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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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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중.

시절과 기분 서평 <지워지지 않으려고 지웠던 것>

페이지는 가제본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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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작가는 2016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2019년과 2020년에 젊은작가상을 받았다. 2018년에 출간한 소설집 󰡔여름스피드󰡕처럼이 작품도 성소수자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어쩌면 가 회피했던 위태로움으로하지만 그것을 직면하는 용기로 시작된다. ‘는 오랜만에 대학 시절 사귀었던 혜인에게서 자신의 단행본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는다현재 는 작가로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지만그 이전에 만났던 그 시절의 사람들”(16)은 지금의 나를 모르고”(16) 있다. ‘는 혜인에게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이에 곧바로 다음 주말로 약속을 잡는다분명 는 칠 년 만에 오랜 친구”(8)를 만나는 것인데도, “초조함”(12)과 불안”(12)은 떨치기가 어렵다하지만 는 혜인’ 그리고 과거의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애인의 배웅을 뒤로 한 채 하행선 열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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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문학 카테고리를 보고서 누군가는 그들의 비밀을 엿보고 싶은 마음에 책장을 들출지도 모른다어쩌면 주인공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달은 계기가 뭔지성소수자의 연애는 어떤지성소수자끼리만 공유하는 상징이나 문화가 무엇인지 염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성소수자와 자신의 차이점을 잔뜩 상상하고서는 지면에서 그것을 확인하기를그리고 그로써 성소수자를 자신과 엮일 일 없는 별종으로 취급하는 일이 타당해지기를 소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충실하게 배반한다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성소수자를 자신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았고분명 주변인들에게어쩌면 우리 곁에 녹아들었다.

이는 작중에서 정체화 이전의 ’, 그러니까 의 대학생 시절을 평범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예를 들어, ‘가 캠퍼스를 누비는 모습은 어휘부터 동선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 대학 학생이라면 작품의 몇몇 부분에서 학교 소식지를 읽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내용 또한 그리 낯설지 않다그 시절 대학생이 보일 법한 대화와 근심은 물론이고타인과의 관계가 바람대로 흐르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소식을 궁금해 하고 때론 상심하던 일 또한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이야기다이를 통해 는 주변에 있었을 법한 평범한 엑스-대학생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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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가는 결코 주인공의 소수자성을 도려내지 않으며이는 정체화 이후 사회가 성소수자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을 포착하며 성취된다.

그 시절 내가 혜인에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그러나 그건 시간이 훌쩍 지나 나를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소환된 기억이자 대개 취사선택 된 감정이었다나는 혜인을 향한 감정을 부정하며 나를 다졌고혜인과의 연애는 언제나 초석으로만 제 구실했으며그 시절의 심문(心紋)을 살피는 일보다 다급한 건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엇이냐?’고 대면하는 일이었다.

내가 게이라는 명백한 사실앞에서 지나간 희미한 감정과 기억을 분석해서 무엇하겠는가지금의 나에게 귀 기울이는 건 현명하고 건강한 선택이었지만그 선택 앞에서 혜인은 번번이 지워지기 일쑤였고그래서 그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엄습하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14-15, 밑줄은 인용자 표시)

성소수자 개인은 자신이 표현한 성적 지향과 불일치하는 경험을 축소하도록 압박받는다이는 과거의 경험이 (특히 사회의 암묵적 가정에 합치하는 경우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지난날의 교류가 조금이라도 이성애적 연애관에 합치하는 경우그건 너무나 쉽게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을 부정하는 증거로 오용된다결국 성소수자의 사랑은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던’ 이의 탈선으로 간주되거나혹은 교정(을 빙자한 폭력)을 통해 예전과 같이’ 돌이킬 수 있는 선택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다시 말해성소수자는 자신을 드러내며 억압당했던 자신을 되찾지만되찾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사회의 암묵적 가정을 거역하는 모습만을 드러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 또한 성소수자로서의 나를 [다지기]”(15) 위해 혜인과의 기억을 지운다약점 같은 흑역사”(15) 없이 순수하게’ 성소수자여야만 자신을 부정하는 타인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명백한 사실”(14)이라고 설득할 수 있다주인공은 내가 선명해지는 동시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은 아주 근사했다”(39)는 말로 정체화 이후의 심경을 표현한다이는 정체화 이전의 가 희미해지지 않고선 게이로서의 가 위협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현재 자신의 성적 지향을 표현하기 위해선 그걸 확립하는 쪽이, ‘확립하기 위해선 혜인과의 관꼐에서 부끄러움”(15)을 느끼고 혜인을 향한 감정을 부정하며” 사는 쪽이 현실적으로 쉬웠다과거 혜인과의 교류와 제 성적 지향의 양립 가능성을 외부에 끊임없이 증명하면서 겨우 선명해진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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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
백세희 지음 / 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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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독서 경위

: 이 책은 작년에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다. 비록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바로 읽을 생각이었지만, 만성적인 게으름 탓으로... 차일피일 독서를 미루다 해를 넘겨서야 읽게 되었다.(친구야 미안하다)

: 2019년 02월, 개강을 스무 밤 남짓 앞둔 대학생이 심심해서 읽었다. 오후 3-4시쯤 첫 장을 펼쳤는데, 읽다가 해가 졌다. 읽는 데는 4시간 정도 걸렸다.

 

1. 소개

(1) 구성과 내용

: 일반적인 목차와는 달리, 1장이 아니라 1'주'다. 이는 이 책이 저자의 상담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분부전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선생님'에게 매주 심리 상담을 받았고, (사전 합의 하에) 이를 녹음하여 기록으로 정리한 뒤 이 책을 냈다.

