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견(管見)에서 통견(洞見)으로

서론

오이디푸스 왕에서 두드러지는 오이디푸스의 특성은 단연 지혜로움이다. 그는 일찍이 아무도 맞추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테바이의 왕좌를 거머쥐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 또한 그를 명석한 인간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사제의 눈에 오이디푸스는 인생의 제반사에 있어서나 신들과 접촉하는 일에 있어서나 () 사람들 중에 으뜸가는 분(32-34)”으로 비친다. 비록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하지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까지도 오이디푸스를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440) 가장 유능한 인물로 평가한다.

오이디푸스의 영리함은 작품의 형식과 맞물리며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오이디푸스 왕치밀한 추리 구도로 쓰여 있어 진실을 추적하는 오이디푸스의 면모가 부각된다. 또한 대사 속 수많은 의문문에서 드러나듯, 오이디푸스는 의심나는 부분을 주변인에게 캐물으며 어떻게든 지식의 공백을 메꾸려 한다. 이를 고려하면,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왕을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하는 작품으로 읽는다면,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면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소포클레스가 이 대목을 통해 작품 속 핵심적인 비밀을 극적으로 폭로할뿐더러, 오이디푸스가 적극적으로, 심지어 때로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로 비밀을 파헤치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해당 부분을 중심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려 한다. 먼저 오이디푸스가 충격적인 예언을 한 테이레시아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필 것이다. 다음으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참고하여 을 중심으로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를 비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이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2. 본론

1) 왕과 예언자의 갈등

오이디푸스 왕다양한 연령층의 탄원자들의 대표인 사제가 오이디푸스에게 역병을 없앨 방도를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사제에게 자신이 테바이를 구하려고 계속해서 고민했으며, 숙고 끝에 신의 의견을 듣는 것을 유일한 대책”(68)으로 택했다고 말한다(66-72). 이에 따라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어떤 행동이나 말로 이 도시를 구할 수 있는지”(71-72)를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신탁을 정확하게 풀이하는 일은 결코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었다. 이에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에게 신탁 풀이를 맡기도록 권한다. 눈먼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가 가장 포이보스 왕의 의중을 잘 읽는 사람”(284-285)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관례에 따라 테이레시아스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모든 것에 통달하고 있는 테이레시아스여, 말할 수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하늘의 일이건 땅의 일이건,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어떤 재앙이 이 나라를 뒤덮는지 그대는 알 것이요라며 테이레시아스가 직관적이며 천상의 지식을 가진 자라고 칭송하며 그에게 답을 구한다.” 하지만 테이레시아스가 답변을 회피하자 오이디푸스는 그에게 애걸하다가 결국 분통을 터뜨린다. 마침내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를 역병의 원흉으로 지목하자 오이디푸스의 분노는 정점에 달한다. 모욕적인 언사가 수차례 오간 끝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참혹한 미래를 예언하고 떠나간다.

 

2) 갈등의 씨앗: 앎의 차이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언이 엉터리라며 예언자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왜 오이디푸스는 예언을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로 먼저 예언이 거의 오이디푸스를 향한 욕설과 다름없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만일 그가 예언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자신은 테바이의 현명한 왕에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 패륜아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는 오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예언을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둘의 충돌을 단순히 모욕감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상당히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은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가 대립 각을 세우는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앎은 현실 세계를 감각하여 얻은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세계를 직접 관찰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추후 판단의 근거로 활용한다. 그 예로 오이디푸스는 사자와 목자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들은 정보를 종합하여 라이오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나간다. 이때 오이디푸스의 앎은 현실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러한 특성 덕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된다. 예를 들어 극의 초반부에서 사제는 오이디푸스를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44)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역병을 없앨 방도를 구하러 오이디푸스를 찾아온다. 이때 오이디푸스는 수많은 생각의 길을 헤매고”(67) “두루 살펴 () 대책을 () 실천에”(68-69) 옮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취한 방식은 모두 경험으로 축적한 지식과 판단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앎은 감각에 얽매인다. 아무리 멀리까지 본들 결국 눈은 눈이기 때문이다. 눈을 거치는 순간, 다양한 정보 중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파편처럼 전달된다. 육안으로 현실을 관찰한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대상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한계가 녹아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이디푸스가 인식하는 대상은 감각이 허용하는 범위 안의 것, 즉 현실에서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것에 국한된다. 요약하면 오이디푸스는 육안이라는, 잘 닦였지만 굉장히 좁은 외부세계행의 통로를 거쳐 앎을 획득한다.

