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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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든 맥파든의 소설 네버 라이는 트리샤와 이선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현재 시점과 정신과 전문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에이드리엔 헤일 박사가 이끌어 가는 과거의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됐다. 또한 등장인물의 심리와 사건을 짐작케 하는 헤일 박사의 상담 녹음본이 간간히 등장해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소설의 시작인 프롤로그에 에이드리엔 헤일 박사는 이런 말을 한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

아무리 성능이 좋은 거짓말 탐지기도 오차율이 25퍼센트에 달하지만 내 눈은 거의 정확하다. 내 앞에 앉은 인물의 표정, 몸짓,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 나는 진실을 포착해낼 수 있다.

예외 없이 언제나.

적어도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5-6)


제목인 '네버 라이(Never Lie)'와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헤일 박사의 독백이 묘하게 어울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 트리샤와 이선은 신혼부부로 그들이 꿈꾸던 집을 찾기 위해 외딴 고급 저택의 오픈하우스를 방문했다. 하필이면 이들이 집을 보러 간 날은 갑작스러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로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가까스로 저택에 도착했지만 약속한 부동산 중개인은 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트리샤는 이 집이 탐탁지 않았다.


"이 집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 (14)


그들이 하루 묵어갈 이 집은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에이드리안 헤일 박사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3년 전 돌연 실종되었으며, 책 출간 일주일 후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이런 사연이 있는 집이지만 트리샤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으려 그 책을 꺼내다 숨겨진 방을 발견했다. 역시 의문의 사연이 있는 집에 숨겨진 방을 묘사하는 데 스티븐 킹의 소설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그 안에는 헤일 박사가 남긴 수많은 심리치료 녹음 테이프(환자들의 세션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었다.


반면 정신과 전문의 헤일 박사는 거대한 자신의 저택에서 환자들을 상담했다. 상담 내용을 녹음하는 그녀의 환자 중 'EJ', 'PL', 'GW' 이니셜로 표시가 된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언급됐다. 그녀 주위 사람들은 외딴 곳의 거대한 저택에 혼자 있으며 정신과 상담을 하는 그녀에게 방범 시스템이라도 구축해 놓으라 조언했지만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병원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는 루크와 가까워질 무렵, 그녀에게 집착하는 내담자가 생겼다. 바로 EJ라는 이니셜로 표시된 에드워드 제이미슨이었다. 상담 종료를 통보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상담을 요구했다


병원에서 예약 진료가 계획된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주차하려던 자리를 새치기한 어느 차량 때문에 예약 시간에 조금 늦었다. 다행히 예약이 미뤄져 그날 진료는 잘 넘어갔으나, 새치기 차량에 해코지를 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에드워드는 그녀를 협박하게 됐고 상담과 함께 원하는 처방전까지 받았다. 내키지 않는 루크를 설득한 그녀는 그와 함께 에드워드에게서 그 영상을 다시 빼앗았다.


소설이 절정으로 진행되면서 헤일 박사에게 일어난 실종 사건과 현재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 트리샤, 이선과의 관계가 조금씩 이어졌다. 그리고 놀라운 반전이 이어졌다. 이는 네버 라이의 정수이기에 여기까지만 써야 할 것 같다. 스포된 반전은 김빠진 탄산음료와 같으니 말이다.


네버 라이는 이 문장으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뿐이다." (340)


여기서의 두 사람은 주인공인 트리샤와 이선이었다. 그들의 비밀은 '적어도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헤일 박사의 프롤로그와 대비를 이루면서 그 비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이니셜로만 표시된 환자들의 정체, 그리고 숨겨진 방에서 발견한 녹음 테이프까지. 네버 라이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선사했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던 헤일 박사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과정과 트리샤와 이선의 신혼여행이 악목으로 변하는 과정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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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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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작가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을 한데 모은 작품집이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보여준 과학적 설정 위에 인간 존재와 감각을 탐구하는 김초엽 특유의 문장이 어김없이  빛난다. 각 편마다 질문과 여운이 달라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라는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비춰본다.


(1)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미래 사회,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현이는 회사 갈등으로 연구원을 그만두고 솜솜 피부관리숍에서 일한다. 그곳을 찾아온 안드로이드 수브다니는 잘 녹슬고 싶다는 이유로 금속 피부 이식을 요청한다.