: 말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감된 게 없지야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구어체의 특성이 잘 살아 있다. 예를 들어, 

따라서 독자는 '나'로서, 혹은 '선생님'으로, 혹은 상담 장면을 지켜보는 외부인로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술술 읽히는 건 덤이다.

 

(2) 의뭉

-저자는 왜 이 책을 출판했는가?

: 자신의 어두운 면을 (내면의 우울, 열등감, 질투를)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줄 법한,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도 힘들진대, 대중은 그보다 훨씬 거대한 집단이다.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책의 ~~에서 답한다.

"인용"

즉, ~~이다. >> 이는 곧 ~이므로, ~이다. 우울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충고일 것이다. 이 글은 2019년 02월에 쓰고 있지만, 여전히 이 책은 이름만 들어도 무슨 책인지 아는 사람이 많다. 저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셈이다. 판매 부수로

 

(3) 결말

완벽한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게 인상적이었다.

"인용"

결국 우울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므로, 이에 잘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게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2. 평가

: 쉽고 솔직한 문장으로 고통과 희망을 전하는 책.

- 1-(1)에서 밝혔듯, 책의 상당 부분이 구어체로 적힌 상담 기록이며, 나머지 산문도 어렵지 않게 읽힌다. 저자가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썼을지,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고민하며 읽다 보면 책장이 잘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문장이 배배 꼬인 책은 아니다.

- 다만

 

번외)

-추천: 세상 사람들 중 자기만 못난 것 같아서 위로를 받고 싶은 누군가에게.

: 나만 우울하고 못났고 뒤처지는 것 같아 울적할 때 이 책을 읽는다면, 공감되는 글귀를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고작 검은 점들의 집합일 뿐인데,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담아두던 생각이 누군가가 빳빳한 종이 위에 유려한 활자로 옮겨둔 것을 확인할 때의 놀라움, 흥분, 안도감이란.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알랭 드 보통의 "불안"

: 알랭 드 보통은 위 책에서 불안의 원인을 5가지로 지목하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사랑받지 못해서 느끼는 두려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우리는 어린아이일 때 부모한테서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지만, 커가면서 더 이상 그런 사랑을 기대하기 힘들어지고 불안함을 느낀다.

: 이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의 말에서 종종 엿보인다. 저자는 자신이 바라는 만큼 사랑받지 못할 때, 혹은 사랑받지 못할까봐 일부러 가시 돋힌 말을 해서 주변인을 떠나보낼 때 우울을 느끼곤 한다.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해결책이 백세희 작가의 우울을 걷어내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유 모를 불안감의 정체를 더 파헤치고 싶다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도 한번쯤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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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이야기 - 라틴어 원전 번역,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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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변신, 도약

 

1. 서론

변신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관통하는 소재이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인간, , 요정, 동물 등이 모습을 바꾸며, 그 변화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면서 다른 이의 변신과 연결된다. 물론 어떤 이야기에서는 변신 외의 것이 훨씬 두드러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울릭세스와 아이약스가 아킬레스의 무구를 차지하려고 격렬한 언쟁을 벌이는 이야기에서는 변신만이 중시되지는 않는다.1) 이렇듯 󰡔변신 이야기󰡕 속 이야기가 모두 변신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신은 작중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꾸준히 등장하며 그 존재감을 뽐낸다. 사실 작품의 제목부터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이니,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선 먼저 변신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변신이란 무엇인가? 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는 변신(metamorphosis)형태, 모양, 혹은 구성 물질에 변화가 일어나는 행위 혹은 과정으로, 특히 초자연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로 정의한다.2) 이 현대적 정의는 오비디우스가 보는 변신과 상당 부분 합치한다. 󰡔변신 이야기󰡕의 서시에서 변신은 새로운 몸으로 변신한 형상”(11)을 수반하고 그대들(신들)에게서 비롯된”(12) 것으로 그려진다. 즉 변신은 육체가 변하는 것이며, 이 변화는 인간 스스로의 힘보다는 신들의 권능으로 실현된다. 변신을 이루는 힘이 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부각하긴 하지만, 오비디우스의 정의 또한 신체의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얼핏 봐선 󰡔변신 이야기󰡕의 변신은 현대인이 보는 변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둘은 최종적으로 변신을 이루어내는 힘을 누가 쥐고 있는지가 다르다. 현대의 소위 변신물에서 변신은 대개 인물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된다. 예를 들어 세일러문이나 파워레인저는 주문과 특정 동작을 통해 범범한 외관을 영웅적인 용모로 교체한다. 하지만 󰡔변신 이야기󰡕에서 인물은 대개 제 것이 아닌 신적인 힘으로 변신하며, 그 결과에 불만족해도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그 예로 악타이온(3138-252)은 디아나의 알몸을 봤다는 이유로 여신의 힘에 의해 사슴으로 변하고, 이후 사냥개 무리에게 쫓기다 처참하게 사냥 당한다. 오비디우스는 그에게서 운명의 잘못이라면 몰라도/ 죄는 발견하지 못할 것”(3141-142)이라며 디아나에게 악타이온을 단죄할 명분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악타이온에게 복수의 물을 뿌리며”(3190) 그를 변신시키고, 악타이온은 자신을 한낱 사냥감으로 만든 여신에게 저항하기는커녕 기르던 개들에게 찢겨 죽는 신세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오 또한 윱피테르에게 정조를 뺏기고서 하얀 암송아지로 변한 것도 모자라 유노의 분노에 온갖 고초를 겪는데(1568-746), 변신 과정에서 이오의 주권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변신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기어봤자 결국 신보다 열등하니, 인간은 신의 손바닥 안에서 껍질이나 갈아치워지는 놀잇감에 불과한가? 󰡔변신 이야기󰡕의 변신이 오로지 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변신은 결국 필멸하는 인간과 초월적인 신 사이의 위계를 부각하는 장치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헤르쿨레스의 죽음과 신격화(9134-272)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윱피테르는 그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부분”(9251)나에게서 받은 것”(252)을 격리한다. 전자는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윱피테르에게서 받은 부분은 영원하여 죽음에서 안전하게 벗어나 있고, 화염으로도 제압할 수”(9253)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네아스의 신격화(14581-608)에서도 인간의 육체는 죽음에 속하는 것”(14603)과 떨어질 수 없으며, 죽음에서 벗어난 육체는 최선의 부분”(14604)만 남았다고 부른다. 즉 신은 인간과 다른, 불사의 초월적인 존재이며,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작품에서 결코 수동적으로 굴려지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을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로만 그리고 싶었다면, 무언가를 결단하기 전 인간이 생각하고, 갈등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상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신들을 장엄하고 탁월하게만 그릴 뿐, 굳이 인간처럼 싸우고 질투하는 장면을 삽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은 필멸하고 나약하지만, 작가가 이러한 인간들의 변신을 다룬 이유와 거기서 파생되는 의미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변신 이야기󰡕의 많은 이야기 가운데 변신 전후의 변화가 두드러지고 인물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이야기를 살핀 후, 이를 분석하여 변신과 변신하는 인간의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2. 본론