이와 달리 테이레시아스는 시각중심적인 사유에서 상당히 벗어난 존재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볼 수 없으므로 오이디푸스처럼 예민하게 현실의 사물을 관찰하고 정보를 취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는 시각이 행사하는 배제의 폭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존재이다. 또한 그는 단순한 장님이 아니다. 작중에서 그는 록시아스의 종”(410)이자 신과 같은 예언자”(298)로 등장한다. 테이레시아스의 앎은 아폴로가 델피 신탁에서 사람들에게 암시한 징조를 이해함으로써 얻은 것이다. 비록 감각적 지식에서는 오이디푸스에게 뒤떨어질지언정, 감각을 초월한 영역에서는 테이레시아스가 훨씬 탁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이로써 테이레시아스는 역설적이게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보는 존재가 된다.

 

3) 이성의 불완전성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는 각각 현실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서 걸출한 지성으로 군림한다. 이때 두 인물은 상대가 가진 앎을 자신이 가진 앎보다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임철규가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소개한 월터 J.옹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이해(理解)()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햇빛을 보는 자”(375)로 여기고,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능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에 반해 오이디푸스에게 눈먼 예언자는 영원한 어둠 속에 사는 자”(374)일 뿐이며, 세계를 조금도 보지 못하는, 즉 알지 못하는 자다. 그런데 정작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소. 그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말이오”(413-414)라고 한다. 눈부신 자랑거리로 여겼던 자신의 지식이 예언 앞에서 순식간에 맹목적이며 한계가있는 앎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말은 지혜로운오이디푸스의 자부심에 날카로운 흠집을 내고 만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의 말에 보이는 반응이 다른 인물에게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 인물의 말에서 해결의 단서를 끌어 모은다. 이때 그는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듭 의심하고 확인한다. 예를 들어 퓨토에서 돌아온 크레온에게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에 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하여 성급하고 빗발 같은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극의 89행에서 129행 사이에 오이디푸스가 크레온과 주고받은 21차례의 대화 중에서 오이디푸스는 11차례에 걸쳐서 재빠른 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는 테이레시아스와 대화할 때는 예언을 꼬치꼬치 따지며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가 논리적인 반박보다 앞서고, 오이디푸스가 겪는 감정의 동요는 예언자에게 쏟아내는 노여움으로 구체화된다. 오이디푸스가 택하는 단어도 상당히 공격적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예언은 그따위 말”(354), “모함”(363), “허튼소리”(365)이자 시기심”(382)이욕”(386)에서 비롯된 바보 같은소리(433)로 간주된다.

이는 테이레시아스의 영적인 앎이 오이디푸스의 이성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세히 관찰한 후 그것이 내포하는 논리적 흠결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예언은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너머에 있으며, 이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예언의 맞고 틀림을 즉시 판단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가 예언자가 아닌 이상 앞일을 보고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어떻게든 테이레시아스의 앎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몽매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예언이 맞아떨어지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예언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오이디푸스의 앎이 가지는 우월함이그의 머릿속에서만큼은보존된다.

이때 오이디푸스를 인간 이성의 상징으로 간주한다면, 테이레시아스는 이성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이성에 대응된다. 여기서 테이레시아스를 모욕하고 비난하는 오이디푸스는 푸코가 생각하는 이성과 닮아 있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던 근대는 통제와 억압과 폭력 위에 설립된 건축물이라는 견해를 드러낸다. 책 첫머리에서 푸코는 나병의 사례를 들며 광기가 어떻게 통제받았는지 밝힌다. 중세 이후 나병은 없어졌지만 나병에 대한 의식(ritual)과 나환자를 격리수용하는 구조는 잔존하고 있으며, 이에 광인이 억압당한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광기는 곧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닌 병적인 것이며, 의술이라는 미명 아래 치료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는 이성이 세계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이성에 합치하지 않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매도하고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이성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있다는 이유로, 광기는 이성의 통제와 지배 하에 놓이고 말았다.

