볼 수 있는 저작으로 그 진지함에 박수를 보낸다.

매우 수준 높은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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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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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성적 행위에 과학적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 등이 너무 생소하고 이해 불가하여 반박이 불가한 경우에는 일단은 이를 수용하는 경향성이 인간에게는 있다.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이해가 수반되어야 반박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비판 저작들이 그렇고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1905년 관성계에서의 법칙을 다룬 특수 상대론에 이에 10년 후에 이를 가속계까지 일반화시켜 일반 상대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의 중력에 관한 방정식의 중력파 존재 예측은 금년에 와서야 LIGO 실험 팀에 의해 확인되었다. 무려 100년 만에 증명된 셈이다. 물론 그간 여러 실험적 검증이 있었으나 중력파는 거의 결정타에 가깝다.
 
오늘날 현대 입자 물리는 끊임없이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기본 입자들이 진동으로 우주 공간에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거시 우주와 미시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의 지식 축적으로부터 기인한다. 일반 상대론과 양자역학은 상호 보완 관계이지는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형태로는 상호 모순된 관계라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두 개의 상반된 이론이 잘 맞는 대성공 뒤에 이 두 이론을 통합하여 이들 모두를 호환성의 관점에 두려 하는 노력의 시도로서 양자 중력(Quantum Gravity)이라는 것도 있다. 다만 미완성이며 완성을 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양자중력을 전공하는 저자 카를로 로벨리가 행한 일반 강연을 묶은 책으로 인간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해를 인지적 관점에서 기술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미 지구가 평면이 아닌 , 반구 모양으로 오직 위에 하늘이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고대 사람들의 인식 구 형태의 모양으로 주장한 것으로부터 인간 인지의 발전을 논하기 시작한다. 물론 현대 물리에서의 양자론과 일반 상대론의 성공은 획기적으로 인간의 자연의 이해에 더 큰 새로운 지식을 넓히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모르는 것들은 수없이 남아 있으며 이 노력의 일환 중의 하나가 중력을 양자화 시키는 연구라 한다.
 
물론 저자가 양자 중력을 전공하는 물리학자라서 그 주제를 얘기하고는 있어도 그는 인간 노력의 일환으로 제시할 뿐 그간의 인간에 의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사고가 수많은 변화를 거쳐 왔으며 아직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의 없으며 오늘날의 공간에 대한 이해는 공간 자체가 비어 있지 않으며 시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도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론으로부터 나오는데 공간의 미스터리로부터 더 나아가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더욱더 어려운 문제라는 제시를 한다.
 
사실 저자는 인간의 자유 의지도 물리 법칙에 근거할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열역학에서의 엔트로피라는 개념과 무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것이 시간의 화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인간이 그것을 알아낼 수 없을지라도 분명히 인간의 자유 의지조차 어떠한 일련의 물리 법칙에 근거할 것이라는 말로 이 책을 끝맺는다.
 
그가 제시한 우리 우주에서의 질료, 공간 및 시간의 개념의 인지 변화처럼 언젠가는 우리 자신조차 물리 법칙에 근거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이런 제시는 이미 철학의 한 분파로서 나와 있다. 수천 년 동안 뭔가를 더욱더 알아 왔지만 우리 인간은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저자이다. 동의한다.
 
얇은 책이나 매우 함축적인 책으로 양자 중력을 연구하는 저자의 깊은 사유가 녹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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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까치글방 130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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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파열의 시대를 읽고 홉스봄을 알게 되었는데 극단의 시대라는 그의 책이 배달되었다. 읽고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 읽게 된 것은 제목이 주는 긴장 때문으로 이 분이 또 어떤 얘기를 썼을까가 매우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극단의 시대는 20세기 인간의 역사를 조망한 책으로 물론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정치(전쟁)와 사회뿐만이 아니라 경제, 예술 심지어 과학도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조망한 완전판이다.

보통 필자는 역사 책을 접할 때 대부분 감성이 잡힌다. 이는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이 많은 까닭으로 나의 독서 행태의 특징이기는 하다. ‘극단의 시대는 문장이 매우 건조한데 그 이유는 역사 서술이 사건 중심이기 때문이고 방대한 양을 곳곳에 홉스봄 자신의 관점을 기록하자니 문장이 둔탁한 부분도 없지 않다. 우선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놀란다.

20세기의 시작은 곧바로 전쟁과 함께이다. 홉스봄은 이를 31년 전쟁이라 명명하는데 물론 이는 1, 2차 세계대전을 이른 것인데 비록 중간에 전쟁이 없는 시기가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평화의 시기라고 보기에는 오히려 전쟁의 연결선상에서 보는 저자의 관점이 있기 때문이고 17세기의 유럽의 30년 전쟁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쟁은 여하튼 열강들의 각축장이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등장한다. 그의 문장이 비록 건조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의 수는 감정이 없이는 읽을 수 없다. 더욱이 벤야민 덕에 요즘 당시 시대에 유난히 머물러 있는 나는 인간 역사에 필연성을 담보로 한 이런 거국적 못된 짓들이 통계적 수의 압도 하나로 이해되는 대신에 인간 개인의 입장에서 느끼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극악한 비극이다. 피할 수도 없는..
 