(1) 변신과 정체성

앞서 서시(11-4)에서 살펴보았듯, 변신은 신적인 힘으로 육체를 바꿔놓는 행위이다. 이때 변신은 징벌(“punishment”)이거나 구원(“rescue”)일 수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인물의 본질을 끌어내거나 약화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의식 없이 벌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확실히 잔인할 수 있다.3) 이때 변신이 징벌인지 구원인지 판단하려면 일차적으로는 대상을 변신시키는 존재의 시각에서 그 대상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면 될 것이다. 변신은 신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므로, 힘을 가진 자 입장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이를 벌주면 징벌이 되고, 자신에게 호소하는 이의 바람을 들어준다면 구원이 된다.

하지만 이것만 본다면 변신하는 자가 권능을 가진 존재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측면만 고려할 위험이 있다. 또한 변신을 단순히 신에 의한 징벌/구원으로 양분하면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뱀을 쳐서 성별이 두 번 바뀐 테이레시아스(3324-331)의 이야기에서는 누구의 힘으로 변신했는가보다는 그 힘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가 중시된다. 이런 경우 힘의 주인이 어떤 태도를 드러내는지만 가지고서는 변신을 평가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변신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정체성이 변신 전후로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 정체성, 즉 자기가 인식하는 스스로의 모습은 몸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마음은 타고난 몸과 일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변신하는 이의 갈망에 따라 변신은 구원도 징벌도 될 수 있다. 즉 원래 상태에 불만족하여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에 맞는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을 수도 있고, 강제로 변신하여 자신의 바람과 어긋나는 껍데기에 결박될 수도 있다. 이때 육체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외부 세계에서 실현하는 도구이면서 타인의 시선으로 조망되는 나이다. 따라서 육체가 변하는 일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새로운 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면서, 반대로 육체에 감금된 채 자기 정체성부터 공동체에서 수행했던 역할까지 빼앗기는 벌이기도 하다.

(2) 변신당하는 인간

변신한 사람의 정체성이 새로운 육체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 변신은 징벌로 기능하는데, 이는 앞서 살핀 악타이온 이야기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악타이온은 디아나의 알몸을 보았다는 이유로 사슴으로 변하지만, 그의 알맹이까지 사슴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이는 여전한 것은 마음뿐이었다.”(3203)그는 신음하여 소리질렀는데,/ 그것은 사람의 소리는 아니었지만 사슴이 낼 수 있는 소리도 아니었다.”(3237-238) 등에서 악타이온을 완전히 사슴처럼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악타이온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도 육체와 정신이 따로 노는 상태가 드러난다. 저자는 악타이온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카드무스여, () 그대에게 처음으로/ 슬픔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 악타이온과/ 그의 이마에 난 이상한 뿔과 주인의 피를 실컷 빤 너희 개 떼였다.”(3138-140)라고 서술한다. 이때 악타이온은 병렬 연결되어 있다. 이는 저자의 시각에서 악타이온은 뿔에 종속되지도, 반대로 뿔이 악타이온을 대변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그에 맞지 않는 사슴의 육체는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변의 사냥개와 악타이온의 친구들은 악타이온이 사슴이 된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사슴으로 여겨 사냥한다.