과거 그는 인간 예술가 남상아와 함께 예술적 실험을 했으나 관계가 틀어졌다. 이제는 인간으로서의 흔적을 금속 피부 위에 새긴 채 스스로 녹슬어 사라지길 택한다.


타인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라지려는 선택, 존재의 자기결정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2) 양면의 조개껍데기

표제작이자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외계 행성 셀븐출신의 샐리는 두 개의 자아, 레몬과 라임을 한 몸에 지닌 채 지구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연인 류경아는 이 두 자아를 모두 사랑하지만, 레몬의 충동적 행동으로 갈등이 깊어진다.


샐리는 자아 분리 시술을 고민하지만 결국 레몬과 라임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화해에 이른다우리 역시 하루에도 수많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을 남긴다.


(3) 진동새와 손편지

알파 C 서브섹터의 조난 우주선에서 집단 네트워크 지성체인 화자는 이곳에서 진동새라 이름 붙인 미지의 생물을 발견한다진동새는 몸을 떨며 고유한 패턴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데, 그 패턴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닌 감각과 감정까지 품는다.


화자는 인간의 언어가 지닌 한계를 돌아보며, 결국 “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 당신을 만나러 와야 했어요” (131쪽)라는 단 한 줄의 마음을 위해 수많은 진동이 필요했음을 깨닫는다소통의 본질을 묻는, 낯설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다.


(4) 소금물 주파수

울산 해역을 배경으로, 기억을 잃은 로봇 돌고래 해몽과 과학자 임영선, 손녀 모아의 이야기가 교차한다바다의 소리와 주파수, 인간과 로봇, 과거와 현재가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한 번은 돌아와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해몽과 모아의 여정은 귀향과 성장을 상징한다태화강 복원과 철새 귀환 같은 실제 도시 변화가 서사에 스며 있어 더욱 생생하다.


(5) 고요와 소란

어느 날 전 세계 사물과 동물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그러나 북극에서 소리를 채집하던 연구자 서해겸은 유일하게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수십 년이 지난 뒤 화자 서영은 해겸을 찾아가 사물의 목소리에 대해 묻는다.


물건과 생명에 깃든 영혼, 인간이 도구가 되어 그것을 기록한다는 해겸의 가설은 세계가 가진 보이지 않는 층위를 떠올리게 한다다소 난해하지만, 읽고 나면 사물과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6) 달고 미지근한 슬픔

인류가 물리적 몸을 버리고 데이터 세계로 이주한 시대를 배경으로 양봉가 백단하는 벌을 기르며 살아 있다는 느낌을 찾고, 연구자 이규은과 함께 존재의 의미를 탐색한다.


가상 공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고통과 쾌락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양자 큐비트 결정이 곧 우리의 신체라는 설정은 과학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며, 살아 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7) 비구름을 따라서

룸메이트 최이연의 추도식 초대장을 받은 보민이 미스터리한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각기 다른 날짜와 장소가 적힌 초대장, 그리고 이연이 즐기던 보드게임 노바 파우치는 현실과 평행 우주를 잇는 단서가 된다이연은 반투막 너머의 세계를 찾아 비구름을 따라간 것일까.


삼투 현상을 은유로 한 결말은 경계와 이동, 선택의 자유를 상징한다.


(8) 일곱 편의 단편들

일곱 편 모두 장르와 결이 다르지만, “존재와 선택이라는 굵은 축으로 묶인다안드로이드, 다중 자아, 진동으로 소통하는 생명체, 데이터화된 인류 등배경은 미래와 우주를 넘나들지만,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향한다.


개인적으로는 비구름을 따라서의 물리 현상 삼투를 서사로 풀어낸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었다하루 한 편씩 천천히 곱씹어 읽으면 더 좋겠지만, 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는 양면의 조개껍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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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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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 작가의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러시아 발레의 정통 무대를 무대로, 예술가의 빛과 그림자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발레리나의 삶을 한 편의 고전 발레처럼 1, 2, 3, 코다, 커튼콜로 나누어 서술하는 독특한 형식은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고전 발레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한 구성 덕분에, 소설을 읽는 내내 무대 위의 박동과 긴장감이 생생히 전해진다.