역사 전공자답게 정치와 전쟁을 연대기적이 아닌 해석적 관점에서 매우 다양한 예를 들어 상황을 설명하는데 물론 책 제목인 극단의 시대라는 것에 동의하게 될 만큼 건조한 문장으로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을 던져 놓았다. 전쟁이 왜 일어났냐는 것은 학자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뉠 만큼 그리 쉬운 분석을 아닐 것이다. 홉스봄도 그 점을 지적하는데 일단 2차대전은 히틀러라고 규정해 버린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방아쇠는 권력자의 몫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2차대전으로 인류가 몰린 반인류성은 히틀러로 책임을 전가해야 할 만큼 그는 반인류적 인간이라 나는 생각한다. 공산주의가 극좌라면 나치는 극우이지만 권력의 극악한 횡포적 측면에서는 같다는 것은 다수의 역사학자가 동의한다. 예로 한나 아렌트는 이들 모두를 전체주의로 명명한다.

적어도 20세기에 인류사적으로 지구 상의 인간이 정말 크게 고통받던 시기는 31년 전쟁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한다. 전쟁뿐만이 아니라 그에 따른 경제의 피폐는 차치하고라도 인간 개체 자체의 심리적 위축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인 시기였던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시기에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지식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물론 열강들에 국한된 일이기는 해도 후반기에 들어 이 상황이 확장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로 노벨상 수상자의 통계를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는 역사적 사건을 군데군데 통계적 수치를 넣어 설득력을 배가시킬 뿐 아니라 그가 이 책을 위해 수집한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기도 한다.

하권의 18장 마법사와 도제 편은 과학 편으로 인문학자인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과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이채로워 무엇을 구상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매우 큰 참조가 될 듯하다.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20세기의 인류사는 홉스봄이 지적한 대로 극단의 시대가 아니었나 한다. 어디 어느 시대에 어렵던 시대가 없었나마는 가장 극단적인 삶을 살았던 20세기 인류에게 술 한 잔을 권한다.

1990년대 초까지 조망한 그의 이 대 저작은 아마도 지금까지 조망한 것으로도 해석될 만큼 연결성이 있다. 물론 스마트폰 사건을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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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극단의 시대는 출판사로부터 배달되었다. 파열의 시대 리뷰가 당첨되었다고 보냈다는데 나는 이런 광고가 있었는지 조차 몰랐다. 여하튼 매우 지성적인 책을 보내준 출판사에 감사를 이 리뷰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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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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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만큼 인간의 감성을 치우친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없을 듯싶다. 비록 타인의 고통일지라도 겪어야 하는 그 자체로서가 끔찍한 것은 꼭 죽음만이 아닌 것이 부수된 상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가족 등과 연결될 때 감성의 극단적 결과로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듯싶다. 전혀 자신들의 의지가 연관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고통은 그렇게 생겨나며 더욱이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로에서의 고통은 결론지어진 것이 아니어서 더욱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고통’은 그런 소설이다. 2차대전의 종전이 다가올 무렵 그녀의 남편이 수용소에서 돌아오는지 못 돌아오는지에 관한 그녀의 고통 가운데에서의 기다림에 대한 보고서이다. 레지스탕스였던 그녀와 그의 남편은 게슈타포에 체포되는데 남편만 끌려가고 수용소에 갇혔다는 소문만을 듣게 된다. 1944년 경이므로 전쟁 막바지이며 그녀는 모든 수단 방법을 강구하여 그의 정확한 행방을 수소문하려 하는 과정에 죽었을지도 모를 그의 실재에 대한 절망감과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 속에도 불확실성에 대한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남루하게 만든다.

아무 소식이 없다. 빛이라고는 비치지 않는 적막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작가는 생환의 바램을 위해서 적군도 아군도 소용이 없는 감성이 되어 버린다. 그저 살아 돌아와만 준다면 나치에게 감사할 뿐이고 레지스탕스의 일도 나치 장교와의 일탈도 D라고 불리는 친구도 적어도 그가 살아 돌아올 때까지 붙들 수밖에 없었던 수단이었을 뿐이다. 파리가 해방되고 난 후 돌아온 그의 남편은 보름여 미음으로 해결해야 죽지 않는 기괴한 몸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거품이 나는 녹색의 끈적거리는 그의 변은 보름 동안 계속되었다.

1943에서 1945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저항군에 속해 있다가 남편만 수용소로 보내지는 참상을 겪고 일원이던 D라는 남자의 도움을 받고 남편을 체포한 게슈타포에게 도움을 얻고자 그녀의 정부가 된다. 돌아온 남편이 어느 정도 낫자 그녀는 이혼을 요구하는데 D와의 결혼을 위해서였다. 게슈타포가 잡혀 재판을 받을 당시에 그녀는 그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증인으로 나와 하게 되는데 결국 그는 총살당한다.

3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기다림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인간 그 어느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모두 전쟁의 책임이라고 돌리기에 충분하기도 하지만 그녀 자체가 그 고통으로 적국과 아국을, 또 애국자와 매국자를 보는데 혼란스러운 심상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전후 그녀는 나치 협조자를 처벌하는데 한몫을 하기도 하지만 게슈타포와의 관계 때문에 그녀의 정체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한 개인이 어찌 살 건 그의 인생이지만 전쟁이 낳은 이 희대의 일련의 한 인생의 역정에 뒤라스를 비난하기보다는 고된 그녀의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문장이 거의 모두가 1형식으로 짧지만 그녀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전소설. 긴 소설 하나와 짧은 소설 몇 개로 이루어져 있는 책으로 게슈타포 얘기는 짧은 소설의 첫 번째이고 그녀가 그의 정부였다는 얘기는 암시하듯 한 문장으로만 나온다. 물론 해설서에는 그렇게 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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