 

(3) 변신시키는 인간

하지만 변신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징벌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구원 범주의 변신은 자신 혹은 타자의 육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피스 이야기(9415-797)에서 이피스는 신에게 기원하여 자신의 성별을 바꾸고 사랑하는 소녀와 결혼한다. 변신하기 전 이피스는 여자지만 공식적으로는 남자이다. 이는 이피스의 아버지 릭두스가 딸은 내게 더 부담스럽고, 행운은 내게 재력을 거절”(9676-677)했다는 이유로 아들이 아니면 키울 수 없다고 아내에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피스의 어머니는 이피스의 성별을 숨겨 키우고, 그렇게 이피스는 남자로 길러져 이안테라는 소녀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변신 전 이피스가 가진 몸과 이피스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피스는 여성의 신체를 가졌지만, 이피스가 누리는 모든 것은 남성으로서 성취한 것이다. 이피스는 남자아이로 성을 속였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고, 릭두스의 아들로 생활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이안테까지도 결혼의 신 휘메나이우스를 부르며(9765) 남성인 이피스와 맺어지기를 기원한다. 즉 이피스의 육체는 실제로는 여성이되 대외적으로는 남성이며, 이피스는 (남들이 보기에) 남성의 육체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표현하며 정체성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안테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 이피스는 더 이상 자신의 성별을 숨길 수 없다. 만약 이피스가 여자의 몸을 가진 게 탄로나면, 외부의 시각에서 이피스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강제로 변신한 것과 다를 게 없다. 비록 이피스가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끼리의 사랑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4) 하지만 당시 사회상을 제쳐두더라도, 성별이 뒤바뀌면 기존 성별로 쌓아올린 자신은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건 마찬가지다. 즉 결혼식 때 이피스의 성별이 드러난다면, 그녀는 악타이온이 사슴의 몸에 갇혔듯 기존에 누리던 것을 모두 잃은 채 여성의 몸에 결박당하는 것이다.

이피스는 남성으로 간주되므로, “자연”(9758)이 이피스에게 부여한 성별이 바뀌기만 하면 결혼도, 그 이후의 생활도 깔끔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이른바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성별을 바꾸는 일은 당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피스는 타고난 대로 여자로서 사랑해야 하는 것을”(9748) 사랑해야 하지만, 몸을 따르지 않고 부질없고 어리석은 정염을 털어버리지”(9745) 못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이어 신들은/ 주실 수 있는 것은 기꺼이 다 내게 주셨고,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도, 그녀도, 내 장인이 되실 분도”(9755-757) 원하지만, “그들 모두보다 더 강력한 자연(自然)은 그러기를 원치”(9758) 않는다고 독백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제 육체와 실제 자기 육체의 간극을 절감하고 비통해한다.

하지만 이피스의 슬픔은 여신 이시스(이오)의 도움으로 해결된다. 결혼식 전날, 이피스 모녀가 제단에서 이오를 부르며 도움을 간청하자, 이에 이시스가 긍정적인 전조로 응답하기 때문이다.(9771-784) 이렇게 여신의 힘으로 이피스는 잠시 전만 해도 소녀였지만 지금은 소년으로서 신전을 나서고,(9791) “소년 이피스로서 자신의 이안테를 차지했다.”(9797) 앞서 이피스는 괴롭게 독백하며 나를 소녀에서 소년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안테여, 너를 바꿀 수 있을까?”(9743-744)라는 말을 섣부른 희망처럼 읊조렸었다. 하지만 소년 이피스는 릭두스의 아들이자 이안테의 남편으로서 유노와 휘메나이우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수 있었다. 즉 이피스는 성취될 희망도 없이 사랑”(9724)할 수밖에 없었던 옛 육체를 신의 힘으로 교체하고, 이로써 자신의 바람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 인간이 이끄는 변신

이피스의 변신은 악타이온의 변신과 다를까? 사실 이피스는 결혼식 전날까지 자신이 처한 문제를 타개할 방책을 구하지 못했다. 즉 여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피스는 높은 확률로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피스에서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피스의 변신은 악타이온의 변신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이피스가 변신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상당 부분이 자의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최종 변신은 이시스의 힘으로 완료했으나, 변신을 이루려는 동기와 간절히 기원하는 행위는 모두 이피스의 것이다. 이피스의 독백에서 드러나듯, 이피스는 여자의 몸으로 이안테와 맺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더 열렬히 사랑했다.”(9725) 즉 사랑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며 괴로워하면서도, 자신 혹은 이안테가 변신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는 악타이온이 자신의 의지라곤 한 줌도 없이, 디아나의 힘으로 엉겁결에 변신당하여 새로운 육체에 갇혀버린 것과는 심히 대조적이다.

또한 이피스의 변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과 엮고, 이를 육체가 따라가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변신하려는 열망이 바로 이안테를 향한 사랑으로 추동되기 때문이다. 이는 변신 전 이피스의 독백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피스는 여자의 몸으로 사랑을 이룰 수 없다고 탄식하면서도, 여전히 이안테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버리지 못한다. 즉 이피스는 이안테를 사랑할 수 있는, 동시에 이안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 한다. 비록 독백 중후반부에서 이피스는 육체 때문에 희망을 꺾는 것처럼 말하고는 있지만, 적어도 이피스는 자살이나 도피로 현 상황을 회피하지는 않았으며 결혼식 전날까지 고민하였다. 이후 이피스는 제단에서 어머니와 함께 기원하며 결국 원했던 육체를 얻게 된다.