주인공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어린 시절 가난한 미혼모 밑에서 자랐다. 우연히 이웃집 아이의 춤을 따라 하다 발레의 재능을 인정받아, 러시아 최고 등용문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늘 과소평가를 받으며 실력을 증명해야 했던 나탈리아는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고백하며 치열한 경쟁과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한다.


훈련과 무대에서 만난 친구 니나 베레지나, 훗날 파트너가 되는 알렉산드르 니쿨린,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디렉터 드미트리 오스트립스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삶을 지탱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고독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한다. 이 고독이야말로 나탈리아를 움직이는 근원적 힘이다.


2막에서는 세계적인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해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길이 그려진다. 국제 콩쿠르 1, 압도적인 실력, 그리고 무대 위의 찬란한 박수갈채. 그러나 절정에서 나탈리아가 느낀 것은 예상치 못한 공허함이다. 이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온몸을 다 바쳐 목표를 이루어낼 때 치러야 하는 대가는, 그토록 원하던 걸 손에 넣자마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186)


이는 꿈을 이룬 후 찾아오는 허무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 시기 그녀를 둘러싼 갈등도 치열하다. 동료이자 정치적 야심가 드미트리는 그녀의 성공을 견제하며, 예술과 권력의 미묘한 긴장을 보여준다. 나탈리아는 결국 더 큰 무대를 향해 파리로 향하지만, 불안과 압박은 더욱 깊어진다.


3막의 무대는 파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우아함, 모스크바의 감동과 달리 파리는 유혹하는 도시로 묘사된다. 최고의 무대,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스스로를 위협하는 위기감을 느낀다. 발에 피로 골절이 생기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그녀의 경력은 한순간에 끊어진다.


나탈리아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바닥은 그보다 훨씬 더 깊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던 그녀는 밑바닥을 이미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지금 떨어진 밑바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고백으로 절망의 심연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일으킨 것도 결국 발레였다. 무대는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이자, 동시에 살아갈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 속 밤새(Night Bird)’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지만, 무대 밖에서는 외로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실제로 극 중 드미트리가 도시를 떠나며 '밤새와 몽상가의 도시'에게 인사하는 장면은, 이 단어가 지닌 상징성을 더욱 깊게 만든다. 화려한 조명 아래 춤추는 나탈리아야말로 가장 찬란한 밤새.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만큼 다양한 러시아식 이름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감사의 말에서 이름의 구조와 호칭을 친절하게 설명해 독자의 혼란을 덜어준다. 무대와 연습실, 공연장의 공기, 땀 냄새와 음악까지 세밀히 묘사해, 독자는 마치 객석에서 그녀의 춤을 바라보는 듯한 생생함을 느낀다.


작가는 밤새들의 도시의 마지막에 나탈리아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르다(Alis volat propriis)”라는 문구와 함께 새롭게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화려함과 추락, 절망과 부활을 모두 겪은 뒤 비로소 얻는 자유를 통해 인생의 새로운 날갯짓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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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정원 - 2000년 지성사가 한눈에 보이는 철학서 산책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박재현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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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멀게만 느낀다. 나 역시 그렇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들의 책을 직접 읽어보려 하면 금세 포기하곤 했다. 논어나 도덕경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읽다 보면 문장이 널을 뛰고 결국은 책장을 덮으며 철학의 어려움을 다시금 느끼곤 한다. 이런 나와 같은 증상이 있다면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철학의 정원』이 철학의 문턱을 조금 낮춰줄 것 같다.