푸코에게 광기는 이성 중심의 서구문화가 포용하지 않고, 배척했던 인간적 인식과 특성의 한 요소일 뿐이었다. 광기를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면, 테이레시아스의 예언도 일종의 광기로 볼 수 있겠다. 과거 광기와 이성이 구분되지 않던 시점에서 광기는 인간을 비밀스런 지식과 숨겨진 지혜로 인도해주는 인간 자신의 동물성으로 이해되었다. 광기의 힘을 빌리면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을 과감히 파고들 수 있게 된다. 이때 광인 특유의 통찰력은 예언자의 그것과 통한다. 이성의 대변자인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를 바보 같은 소릴”(433) 지껄이고, “여기서 방해만 되고”, 역병의 대책을 찾느라 골몰하는 자신을 괴롭히”(445-446)는 인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가 단서라는 퍼즐 조각을 모두 모아서 내린 결론은 예언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끔찍한 진실을 마주한 오이디푸스는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1182-1183)이라며 탄식한다. ‘햇빛은 앞서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면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해당 대목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햇빛을 보는 자”(375), 테이레시아스를 영원한 어둠 속에 사는 자”(374)로 생각하며 우월감을 만끽하였다. 하지만 끔찍한 비밀을 알고 나서, 오이디푸스는 그토록 훌륭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앎이 사실 편협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장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하는데, 육안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에 그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기 눈을”(1276) 찌르고, 이로써 육안이라는 구속복을 스스로 벗어던진다.

 

3. 결론

작중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테이레시아스에게만 사용된다는 사실은 사뭇 흥미롭다. 예를 들어 코러스장은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할 때 사람들 중에 오직 저분 안에만 진리가 살아 있지요.”라는 문장으로 그를 지칭한다. 뒤이어, 역병의 원흉으로 몰려 분노하는 오이디푸스가 그따위 말을 하다니 어쩌면 저토록 뻔뻔스러울 수 있나! 그러고도 어떻게 그 벌을 면하리라 생각하시오?”(355)라고 하자, 테이레시아스는 벌써 면했소이다. 내 진리 안에 내 힘이 있기 때문이오.”(355)라고 응수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진리는 전지적, 초월적 시점에서 현실을 통찰하여 파악한 세계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테이레시아스는 심안을 통해 진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그로써 앞일을 예견한다. 이와 반대로, 오이디푸스는 진리가 실현되어 발생한 사건을 따라잡는 데 급급하므로, 진리를 좇지만 정작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과학 기술과 측정 기구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육안은 더욱 예민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점점 신봉으로 변질되고 있다. 능력을 신뢰하는 경향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예언자에게 그랬듯, 폭력적인 이성은 불가해의 것을 비이성으로 규정하고 비과학적인 망상으로 폄하한다. 이성의 한계에 부딪친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독자에게 이성의 편협함을 자각하고, 더 넓은 사고를 지닐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4. 참고 문헌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 2008.

미셸 푸코, 이규현 역, 광기의 역사, 나남, 2003.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하상복, 푸코 & 하버마스, 김영사, 2009, p.90.

 

고명섭. [고명섭의 인간 탐구] 미셸 푸코, 한없이 자유에 가까운 광기., 인물과사상, 2006.1.

백경옥, 오이디푸스의 지식, 철학논총, July 2001, Vol.25.

오생근, [특별기고]푸코의 광기의 역사, 혹은 침묵의 고고학.사회비평, 35 2003.2.

이성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서양고전학연구, March 2016, Vol.55(1).

진일상, 문학과 시선-“오이디푸스에 투영된 고대 그리스의 시선, 한국괴테학회, 괴테연구, Vol.18.(0), 2006.

최화선, 신화의 변형과 재창조: 오이디푸스 신화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September 2000, Vol.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