이때 이피스가 거친 수많은 고민과 절망은 이안테를 수용하고 이안테에게 수용될 수 있는 방향으로 본인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자기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읽을 수 있다. 그 노력은 이피스가 소녀일 때는 (비록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지언정) 변신을 열망하게 하여 여신의 응답을 불러오고, 변신한 후에는 소녀였을 때 이루지 못했던 의지를 명확히 실현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변신 측면에서 악타이온의 육체가 타인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이로써 그의 정체성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며, 관계 측면에서 아폴론이 다프네에게(1452-567), 뷔블리스가 제 오빠에게(9450-665) 품은 일방적인 욕망과도 다르다. 다프네는 처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즉 아폴론과 성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월계수로 육체를 바꾸고, 뷔블리스는 오라비에게 버림받고 홀로 제 눈물에 녹아 샘물이 된다. 즉 두 사람의 육체와 의지가 서로를 향할 때만 사랑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3. 결론

인간은 필멸하고 나약하고 때로는 신의 권능에 억압받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피스와 같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신시킬 잠재력이 있다. 다시 말해 육체를 직접 재구성하는 능력은 없으나, 자신이 바라는 자신과 현 육체로 이룰 수 있는 자신을 치열하게 저울질하며 고민할 수 있다. 이 고뇌는 곧 신에게 기원하는 행위로 이어져 변신을 불러오므로, 곧 변신의 조건과 기본 토대로 기능한다. 따라서 변신은 그간의 생각과 행위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올려 이룩하는 것이며,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새로운 자신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최종 변신을 이루는 신적인 힘을 빼고는 모두 인간이 이뤄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변신의 원동력은 사랑에 있으며, 인간은 다른 이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고, 이어 이에 맞게 육체를 변화시킬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즉 인간은 몸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사랑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고 변신하며, 그 과정에서 역사에 족적을 남긴다. 이를 통해 작가가 󰡔변신 이야기󰡕의 서시에서 서술하듯, 변신에 대한 이 노래우주의 태초로부터/ 우리 시대까지 막힘 없이”(3-4) 이어질 수 있게 된다.

 

1) Ovidius, 천병희 역, 󰡔변신 이야기󰡕, , 2017, p. 699.

 

2)

"metamorphosis, n." OED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December 2018. Web. 23 December 2018.

http://www.oed.com/view/Entry/117313?redirectedFrom=metamorphosis#eid

 

3)

Feeney, Denis. “Introduction.” Metamorphoses. Ovid. London: Penguin Books, 2004. p. 29.

(Rui Rato, “Love, Desire and Transformation: From Ovid to Thomas Harris”. Via Panorâmica: Revista Electrónica de Estudos Anglo-Americanos, série 3, nº 5, 2016: 64-71. ISSN: 1646-4728. Web: http://ler.letras.up.pt/. p. 65.에서 재인용)

4)

윤일권, 고대 그리스 사회와 신화 속의 동성애, 󰡔유럽사회문화󰡕 vol.3, 2009,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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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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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견(管見)에서 통견(洞見)으로

서론

오이디푸스 왕에서 두드러지는 오이디푸스의 특성은 단연 지혜로움이다. 그는 일찍이 아무도 맞추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테바이의 왕좌를 거머쥐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 또한 그를 명석한 인간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사제의 눈에 오이디푸스는 인생의 제반사에 있어서나 신들과 접촉하는 일에 있어서나 () 사람들 중에 으뜸가는 분(32-34)”으로 비친다. 비록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하지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까지도 오이디푸스를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440) 가장 유능한 인물로 평가한다.

오이디푸스의 영리함은 작품의 형식과 맞물리며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오이디푸스 왕치밀한 추리 구도로 쓰여 있어 진실을 추적하는 오이디푸스의 면모가 부각된다. 또한 대사 속 수많은 의문문에서 드러나듯, 오이디푸스는 의심나는 부분을 주변인에게 캐물으며 어떻게든 지식의 공백을 메꾸려 한다. 이를 고려하면,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왕을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하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면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소포클레스가 이 대목을 통해 작품 속 핵심적인 비밀을 극적으로 폭로할뿐더러, 오이디푸스가 적극적으로, 심지어 때로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로 비밀을 파헤치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해당 부분을 중심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려 한다. 먼저 오이디푸스가 충격적인 예언을 한 테이레시아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필 것이다. 다음으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참고하여 을 중심으로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를 비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이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2. 본론

1) 왕과 예언자의 갈등

오이디푸스 왕다양한 연령층의 탄원자들의 대표인 사제가 오이디푸스에게 역병을 없앨 방도를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사제에게 자신이 테바이를 구하려고 계속해서 고민했으며, 숙고 끝에 신의 의견을 듣는 것을 유일한 대책”(68)으로 택했다고 말한다(66-72). 이에 따라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어떤 행동이나 말로 이 도시를 구할 수 있는지”(71-72)를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신탁을 정확하게 풀이하는 일은 결코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었다. 이에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에게 신탁 풀이를 맡기도록 권한다. 눈먼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가 가장 포이보스 왕의 의중을 잘 읽는 사람”(284-285)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관례에 따라 테이레시아스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모든 것에 통달하고 있는 테이레시아스여, 말할 수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하늘의 일이건 땅의 일이건,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어떤 재앙이 이 나라를 뒤덮는지 그대는 알 것이요라며 테이레시아스가 직관적이며 천상의 지식을 가진 자라고 칭송하며 그에게 답을 구한다.” 하지만 테이레시아스가 답변을 회피하자 오이디푸스는 그에게 애걸하다가 결국 분통을 터뜨린다. 마침내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를 역병의 원흉으로 지목하자 오이디푸스의 분노는 정점에 달한다. 모욕적인 언사가 수차례 오간 끝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참혹한 미래를 예언하고 떠나간다.