이 책은 철학을 거대한 숲이나 산이 아니라, 산책할 수 있는 정원으로 안내한다. 100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주요 저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는데,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삶과 인간, 세계와 종교 같은 주제로 나누어 배열했다. 덕분에 읽는 사람은 마치 정원 길을 따라 걷듯, 다양한 사상과 철학자들을 차분히 만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정말 정원을 산책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난이도 설정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를 최고 난이도 10으로 정하고, 다른 철학서들을 그 기준에 맞춰 소개한다. 예를 들어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난이도 9, 노자의 도덕경은 난이도 2로 매겨져 있다. 개인적으로 도덕경이 결코 쉬운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의 매력이 드러난다. 저자는 난이도를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도록 자극한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는 철학책을 단순한 난해한 텍스트가 아니라 스스로 탐험할 수 있는 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동양 철학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이다. 노자, 공자, 장자 외에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일본 학자인 구키 슈조 정도가 예외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는 저자의 한계라기보다 철학사 자체가 서양 중심으로 정리되어 온 현실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스피노자나 데카르트는 익숙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나 실학자는 이름만 겨우 들어본 정도였다. 이 책을 통해 그런 공백을 새삼 느끼게 된 것도 하나의 의미였다.


철학의 정원은 단순한 철학 입문서가 아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철학이나 사상에 흥미를 지닌 사람을 위한 안내서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이름만 들어본 철학자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든든한 안내자가 된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철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읽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철학은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학문이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소개한다. 죽음 앞에서 단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자일 수 있다. 철학의 정원은 그런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작은 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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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빛
강화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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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치유의 빛은 힐러 직업을 가진 성직자가 신성력을 소모하는 일종의 마법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이것이 강화길 작가의 치유의 빛을 읽게 된 동기다. 사실 강화길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살짝 페이지를 훑었는데 검은 바탕의 한 문장만이 써진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소설 속의 한 대목이긴 하나 그 페이지를 보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박지수는 어릴 적부터 존재감이 거의 없었지만, 열다섯 살 가을 급격히 체격이 커지면서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옭죄는 굴레가 된다, 지수는 타인의 시선과 따가운 말들에 큰 상처를 입으며 스스로를 점점 더 가두게 만든다. 그렇게 소외되고 위축되었던 시절, 지수에게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친구 해리아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그렇게 그룹의 원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수영장에서 해리야가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것이 지수에게 더 큰 트라우마로 남아, 고향 안진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성인이 된 지수는 거식증과 폭식증을 앓으며 병적으로 몸무게와 식사에 집착한 삶을 살아간다. 176cm, 50kg을 유지하기 위해 식욕억제제까지 복용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지수는 중대한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숨이 턱 막히는 날개뼈 아래의 통증인 원인불명의 신경성 근육통 반복되고 주변의 권유도 잦아져, 결국 고향인 안진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안진에서 지수는 과거 학창 시절의 친구 해리아, 그리고 해리아와 가까웠던 이신아의 소식을 듣는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채수회관은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한 낯선 공간으로, 다양한 통증을 지닌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아오는 곳이다. 지수는 해리아와 신아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채수회관에서 수련을 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지수는 오래도록 억눌린 고통과 기억을 마주하며,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지수는 재생 수련이라는 명목 아래, 각자가 가진 고통의 '최초의 기억'을 되짚도록 강요받는다. 마치 소설 초반 지수의 동네에서 사기를 쳐 도망을 간 조칠현 목사와 같은 사이비의 느낌도 나지만 지수는 이 과정에서 관리자들과 부딪히며 마지막까지 분투한다. 이윽고 지수는 자신의 오랜 트라우마의 실체를 직면하고 치유의 빛을 체험하게 된다.


주인공 지수의 몸은 여성이 몸이 사회적으로 감옥이 되는 현실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 인물들에게도 이러한 잣대가 적용이 된다. 따라서 이들 인물 간의 관계는 동경, 질투, 애증, 소유욕 같은 감정이 여성들 사이의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유발한다. 게다가 인물들은 가족, 학교, 지방 소도시, 종교 단체 같은 폐쇄적 공동체 속에서 억압받는 존재로 묘사되어 한국형 여성고딕소설이 되는 역할이 되기도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심리적 갈등과 상징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등장인물의 개별적 배경보다는 그들의 관계성과 상징적 역할이 더 강조되어 등장인물을 파악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또한 언급한 주요 등장인물 외 소설 초반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해리아의 라이벌인 안지연과 체육교사 김이영이 후반으로 갈수록 뚜렷한 서사적 비중을 잃고 사라져 아쉽기도 했다. 또한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힐라리아와 안티오페의 설화의 상징성이 나에겐 난해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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