 

2) 갈등의 씨앗: 앎의 차이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언이 엉터리라며 예언자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왜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로 먼저 예언이 거의 오이디푸스를 향한 욕설과 다름없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만일 그가 예언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자신은 테바이의 현명한 왕에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 패륜아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는 오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예언을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둘의 충돌을 단순히 모욕감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상당히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은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가 대립 각을 세우는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앎은 현실 세계를 감각하여 얻은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세계를 직접 관찰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추후 판단의 근거로 활용한다. 그 예로 오이디푸스는 사자와 목자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들은 정보를 종합하여 라이오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나간다. 이때 오이디푸스의 앎은 현실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러한 특성 덕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된다. 예를 들어 극의 초반부에서 사제는 오이디푸스를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44)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역병을 없앨 방도를 구하러 오이디푸스를 찾아온다. 이때 오이디푸스는 수많은 생각의 길을 헤매고”(67) “두루 살펴 () 대책을 () 실천에”(68-69) 옮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취한 방식은 모두 경험으로 축적한 지식과 판단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앎은 감각에 얽매인다. 아무리 멀리까지 본들 결국 눈은 눈이기 때문이다. 눈을 거치는 순간, 다양한 정보 중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파편처럼 전달된다. 육안으로 현실을 관찰한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대상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가 녹아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이디푸스가 인식하는 대상은 감각이 허용하는 범위 안의 것, 즉 현실에서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것에 국한된다. 요약하면 오이디푸스는 육안이라는, 잘 닦였지만 굉장히 좁은 외부세계행의 통로를 거쳐 앎을 획득한다.

이와 달리 테이레시아스는 시각중심적인 사유에서 상당히 벗어난 존재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볼 수 없으므로 오이디푸스처럼 예민하게 현실의 사물을 관찰하고 정보를 취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는 시각이 행사하는 배제의 폭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존재이다. 또한 그는 단순한 장님이 아니다. 작중에서 그는 록시아스의 종”(410)이자 신과 같은 예언자”(298)로 등장한다. 테이레시아스의 앎은 아폴로가 델피 신탁에서 사람들에게 암시한 징조를 이해함으로써 얻은 것이다. 비록 감각적 지식에서는 오이디푸스에게 뒤떨어질지언정, 감각을 초월한 영역에서는 테이레시아스가 훨씬 탁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이로써 테이레시아스는 역설적이게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보는 존재가 된다.

 

3) 이성의 불완전성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는 각각 현실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 걸출한 지성으로 군림한다. 이때 두 인물은 상대가 가진 앎을 자신이 가진 앎보다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임철규가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소개한 월터 J.옹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이해(理解)()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햇빛을 보는 자”(375)로 여기고,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능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에 반해 오이디푸스에게 눈먼 예언자는 영원한 어둠 속에 사는 자”(374)일 뿐이며, 세계를 조금도 보지 못하는, 즉 알지 못하는 자다. 그런데 정작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소. 그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말이오”(413-414)라고 한다. 눈부신 자랑거리로 여겼던 자신의 지식이 예언 앞에서 순식간에 맹목적이며 한계가있는 앎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말은 지혜로운오이디푸스의 자부심에 날카로운 흠집을 내고 만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의 말에 보이는 반응이 다른 인물에게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 인물의 말에서 해결의 단서를 끌어 모은다. 이때 그는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듭 의심하고 확인한다. 예를 들어 퓨토에서 돌아온 크레온에게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에 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성급하고 빗발 같은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극의 89행에서 129행 사이에 오이디푸스가 크레온과 주고받은 21차례의 대화 중에서 오이디푸스는 11차례에 걸쳐서 재빠른 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는 테이레시아스와 대화할 때는 예언을 꼬치꼬치 따지며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가 논리적인 반박보다 앞서고, 오이디푸스가 겪는 감정의 동요는 예언자에게 쏟아내는 노여움으로 구체화된다. 오이디푸스가 택하는 단어도 상당히 공격적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예언은 그따위 말”(354), “모함”(363), “허튼소리”(365)이자 시기심”(382)이욕”(386)에서 비롯된 바보 같은소리(433)로 간주된다.

이는 테이레시아스의 영적인 앎이 오이디푸스의 이성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세히 관찰한 후 그것이 내포하는 논리적 흠결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예언은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너머에 있으며, 이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예언의 맞고 틀림을 즉시 판단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가 예언자가 아닌 이상 앞일을 보고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어떻게든 테이레시아스의 앎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몽매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예언이 맞아떨어지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예언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오이디푸스의 앎이 가지는 우월함이그의 머릿속에서만큼은보존된다.

이때 오이디푸스를 인간 이성의 상징으로 간주한다면, 테이레시아스는 이성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이성에 대응된다. 여기서 테이레시아스를 모욕하고 비난하는 오이디푸스는 푸코가 생각하는 이성과 닮아 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던 근대는 통제와 억압과 폭력 위에 설립된 건축물이라는 견해를 드러낸다. 책 첫머리에서 푸코는 나병의 사례를 들며 광기가 어떻게 통제받았는지 밝힌다. 중세 이후 나병은 없어졌지만 나병에 대한 의식(ritual)과 나환자를 격리수용하는 구조는 잔존하고 있으며, 이에 광인이 억압당한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광기는 곧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닌 병적인 것이며, 의술이라는 미명 아래 치료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는 이성이 세계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이성에 합치하지 않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매도하고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이성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있다는 이유로, 광기는 이성의 통제와 지배 하에 놓이고 말았다.

푸코에게 광기는 이성 중심의 서구문화가 포용하지 않고, 배척했던 인간적 인식과 특성의 한 요소일 뿐이었다. 광기를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면, 테이레시아스의 예언도 일종의 광기로 볼 수 있겠다. 과거 광기와 이성이 구분되지 않던 시점에서 광기는 인간을 비밀스런 지식과 숨겨진 지혜로 인도해주는 인간 자신의 동물성으로 이해되었다. 광기의 힘을 빌리면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을 과감히 파고들 수 있게 된다. 이때 광인 특유의 통찰력은 예언자의 그것과 통한다. 이성의 대변자인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를 바보 같은 소릴”(433) 지껄이고, “여기서 방해만 되고”, 역병의 대책을 찾느라 골몰하는 자신을 괴롭히”(445-446)는 인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가 단서라는 퍼즐 조각을 모두 모아서 내린 결론은 예언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끔찍한 진실을 마주한 오이디푸스는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1182-1183)이라며 탄식한다. ‘햇빛은 앞서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면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해당 대목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햇빛을 보는 자”(375), 테이레시아스를 영원한 어둠 속에 사는 자”(374)로 생각하며 우월감을 만끽하였다. 하지만 끔찍한 비밀을 알고 나서, 오이디푸스는 그토록 훌륭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앎이 사실 편협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장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하는데, 육안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에 그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기 눈을”(1276) 찌르고, 이로써 육안이라는 구속복을 스스로 벗어던진다.

 

3. 결론

작중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테이레시아스에게만 사용된다는 사실은 사뭇 흥미롭다. 예를 들어 코러스장은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할 때 사람들 중에 오직 저분 안에만 진리가 살아 있지요.”라는 문장으로 그를 지칭한다. 뒤이어, 역병의 원흉으로 몰려 분노하는 오이디푸스가 그따위 말을 하다니 어쩌면 저토록 뻔뻔스러울 수 있나! 그러고도 어떻게 그 벌을 면하리라 생각하시오?”(355)라고 하자, 테이레시아스는 벌써 면했소이다. 내 진리 안에 내 힘이 있기 때문이오.”(355)라고 응수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진리는 전지적, 초월적 시점에서 현실을 통찰하여 파악한 세계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테이레시아스는 심안을 통해 진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그로써 앞일을 예견한다. 이와 반대로, 오이디푸스는 진리가 실현되어 발생한 사건을 따라잡는 데 급급하므로, 진리를 좇지만 정작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과학 기술과 측정 기구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육안은 더욱 예민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점점 신봉으로 변질되고 있다. 능력을 신뢰하는 경향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예언자에게 그랬듯, 폭력적인 이성은 불가해의 것을 비이성으로 규정하고 비과학적인 망상으로 폄하한다. 이성의 한계에 부딪친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독자에게 이성의 편협함을 자각하고, 더 넓은 사고를 지닐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4. 참고 문헌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 2008.

미셸 푸코, 이규현 역, 광기의 역사, 나남, 2003.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하상복, 푸코 & 하버마스, 김영사, 2009, p.90.

 

고명섭. [고명섭의 인간 탐구] 미셸 푸코, 한없이 자유에 가까운 광기., 인물과사상, 2006.1.

백경옥, 오이디푸스의 지식, 철학논총, July 2001, Vol.25.

오생근, [특별기고]푸코의 광기의 역사, 혹은 침묵의 고고학.사회비평, 35 2003.2.

이성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서양고전학연구, March 2016, Vol.55(1).

진일상, 문학과 시선-“오이디푸스에 투영된 고대 그리스의 시선, 한국괴테학회, 괴테연구, Vol.18.(0), 2006.

최화선, 신화의 변형과 재창조: 오이디푸스 신화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September 2000, Vo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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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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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실명의 연속이다

 

서론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아마 많은 이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라 오이디푸스를 부친 살해 및 근친상간의 상징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소포클레스는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자로서의 오이디푸스를 부각한다. 이러한 노력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소포클레스는 신화를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치밀한 추리 구도로 구성하였다.” 이렇게 비극을 구성한 덕에 오이디푸스는 살인범의 정체를 밝혀가는 존재로 두드러진다. 그리고 테이레시아스는 예언을 통해 살인범의 정체를 오이디푸스의 정체와 엮는데, 오이디푸스는 둘 사이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를 고려하면 오이디푸스는 이성의 힘으로 과거를 재구성하여 진실을 밝히려 하는 근대적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인간상은 과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세계의 작동 원리를 밝히기 위해서 끊임없이 현상을 관찰하고 이론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초기에는 연구자 각각이 따로따로 현상을 연구하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이 등장하면서 많은 학자의 믿음이 그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렇게 과학은 과학자 집단의 연구를 동력 삼아 자신의 체계를 다듬어왔다. 요약하면, 집단을 이루는 과학자 개개인은 근대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며, 과학은 이러한 과학자 집단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의 행보가 연구자뿐만 아니라 과학이라는 학문 전체의 흐름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보고서에서는 먼저 오이디푸스 왕과학 혁명의 구조와 관련지어볼 것이다. 다음으로 육안에서 심안으로의 이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필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오이디푸스 왕에게서 드러나는 과학의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2. 본론

(1) 오이디푸스와 패러다임

인간의 인식작용은 주로 ’()을 통해 가능해지는데, 이때 감각작용은 바로 인식작용으로 이어진다. 이는 그리스어, 영어, 불어 등에서 본다는 동사가 안다는 의미로 쓰인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 우리의 눈은 단순한 감각기관을 넘어, 세계를 인식하는 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때 인식의 틀은 토머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 개념에 대응된다. 그는 패러다임을 성취는 과학 활동의 경쟁 방식으로부터 끈질긴 옹호자들의 무리를 떼어낼 만큼 가히 전대미문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유형의 문제들을 연구자들의 재편된 그룹이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업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패러다임을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으로 이해한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행보에서 과학의 전개 과정을 읽어낸다면, 실명 전후로 오이디푸스가 보인 변화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명 이전에, 오이디푸스는 눈으로, 그리고 눈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초로 세계를 이해하였다. 이때 오이디푸스가 육안으로 얻은 지식 체계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에 대응된다. 정상과학이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 활동으로, “몇몇 특정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과학의 한 걸음 나아간 활동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이디푸스가 직접 획득한 (인간의) 지식은 스핑크스를 무찌르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으며, 여태껏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성취를 이끌었다. 또한 작품 첫머리에서 제우스의 사제는 오이디푸스를 찾아와 역병의 원인을 알아내달라고 간청한다. 역병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자, 지혜로운 인간의 대표 격인 오이디푸스가 조언자로 낙점된 것이다. 이를 통해 육안으로 얻은 지식이 테바이를 발전시키는 이론적 토대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식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바로 라이오스의 살인범과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이에 대해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예언의 형태로 답을 주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폄하한 후 경험과 관찰에 근거하여 예언의 가부를 판단하려 한다.

이 대목은 정상과학이 지배력을 잃어가는 시기와 대응된다. 한때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마스터키로 추앙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론의 허점과 반례가 하나둘씩 등장한다. 이에 정상과학은 제 몸에 수정안을 더덕더덕 붙이거나 일부 문제를 무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사실을 이론에 끼워 맞춘다, 오이디푸스가 본 자신은 코린토스에서 태어났으며 뛰어난 지식으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따라서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오이디푸스의 앎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일종의 변칙이다. 오이디푸스는 이 변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라이오스의 살인범을 추방해야만 역병이 끝나므로, 이 문제를 마냥 덮어둘 수는 없다. 남은 방법은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며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길뿐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육안을 이용하여 예언을 부정할 근거를 보강하려 한다.

하지만 이오카스테, 사자, 목자의 말과 오이디푸스의 기억은 외려 예언이 옳다는 쪽, 즉 오이디푸스의 앎이 잘못되었다는 쪽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렇게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점점 긴장이 고조되다가,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불안과 충격은 절정에 이른다. 오이디푸스는 좌절하며 탄식하고, 곧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시각을 포기한다. 이는 과학 이론이 도저히 실제 세계와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침몰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이때 폐기된 과학 이론은 인간의 파편적인 앎에, 실제 세계의 작동 방식은 예언으로 표현되는 신의 앎에 대응된다.

 

(2) 심안을 향하여

오이디푸스는 지혜롭다. 오이디푸스는 누구도 풀지 못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통쾌하게 풀어내었고, 끝내는 테바이의 왕좌까지 차지하여 지혜로운 군주로 추앙받는다. 오이디푸스의 명석함을 칭송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면, “첫 장면에 등장한 제우스 신의 사제의 눈에 오이디푸스는 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자”, “가장 위대한 자”, “가장 고결한 자”, 스핑크스로부터 테바이 시를 해방시킨 가장 지혜로운 자로 비친다(31행 이하). 코러스의 눈에 비친 오이디푸스도 마찬가지다(504행 이하).”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앎은 육안을 거쳐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계를 지닌다. 임철규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부분이라는 틀, 인식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눈으로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이 인식의 범주에 속하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안중에도 없게된다.

이러한 육안의 속성은 오이디푸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비록 그는 육안으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정작 그의 눈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1271-1273). 제 운명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눈 또는 그것의 측정’(metron)에 기반한 과학적, 이성적 사유를 통한 앎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자각하였고, 이에 스스로 육안을 제거하였다.

실명 이후에,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처럼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육안을 상실한 상태가 심안을 획득한 상태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테이레시아스의 심안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적인 것으로 신의 처벌과 보상에 따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심안은 신에게서 부여받는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패러다임과 연결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패러다임의 결점을 일부 메꾸더라도, 자연을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심안과 최대한 비슷한 형태로 자신의 눈을 개조했고, 이로써 종래의 관견(管見)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자신의 이론이 실제 세계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론을 검토하며 진실에 다가가려는 과학자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3. 결론

위에서 밝혔듯 오이디푸스가 육안에서 심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은 패러다임의 변화와 유사하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스스로눈을 찔렀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감각의 한계를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찔러 육안의 편협함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과학은 기존 이론의 허점이 충분히 많이 드러나면, 자기를 파괴하면서 다음 이론으로 나아간다. 이때 파괴가 수반되는 것은 해당 이론을 뜯어고쳐야만 기존 이론에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토머스 쿤은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그것은 이미 성공적으로 완결되었던 과학 업적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새로운 이론은 () 이미 알려진 것에의 단순한 축적적 보완인 경우가 드물거나 전혀 그렇지 않은 이유이다. 새로운 이론의 동화는 기존 이론의 재구축과 기존 사실의 재평가를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이론은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버리는 것은 훨씬 고통스럽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때문에 육안으로 착실하게 쌓은 지식과 명성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예언이 진짜라면 오이디푸스는 반드시 훌륭한 군주에서 극악무도한 패륜아로 추락하게 된다.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그는 테바이의 역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인에게 질문하고 그들을 추궁한다. 예언이 자신을 파국으로 내몰지언정, 당면한 문제를 유야무야 넘기지 않고 진실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자 집단이 자신의 생각이 무참하게 파훼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이론을 무기 삼아 세계와 부딪쳐나가는 과정을 참으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4. 참고문헌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 2008.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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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옥, 오이디푸스의 지식, 철학논총, July 2001, Vol.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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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서양고전학연구, March 2016, Vol.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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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상, 문학과 시선-“오이디푸스에 투영된 고대 그리스의 시선, 한국괴테학회, 괴테연구, Vol.18.(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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